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10화
아버지와 안부의 말을 나누던 지크는 성과가 있냐는 물음에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러를 익힌 것에 대해서도, 드래곤에 대해서도 말할 필욘 없지. 괜히 말해봐야 제 살 깎아 먹기밖에 안 되니.’
어차피 대마법사라 하더라도 단전의 오러를 감지할 수는 없다.
이대로 침묵한다면 아무런 의심 없이 넘어갈 수 있으리라.
‘그런데 어째…….’
자신을 보는 아버지의 눈초리가 이상하다.
뭔가에 놀란 기색.
“왜 그러세요?”
“지크, 정말 드래곤의 유적에서 아무런 성과가 없었더냐?”
“네. 왜요?”
“……아니다. 고생했다. 얼른 들어가 쉬거라.”
심각한 얼굴로 돌아서는 아버지의 모습에 지크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왜 저러시지? 어디 편찮으신가?’
대답은 의외로 드래곤으로부터 나왔다.
-아무래도 저 인간이 내 용력을 느낀 모양이다.
‘뭐? 용력?’
지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뭔데? 자세히 말해봐.’
-나한텐 두 가지 기운이 있다. 하나는 너희가 흔히 말하는 마력이고, 또 하나는 내 영혼에서 흐르는 특별한 기운이지. 과거의 너희는 그걸 용력이라고 부르더군.
용력이라…….
그런 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마법 서고의 책이란 책은 전부 읽어봤던 지크조차.
‘내가 지금 빨아들이고 있는 마력과 별개로 용력이라는 기운을 따로 뿜어내고 있다고? 그걸 아버지가 느낀 거고?’
-그렇다. 보통의 인간은 용력을 느끼지 못하는데 저 인간은 마나 감응력이 뛰어난지 내 기운을 읽은 모양이군.
‘아…….’
이제야 알겠다.
아버지가 어째서 이상한 표정을 지었는지.
왜 별일 없었냐고 다시 한번 물었는지.
‘야, 금룡! 그런 건 진즉에 말해줬어야지! 용력이라니! 아버지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냐.’
-그게 나랑 뭔 상관이란 말이냐?
‘이 도마뱀 새끼가 진짜! 정신 붕괴 맛 좀 볼래?’
정신 붕괴의 기억이 남았는지 드래곤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따, 따지고 보면 네가 물어본 적도 없지 않느냐? 그리고 내가 너한테 개인적인 정보를 발설할 의무는 없다.
‘뭐?’
지크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목걸이를 내려다봤다.
반박하고 싶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놈이 들을 수 없게 한국어로 생각한 지크가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혔다.
마음 같아선 정신 붕괴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는 처지.
언제까지고 협박할 수만은 없다.
겁주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상대의 협조를 끌어내려면 꼭 강압적인 수단만 써야 하는 건 아니지.’
-아까부터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냐? 인간.
‘인간이 아니라 지크다.’
-뭐?
‘생각해 보니 내 소개를 안 한 거 같아서.’
물꼬를 튼 지크가 전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름은 카르볼레아로스지? 3천 년 전 인간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골드 드래곤.’
-흠흠, 기억하고 있구나.
‘이제부터 금룡이라 부르지 않고 네 이름을 제대로 부를게. 툭하면 정신 붕괴를 한다는 협박도 하지 않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것이냐?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생각해 보니 나도 잘한 게 없더라고. 네 보금자리를 무단으로 침범했잖아.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문이 쓰여 있었는데도 막무가내로 들어왔고. 나 같아도 열 받았을 거 같아.’
-흐음. 아주 생각이 없는 인간은 아니었구나.
먼저 상대의 처지를 이해해줘서인지 드래곤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뭘 훔쳐 간 것도 아닌데 냅다 정신 붕괴부터 쓰는 건 좀 너무했어. 물론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때의 나는 당황했느니라. 갑자기 나타난 인간이 내 영역을 침범했으니.
‘알아, 알아. 그런 의미에서 지난 일은 잊고 우리 화해하는 게 어때? 좋으나 싫으나 앞으로 함께해야 하는 처지잖아.’
-난 너와 함께할 이유가 없느니라.
‘이유가 왜 없어. 3천 년이나 안에 갇혀 있었는데 답답하지 않아?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내가 세상 구경을 시켜줄게. 그 대신 너도 내 부탁을 들어줘.’
-부탁?
갑작스러운 요구가 언짢은 목소리였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원하는 건 소통이야.’
-소통?
‘아까도 대마법사급 되는 존재가 접근하면 용력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서 아버지께 들켰잖아.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소통이 필요할 거 같아서.’
-크흠. 그래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거였나?
뭔가 거창한 요구를 할 줄 알았는지 김이 팍 샜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효과가 없지 않았다.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이 좋게 작용했는지 긍정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그런 거라면 좋다. 소통을 원한다면 들어주지.
‘좋아. 먼저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할게. 난 데칸 왕국 3대 마법 명가 중 하나인 맥러플린 가의 사공자, 지크 맥러플린이라고 해. 이제부터 잘 지내보자고.’
-알았다, 지크. 너도 본좌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도록 하거라. 금룡인가 뭔가 하는 하찮은 이름으로 부르지 말고.
‘알았어. 그런데 카르볼레아로스는 너무 길지 않아?’
-그럼 카르볼이라고 부르거라. 3천 년 전, 내가 인간의 모습으로 유희를 나섰을 적의 이름이니.
‘알았어, 카르볼.’
지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니 드래곤의 화가 금방 풀렸다.
예상대로 채찍보다는 당근이 더 효과적인 타입이었다.
‘그럼 카르볼. 3천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겠어? 네가 왜 영혼 상태로 있었는지도.’
-좋다. 어려울 거 없지.
이후 방으로 돌아간 지크는 카르볼과 긴 이야기를 나눴다.
* * *
‘방금 그 느낌은 분명 전에 느꼈던…….’
지크를 떠올린 제라드가 걸음걸이를 빨리했다.
그가 향한 곳은 자신만이 들어갈 수 있는 개인 서재.
수정 구슬에 마력 패턴을 입히자 서재의 문이 열린다.
-제라드 맥러플린. 확인되었습니다.
쿠그그긍.
서재에는 역대의 가주들이 모아놓은 책들이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서 색이 바래진 고대의 서적 또한.
‘분명 어릴 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여기 있군.’
[고대의 용에 관해서]라는 책을 살펴보던 제라드는 이내 한 페이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고대의 드래곤들은 내뿜는 마력도 무시무시하지만, 특유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그걸 가리켜 용력이라 불렀다.
‘용력이라…… 들어본 적 있어.’
-용력이 인체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선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두려움에 반응한 서클이 본능적으로 수축한다는 것이다.’
제라드는 조금 전 느낀 미증유의 힘을 떠올렸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최상위 포식자의 기운.
그 기운은 믿기지 않게도 막내아들 지크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확실히 느꼈다. 심장에 박힌 여덟 개의 고리가 살 떨리듯 움직이던 것을.’
그리고 그 떨림은 지크와 멀어지자마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설마 지크에게서 용력이?’
난생처음 12인의 선구자를 만났을 때도 이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제라드가 책의 페이지를 더 넘겨봤다.
-간혹 인간 중에서도 용력을 각성하는 자가 나타나곤 하는데, 그를 가리켜 세간에선 드래고니안이라 불렀다.
‘드래고니안. 용의 힘을 가진 불세출의 천재.’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의 후예라 여겨질 정도로 마법적 재능을 타고난, 천재 중의 천재.
그것이 드래고니안이었고, 세계를 뒤흔들만한 힘을 가진 존재라 불리는 것이 세간의 인식이었다.
‘내 아들이…… 드래고니안의 재능을?’
이제 보니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드래고니안은 고대의 룬문자를 읽는 재능만큼은 타고났으니.
‘드래곤의 유적에 감으로써 마나 친화력이 아니라 오히려 드래고니안의 재능이 개화된 건가?’
그래서 전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용력이 느껴졌던 거고?
‘지크…… 넌 정말 여러모로 날 놀랍게 하는구나.’
막내아들을 떠올리는 제라드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번뜩였다.
* * *
제라드가 개인 서재에 있는 그 시각.
지크는 카르볼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리치 때문에 스스로 영혼이 되었다는 거야?’
-그렇다. 너희가 부르는 그 유적지에는 우리 드래곤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드래곤의 적이라 불리는 리치가 있었지.
3천 년 전.
드래곤들은 리치와 전쟁을 벌였다.
리치는 스스로 언데드화가 된 마법사를 의미한다.
삶에 미련을 가진 마법사들이 목숨을 연장하는 수단으로 선택하는데, 지성을 잃는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카르볼이 말하는 리치는 인간이 아니었다.
‘드래곤도 리치가 될 수 있다고?’
-그렇다. 우리 드래곤이 다른 존재보다 훨씬 긴 세월을 산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긴 이승에 미련이 없었다면 너처럼 영혼 상태가 되어 생을 이어가진 않았겠지. 자기 물건에 손댔다고 정신 붕괴를 쓰려 하지도 않았을 테고.’
-크흠, 내가 좀 물건에 집착하는 편이긴 하다.
‘좀이 아니라 많이 집착하는 것 같은데?’
-…어쨌거나 수명이 다할 때 리치로 변해 생을 이어가려는 드래곤도 분명 존재한다. 우린 그들을 리치 드래곤이라 부르고.
‘그럼 내가 본 유적은 평범한 드래곤끼리 싸운 게 아니라 리치 드래곤과 싸운 현장이라는 거네?’
-맞다. 우리 드래곤들도 지성과 목숨을 맞바꾼 리치 드래곤들을 멸시한다. 당연히 대립할 수밖에 없지.
‘그래서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됐어? 너희가 결국 진 거야?’
-결과가 어찌 됐는진 나도 모른다. 도중에 위기를 느끼고 스스로 영혼을 지하 석실에 가뒀으니. 하지만 그때의 상황으로 보면 우리가 리치를 이길 순 없었을 거다.
‘그래서 석실에 그런 경고문을 걸어둔 거였나?’
리치 드래곤이라…….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다.
현재 드래곤들은 모두 멸종됐다고 알려지기도 했고.
‘여기서도 용과 얽히다니……. 어쩌면 전생의 용군단과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닐까?’
의문이 들었지만, 현재로선 상관없는 일이다.
리치든 뭐든 드래곤과 관계된 일이 아닌가?
당장 자신에게 중요한 건 카르볼의 협조를 얻는 것.
다행히 목표는 달성한 듯싶다.
‘역사 공부는 이제 됐고, 날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마법을 써달라는 것 말인가?
‘응. 내가 마력석을 구해줄 테니 전처럼 마법을 써줘.’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네 몸이 다칠 수도 있느니라.
‘안 다치니까 걱정하지 말고.’
-한 번 본 마법을 익힌다니. 그건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도 할 수 없는 일이니라.
‘그런데 난 할 수 있더라고.’
-믿을 수 없군. 정녕 신의 후예란 말인가?
‘신의 후예 같은 건 모르겠고 분명한 건 내가 마법 명가에서 태어났다는 거야.’
-과연 마법 명가의 자제라 이건가?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왜지?
‘내가 재능은 뛰어나도 몸에 서클을 만들 수 없는 처지거든.’
-너 정도면 서클을 만들 필요도 없다. 맨손으로 석실을 부수는 무력을 겸비하지 않았느냐.
‘그런 무력은 마법 명가에서 아무 의미 없어. 오직 서클의 수만이 재능의 척도가 되지.’
-한심한 인간들이구나. 강함은 서클만으로 규정지을 수 없거늘.
편들어줘서 고맙다만 이럴 시간이 없다.
당장 마법 흡수의 숙련도를 올리고 싶었다.
‘마력석을 구해줄 테니 얼른 시작해 보자고.’
그렇게 지크는 카르볼과 마법 흡수의 숙련도를 올리기 위한 수련에 나섰다.
그로부터 3년이 흘러, 마도 수련을 나갔던 일공자가 마탑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은 대망의 후계자 시험이 있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