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28화
‘뭐지? 안토니오 이 자식. 또 회의에 들어갔나?’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려봤지만 그레고르의 통신구는 3시간째 반응이 없었다.
제라드를 방해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그걸 순조롭게 이행한 안토니오였지만…….
‘어떻게 된 게 아직도 연락이 없지?’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확실히 이상해. 삼왕자, 그 어리바리한 새끼도 연락이 안 되고 말이야.’
3년 전, 발루두크가 데칸의 왕세자 중 반역을 저지를만한 인물이 누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레고르는 삼왕자를 적극적으로 추천했었다.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욕심은 많아,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물이 바로 삼왕자다.
부모·형제와 사이도 좋지 않아서 제안을 수락할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데칸의 왕세자들을 모조리 죽여 왕위에 올려준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을 잘못 고른 것 같아. 그런 멍청이가 일을 제대로 할 리가 없을 테니.’
형상 변형 스크롤을 이용해 브로치를 바꿔치기하라는 지령을 내렸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안토니오 또한 깜깜무소식이고.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 실패한 거겠지. 제기랄…….’
놈들을 믿은 내 잘못이라며 자책하던 그레고르는 서둘러 통신구를 꺼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발루두크 님. 발루두크 님!”
-웬 호들갑이냐?
“큰일 났습니다. 발도르 공작은 물론 삼왕자와도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아무래도 일이 틀어진 것 같습니다.”
-놈들이 우리 관계를 눈치챘단 말이냐?
“예. 제라드가 가져온 브로치로 대화를 도청했다면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그레고르는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봤다.
발루두크의 성격상 불호령이 떨어지리라.
긴장감에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의외로 들려온 건 호통이 아니라 혀를 차는 소리였다.
-쯧쯧쯧. 한심한 것들. 수년간 준비한 일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다니. 내 이럴 줄 알았느니라.
“예? 아셨다고요?”
-그럼. 실패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 설마 내가 너희 같은 버러지들이 성공하리라 기대하고 있었을까? 크흘흘, 지나가던 개가 비웃겠다.
“…….”
신랄한 비판에 그레고르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면목이 없어서가 아니라 심적으로 충격을 받아서였다.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전혀 없었다고……?’
적어도 주인에겐 인정받는 중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착각이었다.
믿었던 주인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
그러나 기분 탓이 아니었다.
-네놈을 이제 버릴 때가 됐구나.
“예?”
자신은 정말로 버려졌으니까.
-너와의 관계는 여기까지다. 도망치든 말든 알아서 하거라. 내 도움은 더 이상 바라지도 말고.
“바, 발루두크 님! 발루두크 님!”
그것이 그레고르와 발루두크의 마지막 통화였다.
“받아! 받으라고!”
통신구를 여러 번 두들겨봤지만, 연락은 이어지지 않았다.
점멸하듯 불빛도 깜빡이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상대 쪽에서 통신구를 박살 내버린 모양.
“이런 X이발!”
통신구를 던져 마찬가지로 박살 내버린 그레고르가 분을 참지 못했다.
“이용 가치가 떨어지자마자 날 헌신짝처럼 버려? 내가 그동안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12인의 선구자라는 명성만을 믿고 따른 것이 잘못이었다.
힘들 때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그를 아버지처럼 따른 것이 잘못이었다.
‘이렇게 배신당하다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러고 있을 틈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노리러 국왕의 친위대가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실험실로 가서 증거부터 없애야 한다. 생체실험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면 난 끝이야.’
아마도 발루두크가 어둠의 사냥개를 풀어 자신에게 보복하려 들지 않을까?
생체실험은 발루두크가 줄곧 신경 쓰고 관심 갖던 분야였으니까.
그런 생각이 미치자마자 그레고르는 외투를 챙겨입고 순간이동 게이트에 들어섰다.
번쩍-!
순식간에 자신이 있던 마탑 최상층에서 마탑 최하층으로 이동이 됐다.
“다들 들어라! 당장 실험을 중단하고 증거가 될 수 있는 정보는 모두 폐기…….”
소리치며 실험실로 들어서던 그레고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실험실에는 연구원이 없었다.
정확히는 살아 있는 연구원이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자결한 듯 목에 단검을 꽂고 쓰러져 있을 뿐.
‘어떻게 된 거야? 이 많은 인원이 모두 뜻을 합쳐 자결했다고?’
저마다 손에 단검을 쥐고 있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증거는?’
증거들을 폐기하기 위해 테이블을 쳐다봤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불태웠는지 테이블엔 잿가루만 남아 있었으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동안의 실험 기록을 모두 말소하고 깔끔하게 자결했다?
그것도 연구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합심해서?
상식적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X발! 누가 침입했나? 무슨 상황인 거야, 대체?’
의아해하던 그때.
통신구가 점멸하며 부하로부터 연락이 왔다.
-타, 탑주님! 어디 계십니까?
“무슨 일이야?”
-지, 지금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마탑을 둘러쌌습니다!
“뭐?”
-탑주님이 안 계신다고 거짓말을 해도 막무가내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마법으로 대응해 봐도 더 큰 마법으로 막아서는 게 최소 7서클의 마법사는 되어 보이는…….
‘7서클? 설마 국왕의 친위대?’
국왕의 친위대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지만, 한 가지는 공개되어 있다.
모두가 7서클이 넘는 최강의 마법사들로 꾸려진 국왕의 호위 부대라는 점이다.
‘젠장.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일찍 도착할 줄이야.’
그래도 다행인 건 텔레포트할 시간은 충분하다는 점.
부하들이 문 앞에서 시간을 끄는 사이 자신은 유유히 주문을 외우면 그만이다.
‘어디로 갈까? 발루두크 님도 버린 마당에 더 이상 갈 곳이라곤…….’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빛이 번뜩인 것은.
‘이놈은?’
번쩍거리는 통신구를 보던 그레고르가 표면을 두들겨 연락을 받았다.
-마탑주님! 접니다, 피터!
“알고 있다. 왜 연락한 것이냐?”
-고급 정보를 들어서 말입니다. 국왕이 친위대를 동원해 탑주님을 잡으라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소식 참 빠르군. 이미 알고 있다.”
-예? 알고 계셨어요?
“지금 놈들이 마탑에 들어오려고 아주 난리야.”
-아……!
통신구 너머로 탄식이 들린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어서 피하십시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문제는 어디로 가느냐지만.”
-제가 있는 곳으로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좌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피터의 제안에 그레고르는 잠시 고민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아니지. 놈은 내게 충성을 맹세했잖아?’
마나의 서약이 얼마나 효능 좋은지는 익히 알고 있는바.
피터가 자신을 함정으로 끌어들일 리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다른 걸 떠나서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 믿을만한 사람이라곤 피터밖에 없기도 했고.
하지만 뭐든 신중히 처리해서 나쁠 건 없는 법이다.
“알았다. 좌표를 불러라. 위치를 확인한 다음 이동할지 말지 결정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좌표는 34.6528…….
이윽고 좌표를 끝까지 들은 그레고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확인하고 말 것도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익숙한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설마, 좌표로 알려준 곳이 칼리파 산맥이더냐?”
-예, 맞습니다.
고위급 마법사라면 칼리파 산맥에 드래곤의 유적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웬만하면 그곳에 가선 안 된다는 것까지도.
고농도의 마력으로 가득한 음지에 발을 들였다가 서클이 망가진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그레고르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하필이면 왜 이곳으로 한 거지?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오라고 한 것이냐?”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드래곤의 유적이 있다는 것쯤은. 그리고 마법사들이 꺼리는 장소라는 것쯤은.
“알면서도 날 이리로 불러?”
노기 어린 목소리였지만 들려온 대답은 의외로 침착했다.
-그렇기에 더 좋지 않겠습니까?
“뭐라?”
-추격을 따돌리기에 말입니다. 마탑주님이 설마 이곳에 숨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할 테니까요.
“으음.”
가만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다.
은거하기엔 여기만 한 곳이 없다.
마법사들이 꺼리는 곳에 마법사가 찾아올 리는 없을 테니까.
“너도 가끔은 묘안을 생각해낼 때가 있구나.”
-……칭찬 맞으시죠?
“됐고, 네가 알려준 좌표가 설마 드래곤의 유적 한가운데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유적에서 족히 30분은 떨어진 장소이니 걱정 마십시오.
그레고르도 알고 있다.
알려준 좌표가 유적과 떨어진 위치라는 것쯤은.
그저 확인차 물어봤을 뿐이다.
“알았다. 지금 그리로 가지.”
통신구를 집어넣은 그레고르가 주문을 외웠다.
“텔레포트(Teleport).”
그의 몸이 빛에 휘감기며 사라졌다.
* * *
3시간 전.
지크로부터 작전을 들은 피터는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뭐? 나더러 마탑주를 칼리파 산맥으로 텔레포트 하도록 유도하라고?
-예. 마탑주는 마나의 서약이 걸려 있는 형님을 철석같이 믿고 있을 테니 쉽게 걸려들 것입니다.
-그, 그렇다고 마탑주가 순순히 속을까?
-첫째 형님이 잘하는 게 남을 속이는 것 아닙니까? 이참에 연기실력을 뽐낼 좋은 기회입니다. 제 점수도 좀 따고요.
점수라는 말이 솔깃했는지 피터의 자세가 좀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점수라니.
-형님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신다면 보상을 드리겠다는 소리입니다.
-설마 마나의 서약을 풀어주는 건…….
-그건 꿈도 꾸지 마시죠.
-…….
-대신 형님도 좋아할 만한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분명히 좋아하실 겁니다.
회상을 마친 피터는 자신이 알려준 좌표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만에 하나 작전이 실패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괘, 괜찮을 거야. 데칸에서 최고라 불리는 두 마법사가 여기 있으니까. 게다가 마법을 차단하는 지크까지도.’
좌표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그들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그때.
별안간 마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곳엔 자신이 불렀던 좌표로 이동한 그레고르가 서 있었다.
“마탑주님! 여기입니다!”
피터가 손을 흔들며 그레고르의 시선을 끌었다.
“피터. 못 본 사이에 많이 야위어졌…….”
그레고르가 말하는 그때.
철컥-!
손목에 구속구가 채워졌다.
“……!”
갑작스러운 기습에 그레고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곳엔 더는 만나고 싶지 않던 두 사람이 속 시원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드디어 잡았다. 그레고르, 이 개새끼.”
제라드와 그의 스승, 달프레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