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19화
실험체로 써먹으면서 지크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리라.
그레고르가 그런 생각으로 웃는 것도 잠시.
통신구의 빛이 번뜩이자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마탑주인 자신조차 긴장하게 만드는 거물의 연락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발루두크 님.”
-크흘흘, 어쩐 일은. 작업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나 궁금해서 연락했지.
“걱정 마십시오. 준비는 거의 끝난 상태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이것도 조만간…….”
-문제라는 게 뭐지?
“별일 아닙니다. 맥러플린 가의 막내 공자를 실험체로 붙잡으려다 방해받았는데, 조만간 해결할 생각입니다.”
-꾸물거리지 말고 준비가 되는 즉시 실행에 옮기라고. 이 늙은이는 인내심이 없으니까 말이야. 아니면 내가 나서기를 바라는 겐가?
“아닙니다. 제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크흘흘, 그래야지. 네 가치를 증명하려면 속히 움직이는 게 좋을 게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반드시 증명해 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지만 그레고르는 한동안 통신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발루두크 님께서 연락하시다니……. 기다릴 틈은 없다. 최대한 빨리 진행하도록 한다.’
이윽고 그레고르가 다른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속칭 [사냥개]라 불리는 자신의 직속 암살단과 연결되는 통신구였다.
-예, 탑주님.
“갈프, 준비는 끝났느냐?”
-물론입니다. 전원 대기하고 있습니다.
“좋다. 조만간 다시 연락할 테니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이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레고르는 통신구가 들어 있는 서랍을 뒤적거렸다.
“여기 어딘가에 있었는데…… 아, 여기 있군.”
오래전, 제라드와 정보 교류를 목적으로 나눠 가졌던 통신구를 꺼내 든 그레고르가 매끄러운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마력이 남아 있는 게 쓸모는 있겠구나.”
톡톡 두들기며 제라드에게 연락하려던 찰나.
때마침 통신구가 빛을 발했다.
상대방 측에서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그레고르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 * *
“자, 원하는 대로 됐지? 네 말대로 마탑주님을 설득했다.”
“잘하셨습니다, 첫째 형님.”
지크가 빙긋 웃으며 형님 대접을 했지만, 피터의 기분은 좋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막냇동생에게 꼼짝없이 휘둘리는 처지라니.’
이상한 펜으로 맹약까지 맺은 터라 녀석의 부탁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녹음이라는 약점까지 잡혀 있는 상황.
‘말이 좋아야 부탁이지, 사실상 협박 아니야?’
조금 전, 지크는 피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마탑주를 설득해 마도 수련을 늦춰달라고.
맹약을 맺은 피터로선 그 말을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웃고 있는 지크의 얼굴이 그리도 얄미워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지크, 그런데 어떻게 서클도 없이 마법을 쓰는 거냐? 정말 어디서 몰래 사특한 술수를 배운 건…….”
“형님. 제가 웃어준다고 그렇게 선 넘는 질문을 하면 곤란합니다. 어디 가서 쓸데없이 떠벌려도 곤란하고요. 제 비밀을 발설하는 건 엄연히 배신하는 행위이니.”
“바, 발설할 리가 있느냐.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잊지 마십시오. 형님의 목숨줄은 저에게 있다는 것을.”
지크의 얼굴에서 더 이상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변화에 살짝 당황한 피터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과 마탑주의 관계가 아버지에게 알려지지만 않으면.
“그, 그럼 이거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요?”
“정말로 가주 자리엔 욕심이 없는 것이냐?”
“예. 그러니 형님은 가만히, 쥐 죽은 듯이 있으십시오. 그럼 가주 자리가 알아서 굴러들어올 것입니다. 뒤에서 괜히 수작질할 생각은 품지도 말고요.”
“내가 미쳤느냐? 배신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나다. 수작질이라니. 당치도 않아.”
“그럼 믿고 지켜보겠습니다. 마탑주에게서 무슨 연락이 오면 바로 알려주시고요. 하지만 소식이 왔는데도 감춘다면 저를 배신하는 행위가 되겠죠. 이해되십니까?”
“끄응, 알았다. 소식이 들리면 전해주지.”
“그럼 처신 잘하십시오.”
“그, 그래.”
마지못해 말한 피터가 돌아서는 지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 * *
탁-
방으로 돌아온 지크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계획대로 마도 수련을 취소시켰다.’
마음 같아선 자신을 실험체로 팔아넘기려던 마탑주와 피터까지.
모조리 응징해 주고 싶은 지크였지만 끝내 참았다.
‘내가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마탑주가 연관됐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비록 서클은 아버지와 같다 할지라도 왕국의 간판 역할을 하는 마탑의 대표 자리.
그런 자리의 우두머리가 마법 명가의 장남을 꼬드겨 마나의 서약을 걸었다?
게다가 그 가문의 막내는 인체실험으로 써먹으려고 시도했고?
나라가 발칵 뒤집힐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마탑주가 우리 가문을 노린다는 건 확실해. 옆에서 직접 통화하는 걸 들었으니.’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지.
왜 원수라도 진 것처럼 행동하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문의 일이니, 우선은 아버지께 알리는 게 급선무겠지.’
피터가 알면 기겁하겠지만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다.
마냥 덮어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야.’
자신을 팔아넘기려던 피터와의 약속을 지킨다?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일이다.
똑똑-
“아버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지크냐? 들어오거라.”
집무실의 문을 열자 때마침 제라드가 외투를 입고 있었다.
“안 그래도 너를 만나려던 참이었다.”
“저를요?”
“조금 전에 마탑주와 대화를 했는데 말이다, 마도 수련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구나. 좋은 소식이지 않느냐?”
“그렇군요.”
“음?”
기대와는 다른 반응에 제라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그리 심각한 것이냐? 기쁘지 않은 것이냐?”
“기쁩니다. 그런데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닌 것 같아서요.”
“왜? 무슨 일 있느냐?”
심각한 얼굴로 끄덕이자 제라드 또한 덩달아 심각해졌다.
“앉아서 이야기해 보거라. 무슨 일이 있는지.”
* * *
“……이렇게 됐습니다.”
“후우우.”
지끈거리는 머리에 제라드는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근래에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레고르, 그 개새끼가 내 자식에게 마나의 서약을 걸었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을 마도 수련이란 핑계로 불러들여 실험체로 써먹으려 했단다.
보통 같으면 믿지 않았을 허무맹랑한 이야기.
하지만 믿지 않기엔 증거가 명백했다.
이미 지크로부터 녹음을 전부 들었으니까.
“그 나비 브로치는 어디서 난 것이냐?”
“드래곤의 유적에서 주웠습니다.”
“예전에 기사단장이 보고 했던 게 그거였군.”
아무래도 레이커로부터 유적에서의 일을 전부 보고 받은 모양.
“그런데 그때 가져온 건 목걸이라고 기억하는데?”
“이것도 가지고 왔었죠.”
“이리 줘 보거라.”
브로치를 넘겨받은 제라드가 신기하다는 듯 만지작거렸다.
상대의 통신구를 도청할 수 있는 브로치라니.
“신기하긴 하지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쉬이 믿기가 어렵구나. 마탑주와 피터의 목소리가 확실한데도 말이다.”
“이럴 줄 알고 추가 증거를 확보해 놨습니다.”
지크가 또 다른 녹음기를 꺼냈다.
평범하게 생긴 막대 모양의 녹음기였지만 그 내용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왜 그러셨습니까? 형님. 저를 마탑에 팔아버릴 정도로 꼴 보기가 싫으셨습니까?
-하하, 완전히 당했구나. 이렇게 된 이상 숨길 것도 없겠지. 원하는 게 뭐냐? 내게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진 않았을 거 아니냐.
-저는 그저 제 편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안됐지만, 이거 어쩌나? 나는 이미 탑주님과 마나의 서약을 해놓은 상태인데.
-서약 내용은요?
-마탑주님을 배신하는 즉시 내 서클이 붕괴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충실한 심복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이건……!”
“저와 피터 형님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마탑주의 녹음을 틀어주면서 협박하니까 술술 이야기하더군요.”
추가 증거의 내용은 확실했다.
마법을 못 쓰게 해서 제압했다거나, 자신과 맹약을 맺었다는 것까진 밝히지 않았지만.
“하아아…….”
제라드가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근엄한 얼굴은 어느새 근심으로 가득했다.
“추가 증거까지 들어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구나.”
“그렇죠?”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피터를 내 손으로 내쳐야 하는 것은 물론 마탑주와 전쟁까지 불사해야 할 정도야.”
“하지만 정말로 그러실 건 아니시죠? 그래선 안 될 거예요.”
의외의 답을 들어서일까?
지그시 쳐다보던 제라드가 시험하듯 물었다.
“왜지?”
“피터 형님의 서클을 파괴하거나 내치게 되면 마탑주가 바로 알게 될 거예요. 정보통이 없진 않을 테니까요. 그럼 자신의 모략이 들켰다고 판단하고 무슨 악독한 짓을 벌일지 몰라요. 그런 사람은 생각이 극단적으로 흐르기 마련이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밝힐 땐 밝히더라도 상대에 대한 대책을 갖춘 상태여야 할 거예요. 제가 정보를 공개한 것도 그러라는 의미에서 미리 알려드리는 거고요.”
“이쪽에서 정보를 갖고 있다는 우위를 이용해서 마탑주에 대항하자, 이런 소리냐?”
“네. 당하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거침없는 아들의 말에 제라드는 내심 놀랐다.
자신의 생각도 아들과 같았으니까.
‘시험 삼아 물어봤는데 어쩜 이리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낳은 자식이라 그런지 판단력이 수준급이었다.
제라드로선 도저히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허허, 집에만 있길래 순둥이인 줄 알았더니 의외의 면도 있었구나. 좋다. 네 말대로 이 정보를 오픈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마. 마탑주가 정말로 적인지 확인도 해봐야 하니.”
“감사합니다. 제가 더 도울 건 없을까요?”
“아니다. 이미 충분한 도움이 되었다. 고생 많았구나. 이제 나머지 일은 나한테 맡기고 너는 그저 지켜보고 있거라.”
“네.”
“그리고 이 브로치 말인데…….”
제라드가 들고 있던 나비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잠깐 빌려줄 수 있겠느냐? 들려줄 사람이 있어서 말이다.”
* * *
데칸에는 3대 마법 명가가 있다.
비그스란드, 맥러플린, 그리고 판테인.
앞서 두 가문은 사제 간이기에 사이가 좋았지만, 판테인은 아니었다.
마탑주인 그레고르 판테인이 과거 달프레드 비그스란드의 제자였다지만 어디까지나 옛날이야기.
지금은 사이가 틀어져 반목하고 있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아래 서열의 가문과 혼약을 맺는다는 것 또한.
이런 상황이었으니 맥러플린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루나 맥러플린이 서열 4위인 발도르 가의 약혼남과 함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테오. 이제 어떡해요?”
“뭘 말이오?”
“요즘 들어 막내가 첫째 오라버니와 접촉하는 일이 잦아졌어요. 그게 뭘 뜻하는 거겠어요?”
약혼녀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테오 발도르가 입을 열었다.
“벌써부터 줄을 타려는 수작이군.”
“그래요. 지크 그 영악한 녀석이 후계자 시험에서 이길 자신이 없자 피터 오라버니한테 달라붙고 있어요. 이러다간 저희의 입지도 좁아질지 모른다고요.”
“걱정하지 마시오. 일공자가 생각이 있다면 그런 장애인 같은 놈을 진지하게 받아주겠소? 그냥 장단 맞추며 놀아주는 거겠지.”
“그렇다고 이대로 보기만 할 순 없잖아요. 우리도 뭔가 손을 써야죠.”
“쉿, 조용히 있으시오.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는데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소.”
테오가 말하는 불미스러운 일이란 알렉스 사건을 뜻했다.
암살단을 동원했다가 서클이 폐하여 쫓겨났다는 소문은 변방의 시골까지 퍼진 지 오래.
그 때문에 맥러플린 가문의 위상이 떨어지긴 했으나 그것이 뒷공작을 벌여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가만히 있어야 하오. 괜히 나섰다가 우리한테도 불똥이 튀면 어쩐단 말이오?”
“하지만 거슬리잖아요.”
“막내가 어지간히도 싫은가 보군.”
“몰라요.”
부정하진 않는지 루나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있어서 지크는 그리 반가운 존재가 아니다.
막내라고 귀염받던 자리가 지크 때문에 밀려나 버렸으니.
‘나도 똑같이 녀석을 밀어내고 싶을 뿐이라고요.’
다행인 점은 서클도 만들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태어났다는 점.
가만히만 있어도 알아서 도태되리라.
‘굳이 지크를 견제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꼴 보기 싫은 걸 어떡해?’
뚱해 있는 루나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던 걸까?
잠시 생각하던 테오가 슬그머니 의견을 내비쳤다.
“이러면 어떻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