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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26화 (26/112)

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26화

“전하! 넘어가선 아니 됩니다!”

난데없는 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소리친 사람은 국왕의 가신 중 한 명인 안토니오 발도르 공작.

테오의 아버지이자 발도르 가의 가주였다.

“안토니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국왕 전하. 맥러플린 공이 가져온 녹음은 신봉할 수 없습니다.”

“증거가 이리도 명백한데 신봉할 수 없다니?”

“애당초 통신구를 도청하는 기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세상이 발칵 뒤집혔을 겁니다.”

“없는 게 아니라 여기 있지 않소? 의심스러우면 직접 확인해 보면 되는 일 아니오?”

즉시 반박한 제라드였지만 안토니오는 만만치 않았다.

“공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녹음은 증거가 될 수 없소. 목소리가 같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법. 더구나 고도로 훈련된 암살자들은 상대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고도 들었소이다. 그럴지언대 녹음 따위가 무슨 증거가 될 수 있겠소이까?”

“목소리 흉내라니? 그런 게 가능하다는 말은 금시초문이거니와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무슨 목적으로 다른 사람 흉내를 낸단 말이오?”

“목적이야 활용하기에 따라 많지 않겠소? 다른 사람인 척해서 이득을 본다거나, 아니면 지금 맥러플린 공이 하는 것처럼 무고한 사람을 반역자로 몰아간다거나.”

“뭐라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린 제라드가 이내 쌍심지를 켰다.

“지금 내가 증거를 조작해서 마탑주를 모함하고 있다는 소리요?”

“그게 아니면 뭐겠소?”

“이보시오, 발도르 공!”

“흠흠.”

고함을 지르던 제라드는 순간 들린 국왕의 목소리 덕분에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자네 조금 흥분했군.”

“송구스럽습니다.”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제라드는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안토니오를 쏘아봤다.

테오의 아버지면 사돈지간이나 다름없는 사이.

그런데도 이렇게 방해하는 이유는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얼마 전에 있었던 습격 때문이겠지.’

맥러플린 가에 머물던 테오가 암살자의 습격으로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이미 발도르 가의 귀에 들어간 지 오래.

허술한 보안으로 한순간에 아들을 잃을 뻔했으니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이해는 된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중요한 상황에서 방해라니.’

유치하기 짝이 없었으나 안토니오의 주장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자신을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가?

궁정 마법사단장인데다 왕국 최고라 할 수 있는 달프레드의 유일한 제자이지 않은가?

‘스승님과 국왕 전하는 친우이니 내 말을 믿어주실 거다.’

그러나 쉐인 2세는 생각보다 더 신중한 사람이었다.

“나는 맥러플린 공이 누군가를 모함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발도르 공의 의견 또한 묵살할 수는 없다. 하여, 가신들과 의논을 통해 이번 일을 보다 신중하고 심도 있게 다루고자 한다.”

“아니, 여기 증거가 버젓이 있는데…….”

중얼거린 제라드는 확고한 의지를 보이는 국왕의 눈빛을 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라드 맥러플린 공. 다른 할 말이 있는가?”

“……아닙니다.”

“거처에 가서 결과를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국왕 전하.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덤덤한 척했지만, 제라드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반대표가 많으면 자신의 주장이 묵살될 거라는 걸 잘 알기에.

‘빌어먹을. 안토니오, 저놈 때문에…….’

씁쓸함을 감추며 어쩔 수 없이 물러나는 제라드와 지크였다.

* * *

“큭, 크흐흡.”

대전에서 나온 안토니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 전 급하게 치른 안건에 대한 회의 결과는 8대 11로 반대표가 더 많았다.

즉, 제라드의 의견이 묵살된 것이다.

근거가 빈약하다는 판단하에.

‘후후후, 꼴 좋구나, 제라드. 그러게, 증거를 가져오려거든 좀 더 확실한 걸 가져왔어야지.’

암살자가 상대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들어본 적도 없고.

전부 자신이 즉석에서 지어낸 거짓부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효과는 탁월했다.

녹음의 증거는 명백했지만 현 국왕인 쉐인은 생각보다 더 신중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왕국에 반역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하는 머저리이기도 했고.’

그 사실을 옆에서 지켜봐서 알고 있던 안토니오는 세 치 혓바닥으로 제라드의 모함을 막을 수 있었다.

‘아니, 모함이 아니라 사실이긴 하지.’

안토니오는 사실 그레고르가 발루두크와 내통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야 자신은 그레고르의 충직한 수하였으니까.

제라드를 막아선 것도 그레고르의 지시 때문이었다.

‘둘째 아들을 맥러플린 가문에 남겨 놓았던 것도 그레고르 님의 지시 때문이었지.’

암살자의 습격이 있던 날.

안토니오는 테오를 맥러플린 가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를 간접적으로 죽이려 했다.

맥러플린 가문을 비난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애당초 루나를 꼬시라고 테오에게 시킨 것도 자신이었다.

역으로 자신이 이용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지만.

그런데 계획과 달리 암살당하지 않은 테오였다.

‘신은 공평하구나. 그런 쓸모없는 자식에게도 운이란 게 작용하다니.’

아버지가 일부러 자식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

천벌을 받아 마땅한 악행이었지만 안토니오는 아무래도 좋았다.

‘난 이미 악마와 계약했으니.’

더구나 자신의 가문은 뛰어난 능력의 첫째만 있으면 그만이다.

재능도 성취도 평범한 둘째 아들이야 죽어도 상관없다.

마탑주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는 게 오히려 가문에 더 보탬이 되리라.

‘그나저나 신기하군. 곁에서 녹음하는 게 아니라 원격으로 통신구를 도청할 수 있는 녹음기라니.’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제라드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면 엄청난 파장이 예상된다.

통신구가 유용하게 쓰이는 판게아 대륙에서 정보를 얻기엔 그만한 물건이 없을 테니까.

‘이 사실을 빨리 그레고르 님에게 알려줘야겠어.’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으슥한 곳으로 이동한 안토니오가 통신구를 두드렸다.

마탑주와의 대화를 누군가가 도청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 * *

‘안토니오. 이놈이 내통자였구나!’

그레고르와의 통신을 듣던 제라드가 분개했다.

어쩐지 이상하리만치 자신을 막아선다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그레고르의 하수인이었다.

‘지크의 언급이 없었다면 이런 귀중한 정보를 놓칠 뻔했구나!’

사실 제라드는 안토니오가 그저 원한 때문에 자신을 막아선다고만 생각했다.

괜히 가문에 머물다가 둘째 아들인 테오를 잃을 뻔했으니까.

그러나 국왕과 알현한 직후.

지크의 이야기를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버지. 브로치의 사용법은 알고 계시죠?

-알고 있다만. 왜 그러느냐?

-가신들의 회의가 끝나면 아까 저희한테 이의를 제기했던 그 귀족을 따라가서 몰래 마력 패턴을 등록해 보세요.

-안토니오 발도르 말이냐? 그 사람은 왜?

-저희 의견에 반대하는 게 뭔가 꺼림칙해서요. 배후에 누군가 있을 수도 있어요.

-반대하는 거야 이공자인 테오 발도르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마터면 우리 때문에 자기 자식 얼굴을 못 볼 뻔했으니까.

-그런 것치고는 자식을 아끼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던걸요? 테오 공자님에게 들었을 때도 아버지의 인정을 못 받았다고 들었고.

-으음, 그렇다고 근거 없이 의심하기에는…….

-손해 보는 일도 아니잖아요. 회의가 끝나면 인비저빌리티를 쓰셔서 몰래 패턴 등록만 해놓으시면 돼요. 들킬 일은 없어요.

-알았다. 네가 정 꺼림칙하다면 그렇게 해보마.

아들과의 대화를 상기하던 제라드가 눈을 빛냈다.

‘지크의 말을 듣길 잘했어. 정말로 녀석의 뒤에 그레고르가 있었다니.’

진실을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새로 저장한 이 녹음을 증거로 국왕에게 제출한다면?

회의의 결과를 뒤집을 수 있으리라.

결연한 표정을 지은 제라드가 브로치를 꽉 쥐고서 알현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다행이야. 아버지가 내 말을 따라줘서.’

사실 지크가 안토니오를 의심하게 된 계기는 별것 아니었다.

그저 녹음기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도 반박하는 꼬락서니가 심히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제정신이라면 그 녹음을 듣고서 어떻게 이의제기를 할 수 있겠어? 그레고르와 한패가 아닌 이상에야.’

그러다가 뒤늦게 테오의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았다던 테오와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에.

그리고 제라드의 녹음으로 안토니오의 뒤에 마탑주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확실한 정황 증거를 확보한 상황.

지금은 제라드가 국왕에게 들려주기 위해 알현실로 들어간 상태였다.

‘과연 녹음을 들은 국왕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제라드가 돌아왔다.

“아버지. 왜 이렇게 빨리 나오셨어요?”

“바쁘다고 하셔서 녹음기만 놓고 가라더구나.”

“바로 확인을 안 하셨나요?”

“국왕께서 따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느라 잠시 확인이 늦어질 것 같구나. 옆에 두고 왔지만, 별일이야 있겠느냐.”

“아…….”

지크는 약간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 중요한 물건을 그냥 놓고 나왔다고?

‘뭐, 그래도 알현실에 있다니까. 그곳에서 뭔가 일을 벌일 놈은 없겠지…….’

제라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국왕이 놓고 가라고 했으니 놓고 갈 수밖에.

“일이 끝나는 대로 녹음기를 확인하실 거다.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되시겠지.”

“빨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생각보다 빨리 소식이 왔다.

“공작님. 국왕 전하께서 지금 뵙자고 하십니다.”

집사장의 말에 끄덕인 제라드가 지크를 바라봤다.

“같이 가자꾸나.”

“저도 들어가도 돼요?”

“물건의 주인인데 너도 결과를 들어봐야지.”

끄덕인 지크는 제라드와 함께 대전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수많은 가신이 있었고 그 중심엔 쉐인 2세가 왕좌에서 근엄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국왕 전하.”

“맥러플린 공. 조금 전에 새로운 증거를 발견했다고 물건을 놓고 갔는데, 이것이 맞느냐?”

쉐인의 손에는 금빛으로 이뤄진 나비 모양의 브로치가 있었다.

“예, 맞습니다.”

“여기 있는 버튼을 누르면 녹음이 나온다고 했지?”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왜 작동하지 않는 것이냐?”

“예?”

제라드는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쉐인이 보란 듯이 나비의 몸통을 꾹꾹 눌러댔다.

“보아라. 아예 작동이 안 되질 않느냐?”

“그럴 리가 없는데…….”

흔들리는 동공으로 바라보던 제라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거라.”

가신에게서 물건을 건네받자 제라드가 신중하게 살펴봤다.

평소와 다름없이 작동 버튼을 눌렀는데도 녹음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어째서 작동되지 않는 거지?’

의아함을 느낀 건 제라드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지크 또한 그랬다.

‘카르볼, 어떻게 된 거야? 고장이라도 난 거야?’

-그럴 리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멀쩡하던 도청기다. 고장이 날 리가 없지.

‘그런데 작동을 안 하잖아?’

-으음. 왜 그러는지는 나도 잘…… 어?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카르볼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잠깐 가까이 보게 해주어라.

“아버지. 저도 좀 볼게요.”

“그래.”

제라드에게서 브로치를 건네받자 지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아귀에 마력이 감지되었습니다.]

-도청기에서 아주 미세하게 마력이 느껴진다.

‘나도 느꼈어.’

도청기는 마나로 구동되는 방식이 아닌 물건.

마력이 느껴질 리가 없다.

-형상 변형 마법이 걸려 있나 보군. 누군가 모조품으로 바꿔치기한 모양이다.

‘아……!’

이유를 알아냈다.

이건 모습을 똑같이 흉내 낸 가짜다.

진짜는 누군가가 중간에 가로채버렸고.

‘누구 짓이지? 안토니오 짓인가?’

하지만 마탑주와의 녹음을 들었을 때 안토니오가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은 없었다.

‘설마 궁정 내부에 또 다른 첩자가 있는 건가?’

분명 그레고르로부터 명령을 하달받고 중간에 바꿔치기했을 것이다.

‘누군지 몰라도 이 자리에서 범인을 드러내야 해.’

또다시 반역을 입증하지 못했다간 제라드는 국왕의 신임을 완전히 잃고 말 것이다.

지크는 서둘러 손아귀의 마력을 흡수했다.

그러자 브로치의 형상이 가루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니?!”

제라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 이건 가짜였어요.”

“가짜?”

“누군가 우리 물건을 바꿔치기한 거예요. 증거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그 말을 들은 쉐인이 근엄한 눈빛으로 지크를 바라봤다.

“지크라고 하였느냐.”

“예, 전하.”

“네 말은 이 안에 반역자가 있다는 말이렷다?”

“그렇습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느냐? 증명하지 못한다면 왕실의 위신을 떨어트린 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무서운 말이었지만 지크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겁먹지도 않았다.

또렷한 눈동자로 국왕을 올려다볼 뿐.

“증명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브로치에는 위치 추적 기능이 있거든요.”

“위치 추적?”

지크가 손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린다.

‘사전에 저장된 수신호를 사용하면 브로치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카르볼이 말했지. 바로 이렇게.’

삐삐삐삐잇-!

난데없는 소리가 대전에 가득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난 위치로 좌중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저기 있군요. 제 브로치를 가져간 범인이.”

지크가 가리킨 방향엔 물건을 바꿔치기한 범인이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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