678화
플라허 시 원추리 마탑 소속 마법사 가원.
가원은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사실, 마법사들 중에 자부심이 약한 사람은 찾기 드물었다. 현실을 자신의 의지로 바꾸는 학문에 발을 디디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었고 타고난 재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마법사들이 스스로를 선택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스승을 두지 못하고 길에서 주운 마도서로 마법을 배운 반쪽짜리 마법사들도 크게 대접받는데 하물며 마탑 소속 마법사는 어떻겠는가.
가원 같은 마법사는 자부심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늘 위에는 다른 하늘이 있는 법.
원추리 마탑이라는 이름이 통하지 않는 상대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에인로가드였다.
제국 마법의 적통!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한이라고 합니다.”
“편, 편하게 계시지요. 저는 원추리 마탑 소속 가원이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이난도는 바로 옆으로 뻗었다. 이한은 가이난도의 등을 걷어찼다. 가이난도는 재빨리 일어났다.
“다들 상태가...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일이 좀 있었습니다.”
이한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통 산맥에서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원은 이한의 표정을 다른 뜻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꽤 위험하고 어려운 마법 연구를 하신 모양이군요... 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만.”
“예. 그런 걸로 하겠습니다.”
“......”
이한은 상대방에게서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의 냄새를 맡았다.
별로 놀랍진 않았다. 의사소통 잘 안 되는 건 마법사들의 특징 중 하나였으니까.
“혹시 여러분들도 오늘 저녁 교류회에 참가하십니까?”
“무슨 교류회를 말하시는 건지?”
“마탑 교류회 말입니다. 올해 플라허 시에서 열리는.”
마법이란 학문은 워낙 넓고 그 끝이 보이지 않아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혼자서의 힘으로 파고드는 건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길드를 만들고 마탑을 세워서 같이 절차탁마하곤 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서로 얻은 지식이나 비전을 공유하고 교류하는 자리.
그게 바로 교류회였다.
제국의 마법 학파 단위로 모이는 거대 규모의 학회는 아니더라도 인근 지역의 길드나 마탑들이 모여서 여는 교류회는 생각보다 잦았다. 이번에 벌어지는 교류회는 플라허 시에서 열리는 모양이었다.
“아. 아닙니다. 저희는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초대와는 상관없습니다! 자유로운 자리니까요. 에인로가드의 학생분들이라면 얼마든지 참석하셔도 될 겁니다.”
가원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렇게 딱딱한 자리도 아닌데다가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방문했다고 자격 미달이라고 할 사람도 없을 터.
편하게 참가해도 됐다.
“제가 알기로 다른 에인로가드 학생 분도 참가한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이십니까?”
이한은 의아해했다.
에인로가드는 이 인근 지역의 길드나 마탑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했듯이 자유로운 자리입니다. 관심이 있고 자격만 된다면 얼마든지 방문하실 수 있지요. 그 분도 교류회에 나오는 마법에 관심이 있으신 거 아니겠습니까?”
‘다른 선배인가?’
이한은 만약 에인로가드의 선배가 참가한다면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곧 새 학기가 시작되고 여러 선배들을 만나게 될 텐데 미리 안면을 익혀둬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참. 혹시 오늘 교류회에 발표하는 게 있으신지?”
이한의 질문에 가원은 뿌듯함과 자신감 섞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오. 어떤 걸 발표하시나요?”
“흠흠.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가원은 마차 바닥에 마법진 세 개를 중첩시켜서 만들어내더니 시약을 놓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이한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물 원소 마법으로 구체 형태를 유지한 뒤 거기에 추가적인 속성을 부여하시는 거군요. 마력을 분류하고 증폭시키는...”
“컥, 커헉.”
주문을 외우던 가원은 사레가 들려서 콜록였다.
옆에 있던 소년이 보자마자 설명도 없이 마법을 알아맞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 어떻게?”
“예? 저도 마법사니까요.”
‘이래서 에인로가드 출신들은...!’
같은 마법사라고 저게 다 됐다면 가원이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가원은 헛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에인로가드 출신 마법사와 원한을 맺으면 평생 후회할 수도 있었다.
“같은 마법사여도 이런 복잡한 마법을 한 번에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
‘딱히 안 복잡한 것 같은데...’
해골 교장이나 교수들의 마법과 비교하면 가원이 준비하고 있는 마법은 단순하고 알기 쉬웠다.
물론 그렇게 말하면 실례가 될 수 있으니 이한은 최대한 돌려서 좋게 말했다.
“비슷한 마법들을 본 적도 있고 해서 빨리 알아본 것 같습니다. 운도 좀 따랐고요.”
“하... 하하. 혹시 너무 단순하진 않습니까?”
가원은 이한의 눈치를 봤다.
이 마법은 허공에 물 구체를 불러 온 다음 마력을 여과하고 증폭하는 장치로 만드는 마법이었다.
꽤 실용적이고 괜찮아서 마탑 내에서는 호평을 받았지만, 가원은 5년 전에 발표된 <오타의 광성 프리즘> 마법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 같아서 좀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비슷한 마법이 나온 이상 후발주자는 더 참신하고 뛰어난 시도를 보여줘야 호평을 받는 것이다.
“마법은 복잡하거나 단순한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효과가 있느냐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가원의 얼굴이 밝아졌다.
에인로가드 학생의 응원에 자신감이 차오른 것이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마법진의 이 부분은 빼도 될 것 같습니다만.”
“예? 이건 좌면부의 형태를 잡아주는 역할을...”
“없어도 다른 쪽의 힘으로 고정이 될 겁니다.”
“잠, 잠ㄲ...”
가원이 말리기도 전에 이한은 마법진의 일부를 잘라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
“이쪽 테두리의 마력도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진짜 아닙니다! 마법에 필요한 마력을 증폭시켜서 확보해야 하는...”
“이쪽에 마력을 압축해 넣으면 그만이죠.”
이한은 광령묵(光靈墨)으로 그려진 마법진의 일부를 다시 그리고, 흑영사(黑影沙)에 마력을 순간적으로 압축해서 담았다.
1초도 걸리지 않는 간단한 수정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마법진에 필요한 마력이 1/3으로 줄어들었다.
가원은 경악해서 눈을 깜박였다.
‘에... 에인로가드...!’
정말 무섭다!
* * *
“알시클 님. 같이 가시겠습니까?”
“음. 넌 갔다 오는 게 좋을 거 같아. 많이 배울 테니까.”
알시클은 교류회 이야기를 듣고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마법사들과 많이 알고 지낼수록 좋았다.
“알시클 님은요?”
“난 싫어.”
“정어리 안 드셔도 됩니다.”
“...정어리 때문이 아니라, 내 연구 결과 때문이야. 거기 나가면 연구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고 질문이 날아올 테니까.”
알시클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진저리를 쳤다. 이한은 안쓰럽다는 듯이 알시클을 쳐다보았다.
알시클 뿐만 아니라 이한도 언젠가는 겪을 수 있는 미래였던 것이다.
‘교수들이 만날 때마다 연습하고 있는 마법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고 하면 돌아버릴지도 모르겠군.’
“비통 산맥은 어땠지?”
“유니콘을 만났습니다.”
“뭐? 진짜?”
알시클은 놀랐다.
번개걸음 교수가 뛰어난 탐험가이긴 했지만, 유니콘도 그에 못지않게 희귀한 동물 아닌가.
만나기 위해서는 운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만난 것이다.
“와. 축하한다. 유니콘의 털이라도 하나 받았고?”
“털도 받고 뿔 조각도 받고... 에인로가드에서 키우기로 했습니다.”
“...뭐?? 왜?!”
비스듬하게 누워 있던 알시클은 벌떡 일어났다.
유니콘이 어지간해서는 사람들 많은 곳에서 보금자리를 만들지는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게, 실종된 교수님을 찾아냈는데 그 분이 유니콘을 돌보고 있었고.”
“아. 그 미ㅊ... 벤도졸 교수?”
‘유명하잖아!?’
이한은 알시클이 바로 벤도졸이 누군지 알아차리자 놀랐다.
“도철이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 있어서 유니콘이 위험해지자...”
“이런.”
“교장 선생님이 오셔서 벤도졸 교수님을 데려가시고 유니콘을 에인로가드로 옮겼습니다.”
“...잠깐. 잠깐만.”
알시클은 듣다가 황당했다.
무슨 고대 연극도 아니고 갑자기 이야기 끝에 해골 교장이 와서 다 해결해주고 끝난단 말인가?
“사이에 생략이 많이 된 것 같은데...”
“앗. 알시클 님. 저 출발해야 합니다.”
“그, 그래. 잘 갔다와라. 다음에 꼭 이야기해주는 거 잊지 말고.”
“별 거 아닙니다.”
“방금 한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대체 별 게 아닌데?”
알시클은 투덜거리면서도 이한을 배웅해줬다.
친구들은 마력 멀미와 피곤으로 뻗어 있던 탓에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심지어 에안두르데도 골골대고 있었다.
‘여긴가?’
아까 가원에게 들은 위치로 발걸음을 옮기자, 낡고 허름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도 작은데다가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저택의 겉만 봐도 부서진 부분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원래라면 잘못 찾아왔나 싶었겠지만 이한은 그 저택에서 느껴지는 마력에 제대로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안에 마법이 걸려있나보군.’
공간을 확장할 수 있는 마법사에게 저런 겉모습을 별 의미가 없었다.
이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제각각 짐을 챙겨서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모자를 푹 눌러 쓴 낯익은 얼굴의 까마귀 수인 마법사도...
“...디레트 선배?!”
“누구야!?”
디레트는 깜짝 놀라서 등에 달린 날개를 퍼덕이며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낯익은 후배였다.
“후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저도 방학이니까 쉬고 있었습니다. 교류회는 우연히 초대받았고요.”
“아... 아. 그렇겠네.”
디레트는 갓 1학년을 마친 이한이 교류회에 어떻게 초대 받았나 의아해했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자리였지만 1학년 학생은 보통 초대받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다. 얘라면 가능해.’
하지만 디레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스로 납득을 끝냈다.
이 후배라면 충분히 초대를 받고도 남을 것 같았다.
“혹시 정체를 숨기시는 겁니까?”
“그,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긴 해.”
“혹시 요즘 연구가 막히셨...?”
“?!”
디레트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어!?”
“연구가 막히면 이런 자리에 잘 참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아. 눈치는 빨라가지고. 괜히 질문 받기 싫어서 모자 쓴 거야.”
“저 같으면 참석을 아예 안 할 것 같습니다만...”
“초대를 받았는데 방명록에 이름도 안 남길 수는 없거든. 그리고 교류회가 꽤 도움되는 자리기도 하고.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했지.”
디레트는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화제를 바꿨다.
“후배. 방학에 뭐 했어? 또 일만 한 건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근에는 비통 산맥에서 교수님하고 같이 유니콘 쫓았습니다.”
이한은 자신이 보기에도 꽤 그럴듯하게 들린다고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컥.”
디레트는 기침이 들려서 모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왜 교수님하고?”
“현상금이 걸려 있어서요?”
“유니콘에??”
“아뇨. 벤도졸 교수님이요.”
“...?”
디레트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하고 싶었지만, 안에서 들리는 종소리에 슬슬 들어갈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따라와.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해주고.”
“예.”
“...유니콘은 찾았어?”
“네. 교장 선생님이 에인로가드로 데려가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