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5화
마법사들이 다른 차원의 존재들에게서 힘을 빌리는 방법은 다양했다.
먼저 강제적인 방법이 있었다.
다른 차원의 존재를 제압한 뒤 도망가지 못하게 굴복시키는 것이다.
제압하고 굴복시킬 능력만 있다면 가장 간단하고 깔끔한 방법이었다. 모 마법학교의 영주나 모 가문의 가주가 이런 방법을 즐겨 썼다.
그 다음은 속임수가 있었다.
다른 차원의 존재와 계약하되 그 계약에 온갖 복잡한 속임수를 넣어 마법사의 이득을 챙기는 방법이었다.
이런 방법은 악마처럼 탐욕스럽고 사람을 노리는 존재들에게 잘 통했다.
결국 욕심을 내면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악마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만큼 마법사에게 속아 넘어간 악마들도 많았다.
마지막으로는 계약이 있었다.
다른 차원의 존재와 친분과 우애를 쌓아가며 서로 도와주는 관계.
보통 정령처럼 사람들에게 우호적이고 온화한 존재들에게 자주 보이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디레트는 마지막 방식으로 악마의 마력을 사용한 유사영구기관 연구를 시도하고 있었다.
“어, 그게 가능합니까?”
이한은 방금 놀랐던 것보다 더 놀랐다.
딱히 악마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악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존재였다.
워다나즈 가문이나 에인로가드에서 보이는 악마들이 친절하고 온순해보여도 그건 어디까지나 계약에 묶여 있어서지, 계약이 풀리는 순간 바로 이빨을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불가능하진 않아. 조금 난항을 겪고 있긴 한데...”
“내 생각에는 강제적으로 마력을 추출해내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은데.”
“...아, 저 사람 끌고 가라고 했잖아요!”
멀리서 유크벨티레가 조언하자 디레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 * *
이한이 교류회장을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그 후로도 세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회복이 오래 걸려서는 아니었다. 사실 회복 자체는 30분 정도 지나자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됐다.
그 이후로 2시간 30분은 교류회에 참가한 마법사들과 이야기하느라 지나갔다.
-저희 마탑은 극마고래 스퇴쿨 양식을 연구하고 있는데 혹시 관심이 있으십니까?
-저는 바다 생물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하. 그 미친 마력... 아니, 그 막대한 마력만 있으셔도 충분합니다. 대환영입니다!
-......
-저희 길드는 제국의 정령숲과 그 영향력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꼭 워다나즈 님을 모시고 싶군요.
-저는 정령하고 사이가 별로 안 좋습니다만.
-우핫핫! 농담도 참! 그런 대정령의 힘을 빌리시는 분이 어떻게 정령과 사이가 안 좋단 말입니까?
-......
물론 대부분의 제안들은 이한을 슬프게 만들고 끝났다.
그나마 몇몇 솔깃한 제안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한은 나중에 에인로가드에 돌아가서 의뢰를 받을 때 참고하기 위해 열심히 메모했다.
-여기 마법사들의 제안은 무시하도록. 네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내 연구를...
-아니, 이 사람 왜 자꾸 빠져나오는 거예요? 빨리 끌어내요!
도중에 진상 선배가 끼어들어서 행패를 부리는 일도 있었지만 어쨌든 간신히 빠져나올 수는 있었다.
“지, 지친다...”
겨우겨우 이한을 데리고 나온 디레트는 피곤함이 가득 배어나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다른 마법사들에게 인기 많은 후배를 억지로 빼내오는 일은 처음 해보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흑마법 학파의 학생들은 어지간해서는 이런 관심과 거리가 먼 것이다.
이렇게 피곤할 줄이야!
“후배. 이쪽으로.”
“그, 저 이제 괜찮습니다만.”
“안 돼.”
디레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본인의 마력은 물론이고 치유 마법의 도움까지 받았다지만, 대정령과 일체화한 후유증은 가볍게 넘길 게 아니었다.
지금은 멀쩡해보여도 갑자기 리바운드가 돌아와 쓰러질 수도 있었다.
“단순히 마력이나 체력 문제가 아니라, 마법의 정보량도 마법사의 뇌에 데미지를 줄 수 있어. 대정령과 일체화했을 때 평소와 다른 마법을 느끼지 않았어?”
“!”
이한은 디레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페르쿤트라가 사용한 번개의 힘은 이제까지 이한이 썼던 번개 마법과 전혀 달랐다.
번개 원소를 다루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어느 경지까지 마법을 확장시킬 수 있는지까지.
그 강렬한 기억은 일체화가 풀린 지금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 마법을 억지로 수련하는 것도 위험한데, 그걸 뇌리에 강제로 집어넣는 건 더 위험해. 한동안은 조심할 필요가 있지.”
“그런데 배그렉 교수님은 수준에 맞지 않는 마법을 억지로 수련시키시던데요. 교장 선생님은 아예 뇌리에 강제로 집어넣기도 하고...”
후배의 질문에 디레트는 못 들은 척 했다.
“응?”
“배그렉 교수님하고 교장 선생님...”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한은 선배의 말꼬리를 잡는 대신 한동안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페르쿤트라가 보여준 마법은 준비가 될 때까지 떠올리지 않고 몸조심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건 좀 너무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
이한은 자신을 업은 디레트의 소환수, 상급 악귀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
“앗. 아무것도 아닙니다. 업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급 악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디레트가 그걸 보고 말했다.
“후배 네가 겉모습과 달리 친절한 성격이라 놀랐다는데.”
“그런 오해 자주 받습니다. 하여간 마력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존재들이란 참.”
이한은 분개하며 말했다. 디레트는 과연 마력 때문만일까 살짝 고민했다.
‘마력만 많다고 대정령하고 계약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보다 선배.”
“어, 어? 나 아무 생각도 안 했다?”
“예? 그게 아니라, 저기 길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싶어서요. 무슨 일입니까?”
“!”
후배의 말에 디레트는 시선을 던졌다가 깜짝 놀랐다.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아 어둠이 내려앉은 플라허 시의 거리.
그 거리 위로 마력등 불빛이 사람들의 형체를 어슴푸레하게 비추고 있었다.
딱 봐도 보통 숫자가 아니었다.
“큰일났다!”
“수상한 사람들입니까? 혹시 반마법주의자들?”
“...그렇게까지 수상한 사람들은 아니야! 저건 마법사들이야.”
“무슨 마법사들이요?”
“교류회 소문 들은 마법사들!”
플라허 시는 대도시인 만큼 마법사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교류회에 참가하지 않은 마법사들이 훨씬 더 많았다.
모든 마법사들이 교류회에 흥미를 가지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예외도 있는 법.
저택에 앉아 있던 마법사들도 벌떡 일어나게 할 만한 소문이 돌면 이렇게 마법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일이 생겼다.
“큭. 선배가 유크벨티레 선배님에게 한 방 먹이라고 하셔서 한 건데...”
“...이렇게까지 먹일 줄은 몰랐지! 그걸 누가 어떻게 예상하냐!”
디레트도 이건 정말 억울했다.
어느 교수도 그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뚫고 지나가면 안 됩니까?”
“그러기엔 숫자가 너무 많아. 말 한 마디씩만 주고받아도 몇 시간은 그냥 걸리겠어. 후배. 마법사로 오래 활동하려면 연구도 중요하지만...”
“연구지원비를 따내는 능력도 중요하단 거죠?”
“...아, 아니. 그거 말고.”
후배가 생각보다 너무 현실적인 대답을 하자 디레트는 당황했다.
디레트는 눈앞의 후배가 방학 동안 해골 교장에게 ‘관료격멸자’란 찬사를 받았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것도 중요하긴 한데, 내가 말하고 싶었던 교훈은 이상한 마법사와 어울리지 말라는 거였어.”
“아하.”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버두스 교수님이나 유크벨티레 선배님 같은 분들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 둘보다 더 이상한 사람들.”
디레트는 순간 맞다고 대답할 뻔했지만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에인로가드 학생이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마법사들 중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단순히 연구에 미친 마법사라면 차라리 나았다.
마법에 별 관심은 없지만 남들을 현혹시켜서 금화를 뜯어내려는 사기꾼, 마법을 이용해서 한탕을 노리는 범죄자, 마법사를 다른 길드나 마탑에 소개시켜주면서 거간비를 받으려는 흥정꾼...
마법의 길이 험난한 만큼 정말 진지하게 그 길을 걸으려는 마법사는 의외로 적었다.
때문에 진지하게 마법의 길을 걷는 마법사들은 수상쩍은 자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했다.
괜히 엮였다가는 스스로의 시간만 낭비하게 될 테니까!
“예전에 선배 중에 저런 식으로 인기 좋았던 선배가 한 명 있었어.”
“흑마법 학파에요?”
“아니. 다른 학파... 야. 지금 무슨 의미였어?”
“그냥 확인 차 물어본 겁니다.”
“여하튼 그 선배는 저런 사람들이 자주 찾아와서 제안을 하곤 했는데, 그 중에 솔깃한 게 있었던 것 같아. 제안을 받아들이고 뭔가 같이 하시더라고.”
“어떻게 됐습니까?”
“제국 신문에 에인로가드 출신 마법사가 마법으로 사기치다가 걸렸다고 올라왔지...”
디레트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픈 기억이었던 것이다.
그 때 해골 교장이 노발대발해서 학생들을 압수수색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저런.’
이한은 남의 일이 아닌 만큼 더더욱 집중해서 들었다. 자기 자신도 사업에 대한 꿈이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조심해야 한다.’
“교류회에 참가할 정도의 마법사라면 그나마 낫지, 저런 마법사들과 하나하나 다 어울릴 필요는 없어.”
“잠깐. 저기 유크벨티레 선배님 아니십니까?”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디레트는 이한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쳐다보았다.
유크벨티레가 호위들을 데리고 대로변에 서있었다.
“찾으면 내 연구를 설명하고 제안해라.”
“예. 알겠습니다.”
“여기 마법사들이 방해되는군. 매수할 수 있는 자들은 매수해버리도록.”
“......”
선배로서 후배를 위해 잡상인들을 해산시키지는 못할망정 매수해서 자기가 써먹으려고 하는 모습에 디레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딜 내놔도 부끄러운 자신의 친구였다.
“뒤로 돌아가자... 저쪽에 골목길 있어...”
“...기운 내십시오.”
“난 괜찮아...”
말은 그렇게 해도 오늘 디레트의 날개는 유난히 축 늘어진 느낌이었다.
* * *
-아니, 마법사들께서 한밤중에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시민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지금 사람을 찾으려는 것뿐...
“안 되겠다. 안에 들어가자.”
디레트는 생각보다 마법사 숫자가 많자 그냥 건물 안에 들어가는 걸 선택했다.
날이 밝으면 저들도 포기하고 흩어지리라.
“아는 곳이 있으십니까?”
“근처에 공방 있어.”
교류회장 자체가 플라허 시의 마법사 구역에 위치한 만큼 근처에는 길드나 마탑의 공방들이 여럿 있었다. 에인로가드의 학파에서 자체적으로 세운 공방도 마찬가지였다.
‘음?’
이한은 반색하다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흑마법 학파의 공방이 여기 있어도 되나 싶었던 것이다.
아무리 마법사 구역이라고 하지만 좀 더 외곽의, 묘지 가까운 으슥한 곳에 있어야 하지 않나?
“흑마법 학파의 공방 맞습니까?”
“연금술 학파.”
“아하.”
“...그래, 뭐. 흑마법 학파는 여기에 공방도 있으면 안 되겠지.”
“아닙니다. 선배. 왜 그러십니까. 시약 공급 때문에 위치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보다 연금술 학파의 공방인데 저희가 들어가도 됩니까?”
“난 연금술 학파 애들하고는 비교적 친한 편이야... 우레걸음 교수님한테 출입 허락도 받았었고. 그리고 안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디레트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철커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공방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는 각종 시약이 뒤섞인 자극적인 냄새가 났다.
-누구?
“...망했다.”
디레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한은 상급 악귀의 등에서 내려오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하필이면 나하고 안 친한 후배가 있어. 일렌딜이라고... 앗. 잠깐. 후배.”
뒤늦게 기억을 떠올린 디레트는 기대한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도 안 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