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뒤쪽에서 이한이 페르쿤트라를 불러오며 준비하는 사이 유크벨티레도 뒤늦게 위화감을 깨달았다.
“마흔네 번째 마법진 각도가 다르군. 누가 건드렸지?”
“......”
“......”
마법사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크벨티레는 차가운 눈빛으로 이들을 쳐다보았다.
이번에 준비한 아티팩트는 그 과정이 복잡한 만큼 완성한 뒤 옮기는 데에도 세심한 집중이 필요했다.
그걸 알았기에 유크벨티레는 아티팩트를 옮긴 뒤 발표가 시작하기 전 다시 한 번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혹시 모를 변수를 없애려고 했었다.
당연히 그 작업을 돕기 위해 여기 교류회 소속 마법사들도 참가했었고.
그런데 이제 와서 마법진 하나에서 미세한 오차를 발견하다니.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마법사 한 명이 창백한 표정으로 실토했다.
“이봐! 자네 같은 마법사가 왜 이런 실수를...!”
“아, 아까 가원의 마법이 생각보다 너무 놀라워서 집중력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변,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흑영사에 마법에 필요한 마력을 전부 다 압축해 넣었습니다.”
“정말인가? 그, 그건 놀랍군.”
집중력을 잃고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마법사를 탓하던 동료들도 순간 웅성거렸다.
가원이 그런 마법을 보여줄 줄이야!
“죄송합니다. 유크벨티레 님.”
“됐다. 너희 잘못이 아니니.”
“황녀 전하...!”
자신들의 허물도 덮어주는 황녀의 모습에 마법사들은 살짝 감동했다.
“이건 너희처럼 멍청한 자들에게 일을 맡긴 내 잘못이지.”
“......”
매콤한 에인로가드식 화법에 한 대 맞은 마법사들은 그대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유크벨티레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처에 나섰다.
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여덟 개의 금침(金針)이 타원형의 차원 관문 테두리에 박혔다. 그리고 짧은 축약 주문과 함께 <바콴탈라나의 고립>이 시전되었다.
콰직!!
공간이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차원 관문이 그대로 봉쇄되었다.
강력한 부여 마법이 공간까지 간섭한 것이다.
“이럴 수가...!”
방금 모욕을 받은 마법사도 굴욕을 잊고 감동할 만큼 완벽한 대응이었다.
꽤 높은 수준의 부여 마법사들도 대부분 아티팩트 제작이나 육체 강화 위주의 마법 활용에 집중하는데, 유크벨티레는 그런 관념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듯 부여 마법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놀라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대로라면 균열이 생기더라도 관문은 그대로 닫힐 터였다.
하지만 마법은 언제나 마법사의 예상을 벗어나기 마련.
쩍-
고립된 공간이 갈라지는 소리가 나더니 차원 관문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연결될 수 있는 무작위 차원들 중에서 상당히 위험한 차원과 연결되었다는 걸 깨달은 마법사들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정도면...’
‘악마다! 그것도 공작급!’
마법사들의 몸이 공포로 굳은 동안에 유크벨티레는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금침 여덟 개가 빛을 발하며 완전연소하더니 <바콴탈라나의 격쇄>를 시전했다.
치명적인 데미지를 가진 마법이 격류처럼 흐르더니 차원 관문 너머의 존재를 강하게 타격했다. 그 서슬이 너무나도 날카로웠기에 마법사들은 순간 막았나 싶었다.
하지만 관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마법사들을 다시 절망시켰다.
아하-뛰어난-인간-마법사로군-?
‘데미지가 없다!’
바콴탈라나의 비전 마법 2개가 모두 효과 없이 막히자 유크벨티레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이 정도면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위협적인 차원과 연결, 별다른 제약이 달리지 않은 관문, 그 관문을 넘어오려고 하는 공작급 악마!
하지만-아쉽게 됐군-아무리 지혜로워도-세상을-결정짓는 건-힘이거든-!
악마의 목소리는 교양 있고 품위가 있었지만 그 태도에 넘어가는 마법사는 아무도 없었다.
반갑네-교만공-가리사이마라고 불러주게-!
유크벨티레는 차가운 눈빛을 불태우며 전의를 다졌다.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힐 정도로 강력한 악마 공작이라 하더라도 에인로가드 학생은 물러서지 않는 법이었다.
심지어 5학년으로 올라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바콴...”
반갑네, 가리사이마! 그만 꺼지게!
-!
“!!!”
쾅!!!!!!
거대한 정령의 힘이 뇌우와 폭풍처럼 휘몰아치더니 교만공을 찢어발겼다.
무대 위의 마법사들은 좌중에 나타난 또 하나의 거대한 존재를 경악의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 * *
일단 혹시 몰라 페르쿤트라부터 소환한 이한이었지만, 유크벨티레가 쓴 마법을 보자 살짝 당황해서 멈춰섰다.
‘...괜히 불렀나?’
느낌상 저 마법으로 해결될 것 같은데, 그러면 페르쿤트라는 정말로 화를 낼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저번에 이상한 걸로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투덜투덜 댔었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제대로 된 일로 불렀겠지?
마침 페르쿤트라가 계약의 문을 완전히 넘어오며 물었다.
우렁우렁 울리는 천둥 같은 목소리에 이한은 죄책감을 느꼈다.
“죄송합...”
교만공! 교만공을 어떤 미친 마법사가 소환한 거냐?
“예?”
저건 교만공의 기운이지 않느냐! 저런 악마를 아무런 제약 없이 불러오려고 하다니!
“일부러 한 게 아니라 사고입니다. 페르쿤트라 님! 저 마법으로는 못 막습니까?”
사고! 너희 마법사들은 수명도 짧은 자들이 언제나 사고를 치는구나. 저걸론 못 막는다. 정교하더라도 힘이 부족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악마 공작은 마법을 찢은 뒤 관문을 통과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는 모자와 투구, 셔츠와 드레스, 바지와 치마 등 온갖 종류의 화려한 복식들을 통일성 없게 섞어 입은 악마였다.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기운만 아니었다면 이한은 웬 미친 마법사가 처음으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건가 싶었을 것이다.
봐라!
“페르쿤트라 님. 도와주십시오! 막아야 합니다!”
방법은 하나뿐이지.
“그게 뭡니까?”
반갑네, 가리사이마! 그만 꺼지게!
페르쿤트라는 다짜고짜 선공을 날렸다.
어지간한 강자도 갈기갈기 찢어발겼을 위력의 선공에 이한은 당황해서 물었다.
“협상 없이 이렇게 선공해도 되는 겁니까? 상대가 분노하면 어떡하죠?”
어차피 현세로 넘어 올 악마 공작 정도면 불리해지기 전에는 어떤 협상도 불가능하다! 머리는 있는 놈들이니 불리하게 만들어서 협상하는 게 나아!
오-반갑군-뇌공왕-
찢어발겨진 교만공은 순식간에 몸을 회복시켰다.
페르쿤트라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이한의 마력을 뽑아 올리더니 강하게 뿜어냈다.
천둥과 벼락이 교류회장 안을 뒤흔들었다.
살살하게-뇌공왕-자네는-아마-나처럼-편하지-않을-텐데-?
두 번이나 크게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리사이마는 당황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자신은 차원 관문을 별다른 페널티 없이 넘어온 존재.
그에 비해 상대는 마법사의 힘을 빌려 억지로 소환된 존재.
유불리가 너무나도 명확했기에 괜히 맞서거나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저렇게 다급히 공격한 것도 아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리라.
얼마나-남았나-한 번에서-두 번-정도?
오냐! 직접 겪어봐라!
페르쿤트라도 만만치 않았다.
교만공이 자신을 얕보고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호탕하게 웃으며 이한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한은 떨떠름한 시선으로 페르쿤트라를 쳐다보았다.
‘너무 낭비하시는 것 아닌가?’
마력이야 넘쳐나긴 하는데 굳이 저렇게 낭비하는 공격을...
한 번, 두 번, 세 번.
두 번까지는 웃으면서 넘기던 교만공도 세 번까지 당하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미소가 굳어졌다.
으하하하하하! 뒤져라!
굵은 기둥만한 벼락이 창처럼 휘둘러지고 교만공을 태워버렸다.
네 번을 넘어 다섯 번까지 당하자 교만공은 완전히 정색했다.
마법사가-꾀를-썼군-!
공작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교묘한 방법으로 마력을 보충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티팩트든 별개의 마법이든 간에 칭찬해줄 만했다.
마법사-그대-영혼은-특별히-우대해주겠네-!
팟!
순간 교만공이 반격을 개시했다.
페르쿤트라의 마력을 소진시키는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니, 그 다음으로 좋은 방법은 마법사를 직접 제압하는 거였다.
페르쿤트라는 교류회장 천장에 거대한 구름을 불러와 뇌우를 몰아치게 한 뒤 이한의 몸을 감쌌다.
놈이 널 노린다. 조심해라!
“예!”
각종 마법을 시전하며 대비하던 이한은 추가로 어떤 마법을 시전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페르쿤트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마법으로 뭘 하겠다는 거냐! 내가 직접 보호해주마!
“그게 무슨...”
페르쿤트라는 이한의 몸에 깃들더니 일체화를 시전했다.
쾅!
이한의 온몸에서 흘러나온, 유형화 된 벼락의 기운이 주변을 잠식해 들어갔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번개 원소에 대한 전능감에 이한은 전율했다.
마치 이 영역에 있는 번개 원소의 지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건 무슨...!’
이한은 손끝을 움직여서 허공에서 치는 벼락을 불러왔다.
순간 벼락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거대한 사슬이 되어 교만공을 후려갈겼다.
교만공은 흑적색 검을 꺼내 공격을 막더니 투덜거렸다.
마법사-대정령한테-몸을-맡기면-불타죽을-텐데-이-교만공에게-영혼을-바치는-게-낫지-않나-?
-개소리니까 무시해라!
이한 안에 들어간 페르쿤트라가 단호하게 외쳤다.
물론 이런 식으로 정령과 일체화해서 힘을 빌리는 건 매우 위험한 방식이 맞긴 했다.
정령은 기본적으로 마법사 같은 생명체가 아니다보니 마력을 얼마나 쓰면 마법사가 폐인이 되는지 잘 몰랐던 것이다.
대정령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 위험성이 커서, 몇 초 일체화하는 것만으로도 온 마력을 다 소진하고 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페르쿤트라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어린 마법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으니까!
-괜찮은 거 맞습니까? 제 마법으로 알아서 버텨보려고 했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네 마법은 어린애 소꿉장난이지!
페르쿤트라는 이한의 말에 코웃음쳤다.
아무래도 이 어린 마법사한테 진정한 마법이 무엇인지 보여줄 때가 된 것 같았다.
-봐라!
외침과 함께 페르쿤트라는 이한의 몸을 빌려 손끝에 벼락을 응축시켰다.
이한은 그 마법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마법은 <페르쿤트라의 하급 벼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차원이 달랐다. 새하얗게 백열(白熱)된 번개는 기존에 이한이 다루던 번개보다 난폭하고 흉악한 기세를 흩뿌렸다.
볼라디 교수한테 매번 두들겨 맞으면서 원소 변화 이론에 대해 배웠던 만큼 이한은 직감했다.
‘속성 강화!’
공격력이 부족한 물 원소를 회전시켜서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만들었던 것처럼 번개 원소를 압축시키고 정제해서 한 단계 위의 원소를 만들어 낸 것이다.
콰직!
백열된 벼락이 쏘아져나갔다.
페르쿤트라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연달아 벼락을 시전했다.
모았다가 쏘아내는 단순한 마법임에도 불구하고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교만공이 불러내는 방패막이들이 일격에 부서졌다.
-번개 원소를 쓰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다! 알겠느냐!
-앞! 앞 보십시오!
쇄도하는 교만공을 본 페르쿤트라는 한손을 들더니 섬뢰창과 번개 망토를 불러왔다.
그러나 아까 하급 벼락 마법처럼 이한의 마법과는 위력의 차원이 달랐다.
정신없는 순간이었지만 이한은 자신의 머릿속으로 밀려오는 번개 원소 운용법을 조금이라도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마력은 똑같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번개의 창을 피한 교만공이 재빨리 이한의 뒤로 돌았다. 페르쿤트라는 코웃음치며 번개 망토를 방사시켰다.
교만공은 짜증 가득한 소리를 내며 거리를 벌렸다. 주변 공기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섬뜩할 지경이었다.
뇌공왕-정말이지-그-마법사를-싫어하나보군-죽이려고-작정했나-?
-헉.
-무슨 헉이냐, 헉은! 네 마력이 버틸 만하니까 하는 거지!
이한의 반응에 페르쿤트라는 다급하게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