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1화
확실히 자업자득이었던 만큼 이한은 자신에게 들어온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혼자서 해결했다.
“에인로가드 학생이십니까?”
“예.”
“3학년이신가요?”
“아닙니다.”
이한의 대답에 사람들은 알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4학년이군!
여러 마법사의 자기소개를 듣고 언제 한 번 같이 연구하자는 제안까지 받고 나서야 이한은 자리에 다시 앉을 수 있었다.
디레트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잠깐. 유크벨티레 어디 있어?”
“버두스 선... 아니, 유크벨티레 선배는 왜 찾으십니까?”
‘방금 버두스 선배라고 하려고 했나?’
디레트는 살짝 신경 쓰였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넘어갔다.
“방금 봤으면 네가 똑똑하단 걸 알 수 있었을 거야. 어디 있어? 봤겠지?”
“음... 저기서 준비하고 계시는데, 못 보셨을 것 같습니다만.”
이한은 홀 구석에서 다른 마법사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는 선배를 발견하고 대답했다.
뒤에서 무슨 발표가 진행되든 자신의 마법에만 집중하는, 전형적인 버두스 교수 타입의 마법사였다.
“아, 진짜!”
디레트는 탄식했다.
코홀티와 달리 이 후배는 진짜 똑똑하단 걸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전 괜찮습니다. 디레트 선배.”
“내가 안 괜찮거든?!”
디레트는 아까부터 눈치 없는 소리만 하고 있는 후배를 째려보았다.
“생각해보니 화나네. 후배. 넌 학교에서는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들에 다 뛰어들잖아.”
“그 정도는 아닌...”
이한은 결코 고의는 아니었다고 항변하려고 했지만 디레트는 무시했다.
“그런데 왜 유크벨티레 앞에서는 얌전하게 가만히 있는 건데? 네 능력을 보여주라고!”
“아니, 선배님이잖습니까...”
기본적으로 이한은 뜯어낼 것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좀 참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까지 버두스 교수가 살아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교수는 물론이고 선배들도 2학년 때 언제 어떻게 대면하고 도움을 받을지 모르는데 건방지게 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도 선배거든? 후배. 선배로서 첫 명령이야. 유크벨티레한테 한 방 먹여줘.”
불량해진 디레트는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목소리로 이한에게 지시했다.
물론 이한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한 이야기였다.
“으음. 그렇게 말하셔도 제가 그럴 능력이... 혹시 유크벨티레 선배님을 뒤에서 공격하는 것도 됩니까?”
“......”
“농담이었습니다.”
“...그런 얼굴로 농담하지 마...”
* * *
유크벨티레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
평소보다 반응이 뜨겁다는 게 느껴졌다.
마법사들이 흥분한 얼굴로 방금 나온 마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며 동작을 설명하고 있었다.
모두 다 인상 깊은 마법이 나왔을 때의 반응이었다.
‘뭐지?’
당연히 유크벨티레도 교류회의 카탈로그를 본 만큼 어떤 마법들이 나오는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런 반응이 나올 마법은 없었는데...
“유크벨티레 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유크벨티레는 발표에 쓸 아티팩트를 확인했다.
정교하고 복잡한 아티팩트라 준비 과정이 꽤 많이 들어갔다.
“실로 감복했습니다. 이런 마법을 보게 될 줄은...”
“아직 미완성이야. 지금 아첨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황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마법사들은 헛기침을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아티팩트는 정말로 대단한 물건이 맞았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펜던트였지만, 그 펜던트 안에는 수백 가지의 마법이 정교하게 엮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마법들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배치된 상태였다.
인공적으로 고립된 차원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
현실과 연결된 다른 차원에서 힘이든 소환수든 불러오는 것은 마법에서 널리 알려진 방법 중 하나라 그렇게 놀라울 것 없었지만, 유크벨티레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갔다.
그 차원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면?
물론 현실적인 제약이 있으니 아주 작은 크기의 차원만이 가능하겠지만 뛰어난 마법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법사가 새로 규칙을 정할 수 있는 세계가 잠시 손에 들어오는 셈 아닌가.
현존하는 다른 차원에 접촉할 때는 온갖 복잡한 탐색과 교섭이 필요했지만 이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만약 ‘막대한 마력이 넘쳐나는 차원’같은 걸 만들어내고, 그걸 고정시키는 데에 성공한다면...
저 아티팩트는 거의 무한한 마력을 끌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인공 차원 아티팩트!”
“오오, 오늘 정말 발표하는 것인가...!”
“?”
주변 마법사들이 시작하기도 전에 술렁이자 이한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디레트는 책을 덮고 유크벨티레의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대충 이런 식이야. 사실 워낙 어렵고 불안정한 연구라, 방금 말한 것처럼 편리하게 되지는 않아. 막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차원이라면 그걸 유지시키고 통로를 만드는 것도 그만큼 힘들 테니까.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정말 대단한 연구는 맞아. 나도 사실 유크벨티레가 이번에 여기서 발표할 수 있을까 걱정했거든.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네.”
친구의 작품이 발표 가능한 수준까지 올라온 것 같자 디레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크벨티레는 차원학에 관심이 많았고, 지속적으로 부여 마법에 차원학을 접목시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보려고 하고 있었다.
워낙 난이도가 높은 연구인만큼 걱정했었는데...
“후배. 그보다 트집 잡을 건 없어 보여?”
“예?”
“트집 잡아야지. 유크벨티레가 발표하면 뭐라도 흠집을 찾아내서 지적해!”
“......”
우정은 우정이고, 디레트는 그것과 별개로 흑마법 학파가 받은 모욕은 갚아줄 생각이었다.
“저렇게 난이도 높은 마법에서 제가 어떻게 트집을 잡습니까?”
“후배?”
“네.”
“넌 충분히 하고도 남아. 빨리 찾아봐.”
“아니...”
이한은 억울했다.
디레트가 왜 자신을 저렇게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한도 1학년 후배인데!
그래도 선배가 시킨 만큼 이한은 아티팩트를 노려보는 척을 했다.
워낙 마법사들이 많고 주변에 걸린 마법들이 많아 처음에는 마력을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대충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군. 여기까지가 관중석에 있는 마법사들이 흘린 마력이고. 저기서부터가 저 아티팩트의 마력인가.’
이한은 주변에 있는 마법사들이 들었다면 경악할 만큼 예민하게 공간의 마력을 구분해나갔다.
마침내 아티팩트만의 마력만을 오롯이 느낄 수 있게 되자 이한은 천천히 마력을 확인했다.
‘대단하다!’
아티팩트의 구조는 추진제를 연속적으로 점화시켜서 가속력을 얻는 로켓을 연상시켰다.
첫 번째 마법진에서 가속된 마력이 두 번째 마법진에서 한 번 더 가속되고, 세 번째 마법진에서 또 가속되고...
이런 식으로 마력의 힘을 극도로 증폭시켜 인공적인 차원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동력을 구하는 것이다.
이런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마법진들을 연쇄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충격과 발열을 계산할 수 있어야 했다.
동력을 확보한 뒤 차원을 만드는 마법식은 저 위의 일들과 비교하면 차라리 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버두스 교수 같은 사람이 이런 아티팩트를...”
“......”
디레트는 복잡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친구가 후배한테 저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조금 아팠던 것이다.
“앗. 디레트 선배. 흠집을 찾은 것 같습니다.”
“오. 뭔데?”
디레트는 귀를 쫑긋 세우며 반색했다.
유크벨티레 앞에서 후배의 똑똑함을 확실하게 증명할 기회였다.
“지금 저 안의 마력 흐름을 따라 간단하게 예상을 해봤는데, 도중부터 마법진이 살짝 비틀려서 완전한 원을 그리지 못하고 타원형으로 완성이 됩니다.”
“...?”
디레트는 이 후배가 저렇게 멀리 떨어진 아티팩트의 마력을 어떻게 느꼈는지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워졌다.
심지어 아티팩트 내부의 마력 흐름 아닌가!
“후배, 아티팩트 안의 마력 흐름을 어떻게 느꼈어? 거리가 멀 텐데?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마법사들도...”
“집중했습니다.”
“...아. 그, 그래. 집중. 집중 중요하지...”
너무나도 정석적인 대답에 디레트는 오히려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긴 집중해야 마력을 느끼겠지!
“잠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마력 흐름으로 예상까지 그려낸 것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긴 한데... 후배, 타원형으로 완성이 된다고?”
“흐름을 겹쳐서 계속 그리다보면 타원형으로 될 것 같습니다만.”
디레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유크벨티레의 마법을 옆에서 같이 도왔던 만큼 디레트는 이 마법이 타원형으로 완성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잘 알았다.
작은 크기의 인공 차원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차원 균열과 함께 다른 불확정 차원과 연결되는 것이다.
비교적 안전한 차원과 연결되면 다행이지만 위험한 차원과 연결되면 일이 귀찮아질 수 있었다.
“이건 말려야겠다.”
디레트가 일어나는 순간 아티팩트가 작동을 시작했다. 디레트가 경악해서 외쳤다.
“왜 벌써 시작하지?! 분명 시간이 남았을 텐데?”
“저희가 부탁했습니다!”
앞에 나와 있던 마법사들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이런 대단한 마법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해야 했다. 그래야 마법사들이 더 많은 걸 배워가지 않겠는가.
물론 디레트 입장에서는 매우 짜증나는 친절이었다.
“유크벨티레, 멈춰! 완전한 원이 아니라 타원형이야!”
“!”
유크벨티레는 친구의 말에 경악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저건 가볍게 넘길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우리가 분명 확인했소. 별다른 이상이 없었는데!”
교류회의 발표 마법들을 관리하고 점검하던 마법사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외쳤다.
황녀가 제출한 뒤 엄밀하게 관리한 건 물론이고 시작 전에도 한 번 점검을 마친 뒤였다.
그런데 웬 모자를 푹 눌러 쓴 마법사가 문제가 있다고 하니 황당할 뿐이었다.
“교류회를 망치지 말고 빨리 앉으시오!”
“아니, 안전 문제인데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이한이 어이없어하자 디레트가 탄식했다.
“원래 미친 마법사들이 자꾸 말도 안 되는 시비 걸어서 마탑이나 길드 쪽들도 예민해!”
“......”
진실을 알게 된 이한이 할 말을 잃은 사이 유크벨티레가 물었다.
“디레트. 근거가 뭐지? 넌 최근 며칠간 이 아티팩트를 만지지도 않았을 텐데?”
“이 후배가 느꼈어. 마력 흐름이 도중부터 살짝 오차가 난다고.”
“......”
“......”
갑자기 싸늘해지는 분위기에 디레트는 아차 싶었다.
‘적어도 내가 알아차렸다고 했어야 했는데...!’
후배가 똑똑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마음에 생각 없이 그냥 내뱉어버린 것이다!
차라리 디레트가 알아차린 거라고 했다면 유크벨티레는 믿어줬을지도 몰랐다.
“디레트... 흑마법 학파의 후배들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군. 내 주장이 맞다는 것만 증명된 것 같은데.”
“아, 아니... 얘는 진짜 알아차린다니까! 그리고 그거 오차 맞아! 지금이라도 멈춰!”
디레트의 말에 아까 이한을 칭찬했던 마법사들도 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그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소만...”
“허풍 아닌가? 생각해보니 아까 그 마법도 좀 너무 터무니없긴 했는데.”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환장하겠다!’
디레트는 외눈박이 나라에 떨어진 두눈박이가 된 기분이었다.
너무 뛰어나서 설득할 수 없다니!
“우레를 노래해주십시오, 정령이여.”
“?!”
옆을 보니 후배는 냉정한 태도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느니, 허풍을 떨고 있다느니 떠드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뇌성과 벼락을! 멸망한 왕국의 종루를 지키는 종지기도, 창해를 헤매는 조각배의 망루꾼도 당신의 이름을 두려워합니다.”
일반적인 정령의 힘과는 비교하기 힘든 정령이 차원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자, 좌중의 마법사들은 그 낌새를 느끼고 경악했다.
동시에 아티팩트도 기괴한 소리를 내며 오작동을 일으켰다. 펜던트 안의 마력 원이 점점 타원형으로 일그러졌다.
“!!”
“저, 저거...!”
“당신과 계약한 자가 마땅한 자격으로 당신을 부릅니다!”
페르쿤트라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이한은 앞을 향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