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25화
“미, 미안하다.”
‘뭐야? 설마 했는데 사과하려고 온 거였어?’
테오의 사과는 의외였지만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
혹시나 말 바꿀지도 모르기에 무심한 척을 연기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예요?”
“너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쓸데없는 치기였고 못난 열등감이었어. 미안하다.”
지크는 사과하는 테오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미안하다는 듯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게 연기 같진 않았다.
‘진심인가?’
루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듯 고개를 숙인 모습은 자신이 아는 루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흠, 내가 아는 루나 누님은 때려 죽어도 자존심 굽히는 연기를 할 사람이 아닌데…….’
아무래도 암살자에게 죽을 뻔한 일을 계기로 사람이 달라진 듯하다.
“지금 저 놀리려고 연기하는 건 아니죠?”
“여, 연기라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첫 만남 때와는 온도 차이가 너무 나니까 그러죠.”
“그, 그때는 뭘 몰랐을 때고, 지금은 알게 됐다.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누구와 함께 하는 게 인생에 더 이득일지.”
말하자면 뒤늦게 사람 보는 눈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사실 나는 가문 내에서 입지가 별로 좋지 않아. 아버지도 날 인정하지 않으시고 완전히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았지. 그래서인지 꽤나 방탕한 삶을 살았어. 불만도, 열등감도 컸고. 그게 너한테까지 이어진 모양이다. 그 점은 미안해.”
“꽤 솔직한 발언이네요.”
“크흠, 어, 어쨌거나 지난번 일은 내가 사과하마. 진심이야.”
“……나도 미안해.”
두 사람이 함께 자존심을 굽히자 지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보아하니 속이려는 건 아닌 것 같다.
“계속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만 하실 거예요?”
“아, 그렇지! 고맙다는 말을 잊었군.”
“우, 우릴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다면 그 암살자들한테 꼼짝없이 죽었을 거야.”
‘나보다는 시스템에 고마워해야 할걸요?’
당시에 지크는 암살자가 침입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시스템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두 사람을 구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말도 없이 가버린 건 왜 그런 거예요?”
“그, 그때는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혼란?”
지크가 고개를 갸웃하자 루나가 설명했다.
“실은 면목이 없어서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 거였어. 시비를 걸었던 사람의 도움을 받으니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서…….”
이제야 이해가 됐다.
두 사람이 왜 그렇게 서둘러 현장을 떠난 건지.
“그런 거였네요.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루나 누님.”
“아, 아니야. 우리가 고맙지.”
“그래서 말인데요, 그때 너무 빨리 가버리셔서 미처 해야 할 말을 못 했는데…….”
“알아, 알아! 그때의 일은 비밀로 하는 거.”
지크가 운을 띄우자 알고 있다는 듯 테오가 소리쳤다.
“네가 무슨 이유로 오러를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어디 가서 떠벌릴 생각은 없어.”
“응. 이제부터 우리는 지크, 네 편이라고 보면 돼.”
지크가 빤히 쳐다보자 당황한 건 오히려 루나와 테오였다.
“그,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어. 미, 믿어 달라고.”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 너는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지크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전생에서 폐급이라 불리던 F급인 자신이, 졸지에 생명의 은인으로 격상하다니.
‘가진 힘의 반의반도 안 썼는데 생명의 은인 소리를 들을 줄이야.’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사람을 구하는 건 이렇게나 뿌듯한 거구나.
힘을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구나.
그런 생각 때문인지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개과천선하셨다니 다행이네요.”
“개과…… 뭐?”
“그런 말이 있어요. 하여튼 이제는 잘 지내보자는 뜻이죠? 예비 매형? 루나 누님?”
“어어, 그렇지.”
“그렇다면 받아들일게요. 그리고 오러를 배운 건 말씀하셔도 상관없어요. 이미 암살자를 때려잡았다는 소문이 시종들에게까지 퍼진 상태인걸요?”
“그야 그렇지만 네가 어떻게 암살자를 잡았는지는 모르고 있잖아. 그 과정을 지켜본 건 우리뿐이었으니까.”
“우리는 그냥 맨손으로 네가 때렸다고만 말했어. 오러를 썼다는 이야긴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고.”
‘오러 안 썼는데.’
실제로 지크는 암살자들을 제압할 때 한 줌의 오러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순수한 스탯의 근력만 이용했을 뿐.
‘하긴 15살의 나이에 이런 힘을 가졌다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누구나 오러를 썼다고 여기겠지.’
게다가 테오와 루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특기는 오러가 아니라 마법을 쓰지 못하게 차단하는 마력 흡수라는 것을.
‘당시에 흡수 범위를 암살자들에게로 국한했으니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어쨌든 가장 중요한 정보는 들키지 않았다.
오러를 배웠다는 건 알려져도 마력 흡수는 들켜선 안 된다.
인간이란 존재는 상식 밖의 능력에 두려움을 가지기 마련이니까.
그때, 멀리서 하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지크 도련님.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지크가 테오와 루나를 바라봤다.
그들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예비 매형, 누님,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어어, 그래.”
지크가 궁금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똑똑-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자 중저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지크냐? 들어오거라.”
문을 열자 아버지가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금 서류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문이 닫히자마자, 아버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고맙구나.”
“예?”
의외의 말을 들은 지크는 한동안 제라드를 쳐다봤다.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걸까?
이유는 곧 밝혀졌다.
“네가 준 도청기 덕분에 진범을 알아낼 수 있었다.”
“진범이요?”
모르는 척 물었지만, 대답은 뻔했다.
“간밤의 습격은 마탑주, 그레고르의 짓이었다.”
여기까진 익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제라드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 12인의 선구자, 발루두크가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지.”
“발루두크?”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12인의 선구자에 대해선 들어봤다.
국적도 속성도 다른 대륙 최강의 9서클 마법사들이라고.
“발루두크는 어둠의 손이라 불리는 암속성 마법사로 위계 서열 2위에 속하는 거물이지.”
“저희 왕국 소속인가요?”
제라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이렇게 걱정할 일도 없지. 발루두크는 알비츠 왕국의 마법사니까.”
“알비츠 왕국이면 적대국 아니에요?”
제라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반역이군요?”
“그래. 우리 마탑주가 적국의 마법사와 내통하고 있었어. 게다가 금기인 생체실험까지 하고 있으니 보통 일이 아니지…….”
걱정스럽다는 듯 말끝을 흐린 제라드였지만 지크는 다른 부분에서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는 왜 암살자를 잡은 일을 캐묻지 않으시는 거지?’
마탑주가 적국과 내통하는 거야 그럴만한 인성이니 납득이 가지만, 아버지가 묻지 않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
“아버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든 물어보려무나.”
“제가 어떻게 암살자를 잡았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지만, 제라드는 의외로 침착했다.
“네가 어떻게 잡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암살자를 제압했다는 데 의의가 있지.”
‘내가 오러를 배웠는지 궁금하지 않으신 건가?’
마법에 소질 없는 사람이 오러로 진로를 바꾸는 일이야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마법 가문에서는 절대로 해선 안 될 불문율과도 같았다.
마법 가문에서 태어나놓고 오러 유저가 된다는 건 스스로 가문의 평판을 깎아 먹는 일.
자칫하면 가문의 수치라 불리며 평생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걸 알면서도 애써 묵살하고 계신단 말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치 판도라의 상자임을 알고 일부러 열어보지 않는달까?
‘모른 척하시는 건가? 하긴 그게 더 좋겠지. 소문나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렇기에 지크도 가능한 힘을 숨기려 한 것이다.
순수한 힘을 사용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눈엔 오러를 쓴 것처럼 보일 테니.
“지크.”
암살자에 관한 일은 더는 언급하기 싫다는 듯 제라드가 화제를 전환했다.
“내가 왜 정보를 공유하는지 알고 있느냐?”
“아니요.”
“이번 사건의 공로자인 너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공로자라니요?”
“처음에 피터가 마탑주와 한편이라는 정보를 가져온 것도 너였고, 네가 빌려준 이 브로치 덕분에 발루두크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이번 사건에 공헌한 사람을 말하라면 누가 뭐라 해도 지크, 네가 아니더냐. 그러니 당연히 세부 정보까지 알고 있어야지.”
“아…….”
왜 자신을 불렀나 했더니 정보 공유 차원에서 부른 것이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너도 소식을 들었겠지만, 궁정으로 피신해 있을 거란다. 그리고 국왕 전하께 모든 사실을 고발하고 도움을 청할 거다.”
“현실적인 방법이네요.”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국왕 전하를 알현할 때 너도 옆에 있었으면 한다.”
“예? 저도요?”
“이번 일의 일등 공신인데 빠질 수야 없지 않겠느냐.”
지크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나라를 이끄는 국가원수에게 얼굴도장을 찍을 기회인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저야 영광이죠.”
“알겠다. 그럼 방에서 짐을 챙기고 있거라. 준비가 끝나는 즉시 궁정으로 출발할 터이니.”
* * *
쉐인 2세는 여타 왕국 중 최장기로 집권 중인 데칸의 국왕이다.
머리가 새하얘진 지금까지도 왕좌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백성을 향한 인덕과 덕망.
평민, 귀족 등, 신분 불구하고 지지받는 국민의 사랑.
그것이 국가와 자신을 강하고 건강하게 만든 비결이라고, 쉐인은 생각했다.
제라드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뭐라? 마탑주가 반역?”
항상 인자함을 유지하던 쉐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표정에 대전에 있던 가신들이 다 놀랄 정도.
쉐인 국왕은 대뜸 찾아와서 놀랄 만한 소식을 전하는 제라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궁정에 가족들과 머물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반가웠느니라. 친우이자 우리 왕국 최고의 마법사인 달프레드의 제자가 바로 그대였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당황스러운 소식을 가져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송구합니다, 국왕 전하. 믿기지 않겠지만 제 말은 사실입니다.”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제라드를 보던 쉐인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많은 가신이 보고 있는 가운데 이런 폭탄 발언을 터트릴 줄이야.
잘못하면 자신의 손으로 제라드에게 죄를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반역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왕실의 이미지를 훼손시킨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대가 아무리 궁정 마법사단장으로서 내 신임을 얻었다곤 하나, 그렇다고 증거도 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어선 곤란하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요.”
“그걸 알면서도 이런 말을 꺼낸 걸 보면 증거가 있다는 말이렷다?”
“예.”
즉답한 제라드는 조심스레 품에서 나비 모양의 브로치를 꺼냈다.
“제 말을 믿어주실지 말지는 이 녹음을 듣고서 판단해 주십시오.”
“틀어 보거라.”
“예.”
잠시 후 침묵이 내려앉은 대전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울려 퍼졌다.
-그레고르? 무슨 일이더냐?
-발루두크 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
-사냥개와 연락이 안 됩니다. 제라드는 약속 장소에 나오지도 않았고요.
-눈치를 챈 게로구먼.
-예? 그럴 리가요.
-사냥개들은 이미 잡혔을 것이다. 네가 사주한 일임을 알아차렸겠지.
내용은 짧았지만, 파장은 강렬했다.
쉐인이 왕좌의 팔걸이를 부서트릴 듯 움켜쥘 정도였으니까.
“……이게 정말로 마탑주의 목소리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대화 상대는 알비츠 왕국의 발루두크 라흐베즈입니다. 12인의 선구자로 유명하죠.”
나라를 대표하는 데칸의 마탑주가 다른 왕국과 사적인 연락을 했다?
명백한 반역이었다.
“그레고르는 얼마 전 사냥개라는 자신의 암살조직을 이용해 저희 가문을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안 그래도 그 일은 들었다. 그런데 그게 마탑주의 짓이었단 말인가?”
“예. 그에 대한 증거도 녹취해 놓았습니다.”
제라드가 연이어 녹음을 틀자 대전이 술렁였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였다.
“대체 어떻게 녹음을 한 것이냐?”
“특정 대상의 마나 패턴을 등록한 뒤 원격으로 통신구를 도청하였습니다. 그걸 가능케 하는 물건이 이것이고요.”
“그런 귀한 물건을 어디서 구했지?”
“여기 있는 제 막내아들, 지크가 구했습니다.”
쉐인의 눈이 제라드의 옆에 있는 지크에게로 꽂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맥러플린 가문의 사공자, 지크 맥러플린입니다.”
예법에 따라 인사한 지크가 국왕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다른 곳에 있는지 눈길도 주지 않는다.
‘하긴 철석같이 믿었던 마탑주가 간첩으로 밝혀졌으니 충격받을 만하지.’
증거가 명확했으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이거 국왕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레고르를 쉽게 잡을 수 있겠어.’
지크가 남몰래 미소 짓는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