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33화
쥐새끼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왕실의 지하 감옥.
저벅저벅-
침묵을 깨는 걸음 소리가 그레고르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레고르 판테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철창 앞에 서 있었다.
“이게 누구야? 반역자를 붙잡은 영웅 나리 아니신가?”
“닥쳐라. 쓰레기 같은 첩자 새끼.”
제라드는 일갈하며 그레고르를 노려봤다.
“네놈이 암살자를 보내 우리 공작가를 습격한 이후로, 난 한 가지만을 꿈꿨다. 네놈을 붙잡아 사지를 찢어발기는 순간만을.”
“그래? 그럼 지금 한번 해보면 되겠네. 자.”
양팔을 벌리며 능청스레 말하는 그레고르의 모습에 제라드는 분노를 삭여야 했다.
“후우, 나도 마음 같아선 당장 네놈을 찢어발기고 싶다. 그러나 네놈의 혓바닥에서 나오는 말부터 들어보라는 국왕 전하의 명령이 있었기에 잠시 미뤄두마. 감사히 여기거라.”
“꿈 깨라. 나한테서 얻어낼 정보라곤 없을 거다.”
“고문을 당하기 직전엔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 너라고 과연 다를까? 내 장담하는데, 네놈은 곧 어린아이처럼 비명을 지르게 될 거다.”
“큭큭, 못 본 사이에 허세만 늘었구나.”
“허세인지 아닌지는 당해보고 판단하도록.”
제라드는 함께 온 간수들에게 슬쩍 턱짓했다.
그러자 간수가 들고 있던 꼬챙이를 쇠창살 사이로 찔러넣었다.
푸욱!
“큭!”
팔이 꿰뚫리며 피가 흘렀다.
푹!
또 한 명의 간수가 든 꼬챙이가 이번엔 허벅다리를 뚫어버렸다.
반대쪽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크흑!”
순식간에 세 명의 간수가 든 꼬챙이에 꿰인 그레고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반격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평범한 간수가 아니다.
왕실 지하에서 죄인들을 감시하는 음침한 일을 하고 있지만, 엄연히 일반인의 범주를 넣어선 오러 유저들이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젠장. 그렇다고 마법을 쓸 수도 없고.’
그레고르의 손목과 발목, 심지어 목까지.
목이란 목엔 전부 채워져 있는 구속구 때문에 마법을 쓰기엔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악마어를 사용할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놈들은 바보가 아니다.
악마어를 입에 담는 순간 목을 꿰뚫어 죽일지도 모른다.
‘이런 곳에서 비참하게 죽을 순 없지.’
반드시 기다리다 보면 기회가 올 것이다.
왕궁에는 삼왕자 말고도 다른 첩자가 있었으니까.
어쩌면 자신을 버렸던 발루두크가 마음을 바꿔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도 모르고.
‘그때까진 살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이를 악물며 버티자, 제라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고통이 심할 텐데 비명 한번 지르지 않는다니. 못 본 사이에 아주 독해졌구나?”
“얼마든지 해봐라. 내가 입을 여나.”
“강도를 더 높여야겠군.”
제라드가 눈짓을 주자 간수들이 꼬챙이를 흔들었다.
꼬챙이에 꿰인 몸에서 극심한 고통이 올라왔다.
“크, 크아악!”
“이제야 비명을 지르는군. 보기 좋아.”
제라드가 흡족해하자 간수들이 더 흔들어댔다.
연신 비명을 지르던 그레고르가 혼절하기 직전.
간수들이 눈치껏 꼬챙이를 멈췄다.
“말해라. 왕국에 잠입한 첩자가 몇 명인지. 어디에 있고 누구인지.”
“허억, 허억, X까. 끄아아아악!”
꼬챙이가 흔들릴 때마다 수도꼭지처럼 피가 흘렀다.
조용하던 감옥이 비명으로 가득 찼다.
꼬챙이를 멈추자 비명 또한 멎었다.
“말해라. 왜 우리 가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내가 뭐 못 할 짓이라도 했나?”
“크흐흐, 사실 네가 한 잘못은 없다. 모든 건 달프레드를 엿 먹이기 위한 작전이었을 뿐.”
“설마 스승님이 널 내쳤다는 이유로 이런 짓을 벌였다는 말이냐?”
“그렇다.”
“…….”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던 제라드가 간수의 꼬챙이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꼬챙이를 휘저었다.
“고작 그런 사소한 이유로, 나와 내 가족들을 죽이려 했단 말이냐?”
“끄아아아! 끄아아악!”
“쓰레기 같은 새끼. 이대로 죽어라. 죽어!”
꼬챙이를 흔들 때마다 핏물이 울컥 나오며 상처가 더 벌어졌다.
“대, 대공 각하. 이러다 진짜로 죽겠습니다.”
“후우…….”
옆에 있던 간수가 말리고 나서야 제라드는 비로소 진정할 수 있었다.
“크흐흐, 대공이라……. 나를 넘긴 대가로 출세했나 보구만. 이 정도면 썩 괜찮은 거래 아닌가? 분노할 이유가 뭐가 있지?”
“이 미친 새끼가!”
욱하던 제라드는 이성을 되찾으려 애썼다.
“후우, 내가 어리석었군.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인데 괜히 감정 소모할 필욘 없지. 여봐라.”
“예. 각하.”
“이 녀석이 입을 열 때까지 계속 압박하거라. 마법사를 불러 죽지 않게 틈틈이 상처도 치료해 주고.”
“알겠습니다.”
“난 근처에 있을 테니 뭔가 말하면 즉시 내게 보고하도록. 행여나 금지된 흑마법을 쓰려고 들면 죽여도 좋다.”
“예, 대공 각하!”
이윽고 몸을 돌리자 제라드의 등 뒤로 거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악! 끄으윽!”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고문을 계속한다면 녀석도 굴복할 수밖에 없으리라.
마법으로 회복시켜서 무한한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녀석도 모르지 않을 테니.
‘저렇게 버티는 걸 보면 놈도 죽고 싶지는 않은 모양. 때가 되면 반드시 굴복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라드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30분이 지났을 즈음, 간수가 찾아왔으니까.
“각하. 죄인이 입을 열겠다고 합니다.”
“가지.”
30분 만에 만난 그레고르는 30일을 굶은 사람처럼 상당히 초췌해져 있었다.
“……말하겠다. 나도 여기서 개죽음당하고 싶진 않아.”
“누가 널 죽인단 말이냐? 너는 내가 알고 싶은 사실을 말하지 않은 한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
“알고 있어. 그러니 협조하겠다는 거고.”
“그 대신 원하는 게 있겠지?”
“발루두크의 목적과 첩자의 수, 정체 등등, 내가 아는 모든 걸 말할 테니 목숨만은 살려다오.”
“그건 불가능하다. 반역자를 살려준 전례는 그 어디에도 없어. 그 대신 단두대에서 고통 없이 죽여준다고 내 약속하지.”
“정녕 살려줄 순 없는 건가? 어디 이름 모를 시골로 보내 버려도 좋다. 다른 나라로 추방 명령을 내려도 좋고. 다 좋으니 목숨만은 붙어 있게 해다오.”
“그 점은 국왕 전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나한테 권한은 없어.”
“잘도 그런 거짓말을 하는군. 모든 권한을 가지고 이곳에 온 주제에.”
“…….”
“그럼 이렇게 하자. 아까의 조건에 더해 내 서클까지도 내놓겠다.”
“서클을?”
“나는 발루두크와 마나의 서약을 한 상태. 배신하는 즉시 서클이 무너지고 폐인이 될 것이다. 그럼 나를 타국으로 추방해라. 이러면 사형에 맞먹는 처벌이 아닌가?”
제라드는 턱을 쓸며 잠시 고민하는 척 뜸을 들였다.
이미 마음속으론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군. 최종결정은 어디까지나 전하께서 내리겠지만.”
“그럼 협상한 거다?”
끄덕이자 그레고르가 심호흡 끝에 말했다.
“그럼 이야기하지. 우선 발루두크의 진정한 목적은…….”
순간 그레고르가 말하다 말고 숨을 멈췄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제라드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왜 말하다가 마는…….”
“쿨럭…….”
벌어진 입에서 피를 왈칵 쏟아낸 그레고르가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구멍이란 구멍에서 온통 피가 쏟아져 나왔다.
“당장 문 열어!”
간수들이 허겁지겁 철창을 열고 들어가 그레고르를 살펴봤다.
“죽었습니다.”
“빌어먹을!”
정보를 넘기려던 순간 그레고르가 알 수 없는 힘으로 죽었다.
‘마나의 서약 때문이 아니야. 서약은 서클만 무너뜨릴 뿐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아마도 발루두크가 안전장치 삼아 사전에 뭔가를 심어놓은 거겠지. 발설하면 자멸하도록.’
설마 자신도 확인할 수 없는 금제를 걸어놓을 줄이야.
괜히 애꿎은 시간만 허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레고르를 다른 식으로 이용하는 거였는데.
‘하아, 국왕 전하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깊은 한숨을 쉰 제라드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웠다.
* * *
퀘스트가 뜬 것은 달프레드의 제안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제안을 수락하고 마법사단에서 입단식을 치르라고?’
지크는 솔직히 제안을 거절할 작정이었다.
귀찮은 짓을 사서 할 정도로 한가한 몸은 아니었기에.
‘하루빨리 숙련도를 올리고 강해져야 하는 마당에 마법사단은 무슨 마법사단?’
분명 이런 부정적인 마음뿐이었다.
돌발 퀘스트가 뜨기 전까지는.
‘흐음. 입단만 하면 스탯을 450개나 준단 말이지?’
숙련도야 시간 날 때 틈틈이 하면 그만이다.
스탯을 얻을 수 있다면 뭔들 못하리.
‘좋아. 수락하는 게 낫겠어.’
퀘스트를 수락한 지크는 달프레드에게 입단하겠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카르볼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며 오해하고 있었지만, 순전히 퀘스트 때문이었다.
‘퀘스트만 아니었으면 입단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퀘스트의 노예라 불려도 할 말 없는 소리였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이 아니었으면 환생이고 뭐고 없었을 테니.
‘게다가 일이 터질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퀘스트를 보면…… 솔직히 소름 돋기도 해. 마치 나를 지켜보는 듯 시기적절하게 나타나잖아?’
그런 걸 보면 분명 시스템을 관리하는 상위 차원의 누군가가 있을 것 같다.
‘신인가? 아니면 악마?’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런 퀘스트를 주는 걸까?
왜 이곳에 보내서 강해지라는 목적을 주고, 힘을 키우면 지구로 돌려 보내준다며 기회를 주는 걸까?
‘일단 강해져 보면 알겠지.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거냐? 10분 됐느니라.
‘오케이. 준비됐어.’
카르볼이 시전한 마법을 흡수하며 틈틈이 숙련도를 쌓고 있는 그때였다.
똑똑-
“지크 도련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마법 수련을 멈추고 문밖으로 나가봤다.
그곳엔 예상치 못한 한 사람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예비 매형? 여긴 어쩐 일이세요? 궁정까지 다 찾아오시고.”
“크흠, 할 말이 있어서 왔단다. 들어가도 될까?”
“그럼요.”
지크를 따라 방으로 들어선 테오는 문을 닫자마자 돌발행동을 했다.
털썩-
난데없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미안하다! 우리 가문이 너희 가문에게 몹쓸 짓을 하고 말았어!”
발도르의 가주인 안토니오는 복수라는 명목으로 제라드가 가져온 증거를 국왕 앞에서 무시하며 방해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안토니오는 마탑주의 내통자였고 암살을 포함한 모든 것이 비난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된 일이었음이 밝혀졌다.
하여 현재의 발도르는 반역자 가문으로 낙인 찍히며 최악의 평가를 달리고 있다.
발도르가 피해를 입힌 맥러플린 가문에게 죄인처럼 구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구만?’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테오를 지크가 얼른 일으켜 세웠다.
“매형이 잘못한 건 없잖아요. 잘못이라면 마탑주와 발도르의 가주가 했지.”
“그래도 미안하다. 내가 너희 가문에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 맞으니까…….”
“의도적이라뇨?”
“아버지가 맥러플린 가문의 공녀를 꾀어보라며 나한테 접근하도록 시켰어. 난 바보같이 아버지에게 인정받겠다고 미끼를 덥석 물었지. 암살자를 이용해 나와 루나를 죽임으로써 맥러플린 가를 비난할 빌미를 만들겠다는 속셈도 모르고서 말이야.”
고해성사하듯 잘못을 고했지만 알고 보면 테오도 아버지에게 이용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법에 재능이 없다고 자식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아버지라니……. 우리 아버지랑은 완전 딴판이구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다니.
그것도 아버지에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테오의 속도 말이 아니리라.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이 일에 관계되지 않았어. 나도 아버지한테 뒤통수 당한 심정이라고.”
“알아요. 그러니까 이제 진정하고 그만 사과하세요. 매형 잘못은 하나도 없잖아요.”
“고, 고마워. 이해해줘서.”
목멘 목소리로 대답하던 테오는 다른 할 말이 있는지 급히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소식 들었어. 궁정 마법사단에 들어간다며?”
“아…… 맞아요. 소식 참 빠르네요.”
“어떻게 된 거야? 지크, 넌 마법이라곤 배운 적도 없잖아.”
“그냥…… 제 재능을 좋게 봐주신 듯해요. 마법이야 가르치면 문제없다고 하더라고요.”
“허, 정말 대단하다, 지크! 왕국 최고의 마법사의 인정을 받다니!”
“그보다 할 말이 뭐예요? 칭찬하러 오신 건 아닌듯한데.”
“아, 그렇지. 너한테 경고하러 왔어.”
“경고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테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궁정 마법사단에 너한테 원한을 품은 자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