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15화
“너는…….”
“안녕하십니까, 삼공자님.”
펑퍼짐한 로브에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알렉스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봤다.
얼마 전에 같은 복장을 한 남자와 만났었으니까.
‘흑색의 로브라면…… 검은 달?’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방 안까지 직접 찾아올 줄이야.
개념 없는 행동에 알렉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왜 찾아왔지? 통신구로 연락을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통신구를 잃어버려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찾아오면 어떡해? 누가 보면 수상하게 여길 게 아니냐?”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제가 여기 온 것은 쥐새끼도 모를 겁니다.”
검은 달은 마법사로 이루어진 암살조직.
인비저빌리티를 쓸 수 있다지만 떨떠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뭔데?”
“청부하신 암살 결과에 대해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참 빨리도 보고하네. 그 얘긴 이미 들었어. 피터는 살아 있고 지크는 죽었잖아.”
“……알고 계셨군요.”
“데칸에서 알아주는 암살조직이라 들었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당연히 없어야지. 내 피 같은 돈이 날아갔는데! 이제 어떡할 거야?”
“저희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마무리 지어도 잔금은 없을 줄 알아. 동선까지 알려줬는데도 실패한 건 너희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지?”
로브를 쓴 사내가 갑자기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너, 넌!”
얼굴을 본 알렉스가 귀신이라도 본 듯 놀랐다.
옆에 있던 달튼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왜 저를 죽이려는 겁니까?”
“…지크!”
암살자인 줄 알았던 남자는 다름 아닌 지크였다.
“네, 네가 여긴 왜……!”
“말씀해 보십시오. 셋째 형님. 절 죽이려는 이유가 뭔지.”
어지간히도 당황했는지 알렉스의 입이 금붕어처럼 뻐끔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구나.”
시치미를 떼니 지크가 조소를 흘렸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불쾌한 미소.
그 순간 지크가 로브 주머니에서 작은 막대기 하나를 꺼냈다.
마력석으로 가동되는 녹음기였다.
“시치미 뗄 생각은 마십시오. 방금 한 말이 여기 고스란히 녹음되어 있으니.”
“…….”
“아니면 이걸 틀어줘야 기억하시겠습니까? 조금 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무, 무슨 소릴 들었는진 몰라도 오해다. 네가 지금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거야.”
“오해라니요. 암살단을 고용해 저와 첫째 형님, 호위 기사, 시종들을 모조리 죽이려 해놓고.”
“글쎄, 난 그런 적 없다니까? 내가 왜 널 죽이려 하겠느냐?”
“그거야 형님이 알지, 제가 알겠습니까?”
“뭔 소린지 영.”
알렉스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 계속 시치미를 떼면 녀석도 별수 없을 거야.’
녹음기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오해라고 둘러대면 어찌어찌 넘어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알렉스는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흐음. 계속 모른 척하시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들고 있는 통신구 좀 주시겠습니까?”
“뭐? 이, 이걸 왜?”
“아버지에게 드리려고요. 거기로 연락해서 누구와 연결이 되는지 확인하면 알겠지요. 마력 신호를 역추적해서 위치도 파악할 수 있겠고.”
“…….”
“어서 주시지요.”
‘미쳤냐? 이걸 주게?’
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암살단에서 받은 이 통신구를 아버지가 조사한다면 필시 검은 달과 연결되리라.
만에 하나 검은 달이 발을 빼고자 자신이 청부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난 끝이야. 파멸이라고.’
아버지의 분노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다.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둘 순 없다.
“동생아. 미안하지만 이건 줄 수 없다. 내 물건이거든. 그보다는 그 녹음기 좀 줘볼래?”
“싫습니다. 증거가 될 수 있는데 미쳤다고 이걸 드리겠습니까? 그것도 저를 죽이려던 사람한테?”
“넘겨짚지 말아라. 네가 오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아버지께 가지고 가야겠습니다. 이걸 증거로 제출하고 제가 당한 일과 여기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고할 겁니다. 형님이 저와 첫째 형님을 죽이려고 암살자를 고용했다고.”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서클도 없는 반푼이 주제에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어?’
열받았지만 알렉스는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우쳤다.
‘잠깐, 아버지에게 고한다는 말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잖아?’
기회를 본 알렉스가 확인차 물었다.
“설마 아버지께 아직 연락하지 않은 것이냐?”
“예. 형님의 짓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곧장 여기로 왔습니다만.”
순순히 말하는 지크의 순수함에 알렉스는 하마터면 웃음을 흘릴 뻔했다.
‘이 새끼, 이거 바보 아니야? 그런 중요한 정보를 순순히 말하다니. 아직 어려서 그런가?’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알렉스에겐 아직 기회가 있는 셈이다.
녀석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사태를 바로잡을 기회가.
‘일단 슬립 마법으로 재운 다음에 뒤처리해야겠어.’
판단을 내린 알렉스가 씁쓸한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손으로 동생을 죽여야 한다는 현실에.
“막내야. 네가 아직 어리긴 어린가 보구나. 현실 파악도 못 하고 있으니.”
“예?”
“그러니까 미련하게 마법 서고에 박혀서 허송세월하는 것이겠지. 재능이 개화되리란 허튼 기대나 품고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형님?”
“그러니까.”
알렉스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다음 생엔 억울하게 태어나지 말라고.”
언제 준비했는지 알렉스의 손아귀에서 마력이 형성됐다.
* * *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대놓고 살의를 보이는 알렉스의 모습에 지크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 범주에 있던 행동이니까.
솔직히 이렇게 하도록 도발한 것도 있고.
‘순순히 당할 순 없지.’
이미 손아귀의 마력을 감지하고 있던 지크는 즉시 마력 흡수 스킬로 대응했다.
“슬립(Sleep).”
시동어를 외운 알렉스는 손바닥을 뻗으며 웃음 지었다.
“일단 잠이나 자둬라. 네 시체는 알아서 잘 치워 주…… 마?”
바보 같은 소리를 낸 알렉스가 믿기지 않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손에 모였던 마력이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놀랄 만도 하리라.
“어, 어떻게 된 거야?”
귀신에라도 홀린 표정.
알렉스가 재차 마력을 모았다.
그러나.
[마력을 2 흡수하였습니다.]
[마력을 2 흡수하였습니다.]
[마력을 2 흡수하였습니다.]
모이는 족족 빨아들이자 알렉스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형님.”
“어?”
“뭐 하시는 겁니까? 설마 저한테 마법을 쓰시려던 겁니까?”
“왜, 왜 발현이 안 되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실망입니다. 솔직히 믿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확실해졌군요. 아버지께 보고해야겠습니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려 하자 알렉스가 곧장 달튼에게 지시를 내렸다.
미끼인 줄도 모른 채.
“달튼! 저 새끼 잡아!”
퍼억-
“크윽.”
달튼이 밀치자 일부러 넘어진 지크는 아픈 척 연기를 했다.
체력 스탯만 2,500이 넘는 마당인데 아플 리가 없었다.
자신의 위에 올라탄 것으로 제압했다고 여긴 달튼이 주인을 돌아봤다.
“삼공자님. 어떡할까요? 이 자리에서 죽일까요?”
“일단 기절시켜.”
“알겠습니다.”
“컥, 컥!”
달튼의 큼지막한 손이 지크의 목을 졸랐다.
오러로 몸을 보호한 탓에 아무런 압박도 받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숨 막히는 척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혀, 형니이이임… 살려…….”
그때였다.
벌컥-!
“이게 무슨 짓이냐!”
때마침 나타난 이공자 러셀의 등장에 달튼이 화들짝 손을 떼며 일어났다.
뒤이어 일공자인 피터까지 들어오자 멀찍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지크! 괜찮으냐?”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둘째 형님.’
지크가 눈빛으로 타박하는 줄도 모른 채 러셀은 동생을 죽이려던 달튼과 알렉스를 보며 소리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동생을 죽이려 하다니!”
“형님. 그게 아니라…….”
“설마 했는데 다 네가 꾸민 짓이었구나. 암살을 의뢰했단 말이 사실이었어!”
“예?”
순간 알렉스의 눈빛이 지크에게로 향했다.
은근슬쩍 미소 짓고 있는 지크를 보고서야 뒤늦게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이 지크의 연기에 속았다는 것을.
“너, 분명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그 말을 믿으셨습니까? 바보도 아니고.”
“이 새끼가……!”
“알렉스!”
들개처럼 달려들려던 알렉스가 움찔거렸다.
러셀이 흉흉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빌어먹을.’
지크는 몰라도 러셀은 4서클 마법사.
올해로 3서클이 된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게다가 그 뒤에는 6서클을 바라보는 피터까지 있다.
‘치사하게 형님들을 끌어들이다니.’
하지만 알렉스는 몰랐다.
지크가 그보다 더한 상대를 끌어들였음을.
저벅- 저벅-
방으로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마력의 기운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알.렉.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저릿한 음성에 알렉스는 사색이 되었다.
가주이자 8서클 대마법사인 제라드가 자신을 노려보며 걸어오고 있었기에.
* * *
3시간 전.
가문 밖에서 업무를 보던 제라드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다.
“뭐라고 했소? 지크가 어쨌다고?”
-흐흐흑, 어떡하면 좋아요. 우리 지크가 마수의 숲에…….
“데이나! 진정하고 제대로 말 좀 해보시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그게 말이에요, 피터가 돌아왔는데…….
데이나로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은 제라드가 통신을 끊었다.
‘지크가 죽었다니. 믿을 수 없다. 당장 가문으로 돌아가야겠어.’
하던 업무도 내팽개치고 부리나케 돌아온 그는 직접 피터로부터 모든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마수의 숲으로 들어간 것만 보았을 뿐, 시체까진 확인하지 못했다는 말이냐?”
“네, 아버지.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형으로서 동생을 지켜줬어야 했는데…….”
피터가 고개를 떨구며 혼신의 연기를 펼쳤지만, 제라드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얼마 전, 개인 서재에서 봤던 문구가 스치듯 떠올랐기에.
-몬스터는 본능적으로 최상위 포식자인 드래곤을 두려워한다. 그건 용력을 각성한 자도 마찬가지. 혹시나 몬스터를 토벌할 거라면 드래고니안은 데려가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몬스터들이 알아서 길을 터줄 테니까.
‘지크는 드래고니안의 재능이 있는 아이다. 마수의 숲에 들어갔다고 죽었다고 단정할 순 없어.’
몬스터들이 지크의 용력을 느꼈다면 알아서 길을 터줬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제라드의 머릿속에 희망을 심어줬다.
갑자기 외투를 챙겨 드는 아버지의 모습에 피터가 의문을 표했다.
“어디 가십니까?”
“마수의 숲으로 가봐야겠다. 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예?”
피터가 놀라며 아버지를 만류했다.
“사건이 벌어진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이미 죽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시신이라도 수습해야 하지 않겠느냐?”
“…….”
막내를 향한 아버지의 적극적인 모습은 피터의 질투심과 열등감만 불러일으켰다.
그런 줄도 모른 채 움직이려던 제라드는 이내 걸음을 멈춰야 했다.
방문이 열리며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찾아왔으니까.
“지, 지크!”
“아버지. 첫째 형님도 여기 계셨네요.”
지그시 노려보는 지크의 눈빛을 피터가 애써 외면했다.
혼자서만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으니 양심이 있다면 고개를 들지 못하리라.
“지크! 괜찮으냐?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보다시피 전 무사해요. 그보다 너무 소란 피우지 말아 주세요. 몰래 들어왔단 말이에요.”
“몰래 오다니? 왜 굳이?”
“이번 사건의 범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뭐라? 그 말은 범인이 누군지 안단 말이냐?”
“네. 제가 의심하는 사람은 셋째 형, 알렉스예요.”
“알렉스?”
제라드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알렉스가 형과 동생을 죽이려 했다니?
“그리 의심하는 이유는?”
“후계자 경쟁 때문이겠죠. 제가 1차 목표는 아니었을 거예요. 아마도 후보로 유력한 첫째 형님이 목표였고 저는 그다음이었겠죠. 셋째 형님은 저를 싫어하셨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알렉스가 아무리 동생을 싫어해도 암살단을 고용할 정도의 망나니는 아니지 않느냐?”
“저도 확신하는 것은 아니에요. 의심하는 단계일 뿐이지. 하지만 내부의 누군가가 고용한 암살단에 의해 저희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용의자는 알렉스 형님이 유력하고요.”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알렉스를 심문해 주길 바라는 것이냐?”
“아닙니다. 저는 아버지께 상황을 알리고 허락을 받고 싶었을 뿐이에요.”
“허락?”
“함정 수사를 펼치려 합니다. 암살자인 척 변장해 대화를 녹음해 보겠습니다. 증거를 녹취한다면 제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겠습니까?”
“너무 위험하다. 만약 알렉스가 범인이라면 네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
“그러면 제가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가 소란이 일어날 것 같으면 들어와 주세요. 첫째, 둘째 형님들이랑 같이요.”
“알았다. 내 그리하마.”
* * *
회상을 마친 제라드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설마 암살단을 고용한 게 알렉스의 짓이었다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아, 아버지.”
“암살단을 사주해 형제를 죽이려고 들어?”
모든 전황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마자 알렉스가 한 행동은 오리발이었다.
“오해예요! 저는 결코 그런 짓을……!”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 아버지.”
지크는 이때라는 듯 녹음기를 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