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8화
레이커 반은 난처했다.
맥러플린 가의 전속 호위기사단장으로서 사공자 도련님을 보필해야 하는 마당에…….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지켜만 봐야 한다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공자가 들어갔던 나무 구멍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30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마음 같아선 나도 따라 들어가고 싶지. 하지만…….’
다가갈수록 요동치는 마력의 파동이 발을 주저하게 만든다.
더 가까이 갔다간 단전에 있는 오러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잘못하면 단전의 그릇이 깨지고 영영 불구로 살아야 할지도.’
그러면 자신의 기사 인생은 끝이다.
다른 기사들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건 사공자 도련님의 안위에 문제가 생겨도 마찬가지지.’
만약 지크 도련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책임을 피하긴 힘드리라.
목숨을 바쳐 보호 대상을 지키는 게 호위 기사의 존재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더 다가갔다간 불구가 되고 만다.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몸이 된다고.’
불구가 되면 어차피 사공자를 구할 수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사공자가 무사히 나오길 지켜보는 일뿐.
안절부절못하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사공자를 보필하러 온 시종들과 다른 호위 기사들 또한 초조한 얼굴로 사공자가 들어간 나무 구멍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디 무사히 구멍 밖으로 나오길 바라며.
‘제발 안에서 아무 일도 없으시길…….’
출발 전, 목적지가 위험한 곳이라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도련님이 혼자서 저 구멍에 들어가실 줄도 몰랐고.
“도련님…….”
모두가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하듯 기다린 지 30분째.
구멍에서 별안간 그림자 하나가 쑥 튀어나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공자, 지크였다.
“도련님!”
“오래 기다렸어요?”
“어떻게 되신 거예요! 걱정했잖아요!”
“미안해요.”
“아니, 미안하실 것까지는…….”
당황하던 레이커는 다가온 지크의 몸을 살펴봤다.
다행히 어디 다친 구석은 없는 모양이다.
‘응?’
그런데 들어갈 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뭡니까, 도련님?”
“아, 이거요?”
목에 못 보던 목걸이 하나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안에서 주웠어요. 어때요? 멋지죠?”
“……네. 그렇네요.”
고급스럽게 생긴 게 비싸고 좋아 보이긴 한다만…….
‘뭔지도 모르는 물건을 아무거나 덥석 주워오시다니.’
거지나 할법한 행동이었지만 레이커는 속내를 입 밖으로 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냥 재물에 어느 정도 욕심이 있다고 생각했지.
“어쨌거나 다행입니다. 도련님이 무사하셔서.”
그런데 도련님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죠.”
“예?”
며칠은 더 머물 줄 알았건만, 이제 공작가로 돌아가자고?
“그, 볼일은 끝나신 겁니까?”
“네, 끝났어요.”
“설마!”
레이커가 흥분한 어조로 소리쳤다.
“이제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겁니까?”
“아뇨.”
기대와는 다른 대답에 당사자보다 레이커가 더 실망했다.
“아무런 성과도 없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도련님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전혀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다.
‘어째서 실망하지 않으신 거지? 분명 이번 여정에 많은 기대를 걸고 계셨을 텐데?’
낙담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한 반응이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지 눈빛에는 열의마저 엿보였다.
굴하지 않는 그 모습에 레이커는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재능은 없어도 맥러플린 가의 사공자라 이건가?’
12살 답지 않은 기개에, 레이커가 빙긋 미소 지었다.
노력하는 자세만큼은 썩 마음에 드는 도련님이었다.
* * *
지크는 올라가던 입꼬리를 간신히 내려야 했다.
누가 보면 바보 같다고 흉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좋은 걸 어떡해. 이렇게 질 좋은 노예를 얻었는데.’
지크는 고개를 내려 목걸이를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남들의 눈엔 그저 고급스러운 목걸이로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아니었다.
이 안에 드래곤의 영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거다.
-이, 인간 녀석.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냐! 표정이 음흉하도다!
‘그야 보물창고의 물건들은 이제 내 차지가 됐으니까.’
-무슨 소리냐! 그 물건들은 내가 필사적으로 모은…….
‘이제는 내 물건이지. 발견한 사람이 임자 아니겠어? 몸도 없는 네가 쓸 일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네가 가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내가 허락지 않는다!
‘몸뚱이도 없는 영혼의 허락 따윈 필요 없거든요? 흐흐.’
-이익……!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다.
애당초 마력석이 없으면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게다가.
[마력을 107 흡수하였습니다.]
[마력을 102 흡수하였습니다.]
[마력을 108 흡수하였습니다.]
목걸이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주기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마력석이 없는데도 마력이 나오는 걸 보면 영혼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모양.
이러면 드래곤의 유적을 벗어나도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
‘어떻게 영혼에서 이만한 마력이 나오는 거야?’
-흥! 그만큼 이 몸이 대단하다는 뜻 아니겠느냐!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날 제자리에 놓아…….
‘아니, 그럴 수 없지. 아까 한 말 잊었어? 너 내 마법 셔틀 하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난 동의한 적 없다!
펄쩍 뛰듯 소리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싫은가 보다.
‘싫어? 그럼 아까처럼 다른 물건으로 몸을 옮겨서 도망가면 되잖아.’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 생각을 안 해봤을까! 그게 가능했다면 진즉에 했으리라!
‘왜 못해? 설마 내가 마력을 흡수해서 그래?’
-…….
찍었는데 정답이었나 보다.
‘호오, 이거 널 붙잡아두려면 계속해서 마력을 흡수하고 있어야겠는걸?’
-나한테서 얻을 게 뭐 있다고 이러느냐. 날 그만 놓아주거라.
‘그럴 순 없지.’
자신을 죽이려던 발칙한 용을 이대로 놓아줄 내가 아니다.
‘넌 이제부터 내 마법 셔틀인걸?’
-미쳤느냐 인간! 뭔진 몰라도 너에게 협조할 생각은 없다!
‘너 또 정신 붕괴 당하고 싶어?’
-…….
‘아까와 같은 자극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만 해. 또 써줄 테니까.’
-사, 사양하마.
사실 이미 써버린 정신 붕괴를 다시 쓸 방법은 없다.
하지만 정신적 충격이 컸던 탓인지 드래곤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내 거짓말을 믿었다.
그리고 웃기게도 녀석은 자신을 ‘신의 후예’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놈이 시전했던 정신 붕괴를 막아낸 것으로 모자라 역으로 똑같은 술식의 마법을 되돌려줬다.
가슴에 서클도 없는 인간이.
게다가 마력을 흡수하며 놈이 도망가지 못하게 차단하고 있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살아생전 무서울 것이 없던 이 몸이 신의 후예에게 농락당하는 처지가 되다니. 이건 말이 안 된다. 말이…….
‘그만 중얼거리고 아까 하던 얘기마저 해야지? 마법 셔틀, 해줄 거지?’
-마법 셔틀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가?
‘별거 없어. 내가 원할 때 아까처럼 나한테 마법을 쏴주면 돼.’
-내가 마법을 쓰려면 물질계와의 연결에 촉매 역할을 할 마력석이 필요하다. 그리고 본좌의 마력도 있어야 하지. 지금처럼 내 마력을 빨아들이면 아무것도 못 한다.
‘물론, 마법을 쓸 때가 되면 흡수는 풀어줄 거야. 그리고 마력석도 구해다 주지.’
-그, 그렇다면 마법을 쓰는 건 어렵지 않다.
‘오케이. 해준다는 걸로 알겠어.’
-…….
침묵을 지키는 걸 보니 안 하겠다는 말은 안 한다.
‘아니, 못하는 건가?’
녀석의 입장에선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잘못했다간 또 정신 붕괴의 고통을 입을지 모르니.
‘나로선 마법 셔틀이 생겨서 좋지, 뭐.’
-응? 뭐라고 했느냐?
‘아니야. 아무것도.’
어째서인지 녀석은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룬어, 또는 공용어로 된 생각만 읽는다.
지금처럼 한국어로 생각하면 전혀 못 알아듣는다.
목걸이를 몸에서 떼어내도 읽지 못하는 듯했고.
이 점이 지크로선 약간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녀석을 데리고 있을 필요는 있었다.
3차 각성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선 마법을 쓸 줄 아는 노예가 필요하기 때문.
1, 2차 스킬까지는 마력 흡수만으로도 숙련도가 올랐지만 3차 스킬부턴 아니었다.
마법 흡수라는 스킬명처럼 마법을 흡수해야 숙련도가 오르는 상황.
그러니 마법사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 대상이 마법의 종주라는 드래곤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고.
‘그나저나 영혼 주제에 내 얼굴은 어떻게 보는 거야? 신기하네.’
-영혼이니까 가능한 것이니라.
‘영혼이니까?’
-나한텐 모든 시야가 보이느니라.
‘그래봤자 기물에 처박혀 있는 신세잖아.’
-그, 그건…… 다 이유가 있느니라!
‘무슨 이윤데?’
-신의 후예한테 말해줄 이유는 없느니라!
‘그래? 그럼 신의 후예한테 정신 붕괴로 정신 개조 좀 당해볼래? 응?’
-크윽…….
자칭 드래곤이라는 목걸이의 영혼이 인간 하나에게 꼼짝 못 하고 있다.
대응할 방법도 없거니와 신의 후예라 믿고 있으니 무슨 협박을 해도 먹힌다.
‘쫄지 마. 그냥 물어본 거니까. 사실 이유 따윈 안 궁금해. 네가 왜 영혼 상태로 처박혀 있는지 알 게 뭐야? 내 마법 셔틀을 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로다.
‘그건 그렇고 널 데려가면 이 지대의 마력은 어떻게 되는 거야? 전부 사라지고 원래대로 돌아오나?’
-아니다. 이곳은 원래 드래곤의 브레스로 손상 입은 장소. 자체적인 마력의 기운은 남아 있다. 다만 전처럼 강렬한 파동을 내뿜진 못하겠지.
‘그럼 네 보물창고도 위험한 거 아니야? 다른 놈들이 와서 탐내면 어떡해?’
-그거라면 걱정할 거 없다. 내가 떠난다 해도 웬만한 인간은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의 마력 농도는 유지될 테니. 게다가 일반인은 절대로 열지 못하는 마력에 반응하는 석문이 있…… 었는데 부서졌구나. 누군가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버려서.
‘그러게 좀 튼튼하게 만들면 이렇게 잡히지도 않고 좋았잖아?’
-설마 그걸 오러도 없이 순수한 힘으로 미는 인간이 있을 줄은 나도 몰랐느니라.
지크도 몰랐다.
그게 힘으로 밀면 열릴 줄은.
그나저나 계속 드래곤이라 부를 순 없고 이름을 정해야 할 텐데.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본좌의 이름을 까먹다니! 불경한…….
‘확 목걸이를 팔아버리기 전에, 묻는 말에나 대답하지?’
-카, 카르볼레아로스다!
‘너무 길어. 이제부터 네 이름은 금룡이다.’
-무슨 뜻이냐?
‘골드 드래곤이라며. 그러니까 금룡이지.’
-뭐 그런 대충 지은 것 같은 이름을…….
‘불만이야? 불만 있으면 말해. 정신 붕괴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으니까.’
-크윽…….
‘그건 그렇고 안 말해줄 거야? 왜 영혼 상태로 처박혀 있었는지?’
-흥, 인간에게 사적인 일까지 말해줄 생각은 없다.
‘하긴,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지크가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준비됐으면 이제 가죠. 집으로.”
* * *
‘참으로 신기한 세계란 말이지. 과학은 발전하지 않았는데도 있을 건 다 있으니 말이야.’
통신구도 그렇고 마동차도 그렇고, 마나라는 게 여러 가지로 효용성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 세계는 마법이 보편화된 만큼 마법사가 오러 유저보다 강하다.
‘그와 반대로 오러 유저의 입지는 나날이 좁아지고 있다고 [마법과 오러의 역사]라는 책에서 읽었어.’
심장에 마나 고리를 만드는 마법사와 달리, 마나를 단전에 축적, 가공하여 육체적인 힘을 사용하는 존재를 오러 유저라 부른다.
그들이 다루는 힘인 오러는 마력의 또 다른 말로, 마법사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강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마법이 워낙 발달한 탓에 오러 마스터라 불리는 정점에 선 존재조차 9서클 마법사에겐 비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9서클 마법사 중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들을 12인의 선구자라 부르는 게 현 상황이었으니 말 다 했지.’
그렇기에 지크가 마법 명가에서 태어난 건 실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마법사를 최고로 치는 시대에 마법사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문제는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없다는 거지만.’
마력 흡수라는 스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재능 컨셉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지크에겐 재능이 있다.
다만 마력 흡수가 사용자의 마나까지도 흡수하기에 서클을 만들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오러라면 어떨까?
‘오러도 마력으로 치는 걸까? 단전에 오러를 쌓아서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시스템도 활용하고 오러 유저 같은 힘도 낼 수 있는 건 아닐까?’
서클은 만들 수 없지만 오러 유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쩌면 시스템의 힘을 활용하면서 오러까지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어떻게 배우냐는 건데…….’
지크의 눈빛이 말을 탄 채로 마동차를 호위하고 있는 기사단장에게로 향했다.
“레이커 경?”
창문을 내리고 말하자 단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예,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말동무 좀 해주시겠어요? 마동차에 혼자 타서 가려니 심심해서요.”
“아, 물론입니다.”
대답은 했지만 의외의 요구였는지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집에 도착하려면 앞으로 사나흘은 걸리겠죠?”
“예. 맞습니다. 왔던 길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아버지랑 왔을 땐 걱정 안 했는데, 안전할까요?”
“그럼요. 몬스터가 서식하지도 않고, 상행도 끊긴 길이라 도적 떼도 나오지 않을 겁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럼 편하게 가면 되겠네요. 그런데 레이커 경은 오러 유저죠?”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의 오러 유저예요?”
“저 말입니까? 오러 익스퍼트 상급 수준입니다.”
오러 유저의 경지는 오러 비기너, 오러 익스퍼트, 오러 마스터로 구분된다.
그 경지를 각자 상, 중, 하로 나누고.
‘오러 익스퍼트 상급이면 대략 6서클 수준이라는 거네.’
이 정도면 꽤 실력 있는 기사라고 책에서 읽었다.
“다른 기사들은요?”
“나머지는 익스퍼트 하급으로 기사단에서 최정예만 꾸려서 나왔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은 안 해요. 그냥 오러 유저에 관심 있어서 물어본 거예요.”
“하하, 그렇습니까?”
레이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법 명가 도련님의 관심이 썩 나쁘진 않은 모양.
‘어느 정도 물꼬를 텄으니 질러볼까?’
대화의 흐름을 탄 지크가 본론을 꺼냈다.
“레이커 경.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뭐든 말씀하십시오.”
“시간 나면 오러 쌓는 법 좀 가르쳐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