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22화
“이게 무엇이냐?”
“녹음기입니다.”
대답을 들은 달프레드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녹음기라기엔 브로치에서 어떠한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구동되는 방식이길래 마력이 느껴지지 않지?”
“그것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보다 이걸 왜 나한테 내미는 것이냐?”
“일단 나비 몸통 버튼을 눌러보십시오. 녹음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달프레드는 제자가 시키는 대로 버튼을 눌러봤다.
“……!”
이윽고 흘러나온 음성에 달프레드의 눈자위가 커졌다.
자글자글한 이마의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이, 이건 마탑주의 목소리가 아니더냐?”
“맞습니다. 마탑주와 제 아들 피터의 통신을 도청한 것입니다.”
“도청? 어떻게?”
“등록된 마력 패턴으로 대상의 통신을 엿들을 수 있게 만드는 원리입니다.”
“허…… 이런 걸 어디서 구한 것이냐?”
“제 아들 지크가 드래곤의 유적에서 주워왔다고 하더군요.”
“막내가?”
제자의 막내아들이 재능을 개화하기 위해 드래곤의 유적에 갔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문제는 거기서 가져온 물건이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거지만.
‘아니, 물건이 문제가 아니다. 내용이 문제야.’
마탑주인 그레고르가 피터를 수족으로 부리는 것도 모자라 지크까지 죽이려 하다니.
그것도 실험체로 이용해서?
‘그 말은 생체실험을 진행 중이라는 말이 아닌가?’
당연하지만 마법사들 사이에서 생체실험은 금기시되어 있다.
반인륜적인 범죄이기에 대외적으로 드러나면 온갖 비난을 받을 게 뻔했으니.
떨리는 동공으로 브로치를 보던 달프레드가 이내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이 녹음, 또 누구에게 들려줬느냐?”
“스승님 말고는 없습니다.”
“그럼 너와 나, 지크. 이렇게 셋만 알고 있는 게로군.”
“그렇습니다. 피터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전에 스승님께 조언을 구하고 싶었으니까요.”
“잘했다. 나한테 가져온 건 아주 잘한 일이야. 이건 잘못하면 전쟁의 불씨가 될 수도 있으니.”
“전쟁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제라드의 눈빛은 어느새 서늘해져 있었다.
“제 아들을 노린 이상 살려둘 수 없죠. 그레고르 그 새끼는 제가 반드시 잡아서 죽일 겁니다.”
“이해한다. 이해해.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지금은 섣불리 움직일 때가 아니다. 적어도 증거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해.”
달프레드의 말에 제라드가 분노를 가라앉혔다.
자신도 막무가내로 마탑주를 공격할 생각은 없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내가 한번 마탑주를 만나보도록 하마.”
“안 그래도 여기 오기 전에 마탑주와 약속을 잡아놓은 상태입니다.”
“약속을?”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오늘 밤 만나자더군요.”
“그거 잘 됐구나. 그 약속엔 내가 대신 나가마. 사이가 안 좋은 너보다는 내가 가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 녀석은 내 제자이기도 했으니.”
“만나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은근슬쩍 이야기를 나눠봐야지.”
“으음.”
마탑주인 그레고르는 과거 달프레드의 제자.
예전에야 함께 가르침을 받던 사형지간이지만 지금은 반목하는 처지다.
‘그레고르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스승님에게는 함부로 대하진 못하겠지. 서클의 성취도 더 높으니.’
확실히 자신보단 스승이 이야기하는 게 효과가 더 좋으리라.
“알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승님.”
“그래. 그리고 이 물건은 내가 가져가도 되겠지? 혹시나 녹음기를 활용할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제라드는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프레드는 그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
“예. 그러십시오.”
“이건 어떻게 쓰는 거냐?”
“여기 있는 버튼을 눌러서…….”
사용법을 들은 달프레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쓰는 거로군. 알겠다. 밤이 늦었으니 너는 이만 돌아가 보거라.”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끄덕인 달프레드가 이내 녹음기를 들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 * *
“아아! 짜증 나, 짜증 나, 짜증 나!”
테오는 한동안 히스테릭하게 소리치는 루나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어떻게 신경 안 써요? 지크 그 애송이가 절 보고 비웃었는데!”
‘애송이는 아닌 거 같다만…….’
너무도 처참하게 깨졌기에 애송이란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테오로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쨌거나 승부에서 진 건 사실이었으니까.
“당신은 분하지도 않아요?”
“분하지.”
“그런데 왜 이렇게 차분하신 거예요?”
‘그냥…… 현실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당시에는 자신도 분을 참지 못해 두고 보자며 큰소리치던 테오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성을 차리고 나니 보이지 않던 게 보였다.
‘내가 그토록 발악했는데도 단 한 번도 검을 맞추지 못했다. 그 말은 녀석과의 격차가 아득하다는 소리지.’
자신을 가지고 놀듯이 쉽게 제압하던 지크를 떠올리자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몇 번을 도전해도 같은 결과만 반복되리란 것을.
‘젠장. 몰래 마법을 썼는데도 밀리다니. 어떻게 되어 먹은 녀석이야?’
마음 같아선 자신 있는 마법 대련으로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지만, 비 마법사를 상대로 어디 가당키나 하겠는가?
승리를 챙겨도 주변에서 손가락질할 것이 뻔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나의 완벽한 패배야.’
하지만 자신과 달리 루나는 가망이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테오. 한 번 더 도전해 봐요.”
“으응? 하, 한 번 더?”
“유능한 검술 교관을 불러서 수련한 뒤에 복수해 주면 되잖아요.”
‘너는 대체 뭘 본 거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압도적으로 발리는 모습을 두 눈 뜨고 지켜봤으면서도 저런 소리를 해대다니.
약혼녀라지만 생각이 없어도 너무 없다.
“으음. 대, 대련보다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게 좋을 듯싶소.”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요?”
“그건 차차 생각해 봐야지…….”
“흥.”
기대와 다른 말에 루나의 고개가 실망스럽다는 듯 돌아갔다.
망신을 주려다 도리어 망신을 당하다니.
분해서 이대로는 잠 못 이룰 것 같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응? 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기로 가족들과도 입을 맞추지 않았소?”
“그럴 기분 아니니 그만 돌아가시라고요.”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싸늘한 축객령에 테오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루나. 이거 왜 이러는…….”
“제가 직접 발도르 가에 연락드려요?”
“아, 아니오. 내가 하리다…….”
귀를 늘어트린 강아지처럼 힘없이 고개를 돌린 테오가 통신구를 들었다.
“나다. 테오 발도르. 지금 당장 맥러플린 가로 사람을 보내거라.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통신을 끊고 나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테오는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자,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소.”
“그러든가 말든가요. 흥.”
테오는 남몰래 한숨을 쉬며 루나의 방을 빠져나왔다.
‘마음 풀어주려면 한동안 고생 좀 해야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복도를 거닐던 테오가 창밖을 내다봤다.
달빛이 어슴푸레 공작가를 밝히고 있다.
‘내 처지도 참으로 한심하구나. 5살 어린 약혼녀한테 잔소리를 듣질 않나, 처남 될 사람한테 망신이나 당하질 않나.’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이지만 어쩔 수 없다.
후계 서열에서 밀려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상위 가문과 혼약을 맺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는 것뿐.
‘맥러플린 가와 이어지면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루나를 꼬드겨보라는 아버지의 말에 흔쾌히 수락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가주인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되면 적어도 첫째 형이 날 무시하는 일은 없을 거야.’
루나의 성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같이 살을 맞대고 살다 보면 없던 정이라도 생기지 않겠는가?
‘그렇다 해도 내 신세가 너무도 처량하구나.’
휘영청 떠오른 달을 보며 잠깐의 신세 한탄을 하던 그때였다.
‘응? 저건?’
달빛 아래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다.
‘뭐지? 호위 기사들인가?’
궁금증은 곧 나타난 시녀를 통해 풀 수 있었다.
“공자님! 얼른 나가셔야 합니다! 암살자가 침입했습니다!”
“뭐? 암살자?”
“루나 공녀님을 데리고 얼른 여기서 빠져나가세요!”
“아, 알았다. 내 그리하지!”
시녀의 다급한 음성에 테오는 헐레벌떡 루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루나! 큰일 났소!”
“무슨 소란이에요?”
“암살자가 침입했다고 하오. 이럴 틈이 없소. 얼른 빠져나가야 하오!”
놀란 눈을 뜨던 루나는 이내 테오가 내민 손을 잡았다.
“가, 가요.”
복도에는 예의 그 시녀가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얼른 요!”
두 사람은 시녀의 안내에 따라 무작정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그것이 함정일 거라곤 누구도 예상하는 사람이 없었다.
* * *
짙은 어둠이 깔린 시각.
졸음을 느끼던 지크는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에 눈을 떠야 했다.
[돌발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퀘스트?’
15년을 환생한 몸으로 지내면서 지크는 단 한 번도 퀘스트를 받아본 적이 없다.
전생에서도 그런 것이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이상할 건 없었다.
애초에 강해지라는 퀘스트를 내렸던 시스템이지 않은가?
‘뭔지는 몰라도 봐야겠지?’
깜빡거리는 메시지를 손가락으로 터치하자 새로운 창이 열렸다.
【돌발 퀘스트 : 암살자 저지】
└평화로운 맥러플린 공작가에 암살자가 침범했습니다.
└암살자들을 제압하고 공작가를 지키십시오.
<조건>
└암살자 제압 0/6명
<보상>
└랜덤으로 스탯 300 증가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
‘뭐? 스탯 300 증가?’
현재 지크가 하루에 올릴 수 있는 스탯량은 10.
300이면 한 달 치를 앞당길 수 있다.
‘이건 무조건 수락해야지. 어차피 실패했을 때의 페널티도 없는 것 같으니까.’
무엇보다 암살자가 집에 침입했다는데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다.
환생했다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곳은 자신의 보금자리였으니까.
‘빨리 움직여야겠어. 가족들이 위험할지도 몰라.’
퀘스트를 수락한 지크가 방에서 빠져나왔다.
-지크. 갑자기 어딜 가는 것이냐?
‘암살자가 집안에 들어왔어.’
-암살자? 그걸 어떻게 아는 것이냐?
카르볼이 물었지만 대답할 새는 없었다.
당장은 암살자를 찾는 게 더 시급했으니까.
‘그런데 놈들을 어떻게 찾지? 가족들에게 먼저 가볼까?’
암살자가 노리는 대상이 누구인진 몰라도 가족일 가능성이 컸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8서클인 아버지를 노릴 린 없을 테고, 어머니나 형제들을 노리러 온 건가?’
일단은 여기서 가까운 형제들의 방부터 들어가 봐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복도를 뛰어다니는 그때였다.
[60m 지점에서 마력이 감지되었습니다.]
‘마력?’
-무슨 소리냐? 마력이라니?
카르볼이 물었지만, 지크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복도 저편에서 일련의 마력이 느껴진다.
‘저기에 누가 있어.’
-그야 시종들이나 호위 기사들 아니겠느냐?
‘아니야. 마력이 느껴지는 걸 보면 틀림없는 마법사야.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
이런 야심한 밤에 마법사 여러 명이 돌아다닌다?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찾던 암살자들이다.’
지크는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뛰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루나 누님? 테오 공자님?”
“지, 지크!”
두 사람이 암살자들에게 붙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