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37화
‘카르볼. 잠깐 시간 있어?’
-왜 그러느냐? 혹시 마법 대련 때문이냐?
‘응. 쪽지 봤구나?’
-3천 년 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을 유랑하던 나다. 판게아 공용어 정도야 익히 알고 있지.
아무래도 가웬에게 주려던 쪽지를 카르볼이 읽은 모양이다.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의 코를 대련으로 납작하게 해주려고?
‘어. 그런데 놈한테 이기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내 도움이 왜 필요하지? 마법 차단을 하면 간단한 문제 아니더냐?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 차단은 드래고니안도 할 수 없는 기술이야. 누구에게도 알려져선 안 돼.’
-그럼 어떻게 마법 대련을 하려고? 넌 서클도 없지 않느냐?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마법을 쓰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
지크에겐 마법 흡수라는 스킬이 있다.
상대의 마법을 흡수하고 원하는 타이밍에 되돌려줄 수 있는 사기적인 스킬.
이걸 이용하면 서클이 없어도 마법사처럼 보이는 게 가능하다.
‘현재 마법 흡수의 성취도는 6성이야. 최대 7개의 마법을 흡수할 수 있지.’
카르볼의 도움으로 7개의 마법을 미리 흡수해서 대련에 나간다면 상대방과 문제없이 마법 대련을 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제한 시간이 10분이라 빨리 사용해야 한다는 거지만.’
10분이 지나면 저장해 뒀던 마법은 모두 사라진다.
그렇기에 가능한 약속 장소에도 늦게 도착해야 한다.
행여나 일찍 갔다가 가웬이 없으면 10분을 낭비할지도 모르니까.
‘카르볼. 나한테 7개의 마법을 사용해줘. 마력석은 충분히 있어.’
-지금 마법을 익혀서 대련에 사용할 셈이냐?
‘응. 6서클의 공격 마법으로 부탁해. 상대를 죽이면 곤란하니까 적당한 걸로.’
-알겠다.
‘고마워.’
-고맙긴. 내 부탁으로 마법사단에 입단했는데 이 정도야 일도 아니지. 걱정 마라. 내가 효율 좋은 마법으로다가 골라줄 테니!
‘그럼 준비할게.’
목걸이를 벗은 지크가 눈앞에 놔둔 뒤, 보물창고에서 가져온 마력석을 옆에 나란히 놔뒀다.
“됐어. 이제 나를 겨냥해서 마법을 써줘.”
곧이어 목걸이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마력석을 매개로 한 마법이 발동되었다.
콰콰콰콰-!
별안간 허공에서 생성된 물류가 지크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마법은 몸에 닿자마자 스펀지에 흡수되듯 사라져 버렸다.
[시전된 마법 ‘워터 웨이브’를 흡수합니다.]
[스킬의 숙련도가 60 증가하였습니다.]
[7성 성취까지 남은 숙련도 2,730/30,000]
[마법 ‘워터 웨이브’를 차원의 틈새에 저장하였습니다.]
[저장한 마법 1/7]
[제한 시간 내에 마법을 방출할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 00:09:59]
* * *
회상을 마친 지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상대가 불 마법을 쓰면 이걸 사용하라더니 생각보다 더 강하잖아?’
지크는 카르볼에게 마법만 받은 것이 아니라 약간의 강의도 들었다.
화염 마법엔 물 마법으로 대응하고.
물 마법엔 대지 마법으로, 대지 마법엔 얼음 마법으로.
그리고 얼음 마법엔 화염 마법으로 대응하라는 등.
유리한 상성의 마법으로 대응하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상대 패를 보고 내미는 카드 게임처럼.
‘하지만 상대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거라고 했지.’
어떤 속성이 유리하고 불리한지는 마법사라면 아는 기본 상식.
그렇기에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상대 속성보다 유리한 마법을 쓰고 싶어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웬만한 마법사들은 속성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대련 시작부터 준비한 마법을 쓴다고 한다.
‘상대의 마법을 보고서 대처하면 그때는 이미 늦어버리니까. 캐스팅을 마치기도 전에 상대 마법에 처맞고 죽어버리니까.’
때문에 중요한 건 최대한 빨리 마법을 준비해서 선공을 날리는 것이라 한다.
상대가 대처하기도 전에.
‘하지만 난 그럴 필요가 없지. 상대의 마법을 보고 대처해도 늦지 않으니까.’
지크가 저장된 마법을 발현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0.1초 남짓.
머릿속으로 주문을 찾아서 꺼내 쓰기만 하면 되므로 캐스팅 시간 따윈 없다.
즉, 9서클 대마법사나 할 수 있는 무영창이 가능하다는 뜻.
그러므로 지크는 상대의 마법을 보고 나서 대처해도 늦지 않는다.
‘상대의 패를 먼저 보고 대응하니 질 수가 없지.’
어디까지나 시스템의 능력 덕분이었지만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다들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하는 꼴을 보니.
“무, 무영창이라니.”
“그건 대마법사만 가능한 기술 아니었어?”
“4서클이 무영창을 쓴다고? 그게 이론적으로 가능해?”
“미쳤다, 이건 미쳤어!”
관중들이 흥분하며 소리쳤지만 미쳤다고 여기는 건 상대인 가웬도 마찬가지였다.
‘미, 믿을 수 없어. 저 새끼가 정말로 무영창을……?’
분명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통구이가 되어도 모자랄 만큼의 화력이 쏘아진 상황에서, 지크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끝난 게임이나 다름없던 상황.
그런데 한순간에 물 속성 마법으로 대응함으로써 상황을 반전시켰다.
그럴 시간이 없었는데도.
‘게다가 놈이 사용한 마법은 워터 웨이브였어.’
워터 웨이브는 6서클 마법.
4서클은 죽었다 깨어나도 쓸 수 없다.
‘이 새끼가 일부러 4서클이라고 거짓말했구나!’
자신의 서클을 낮춰서 얕잡아보게 만들어 방심을 끌어내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뭐하러 서클을 속이겠는가?
‘하지만 무영창은? 6서클이 어떻게 그걸…….’
마법사단장인 제라드도 할 수 없는 기술을 구사하다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데칸에서 유일한 9서클인 달프레드뿐이리라.
‘설마 15살에 9서클을? 말도 안 되지.’
분명 미리 마법을 준비해놓고 무영창처럼 보이게 수작을 쓴 것이리라.
그게 아닌 이상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한 번 더 상대해 보면 알겠지.’
가웬은 다시 한번 지팡이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몸 안에 있는 여섯 개의 마나 고리에 순환시킨 뒤 계산한 술식에 마력을 입혀 지팡이 끝으로 모았다.
“아이시클 오브 레인(Icicles of rain)!”
시동어를 외치자 지크가 서 있던 바닥에 마법진이 생기더니 그 위로 무수한 얼음의 비가 내렸다.
6서클 마법으로, 그에 준하는 마력의 실드를 펼치지 않으면 꼬챙이 신세가 되기에 딱 좋은 상황.
하지만.
지크는 이번에도 상대의 마법을 보더니 무심하게 대응했다.
허공에 손을 휘저음으로써.
화르르륵!
손길에서 나타난 불길이 지크의 머리 위를 우산처럼 감쌌다.
머리를 꿰뚫을 기세로 떨어지던 얼음의 비가 우산에 닿기도 전에 열기에 녹아 사라졌다.
“내가 봤어! 확실히 무영창이야!”
“와아! 내가 무영창을 실제로 볼 줄이야!”
“…….”
분하지만 가웬도 관중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을 달싹거리지도 않는 것이 시동어 한 번 외우지 않았다.
무영창이 확실했다.
‘미친…… 어떻게 6서클이 무영창을…….’
6서클 마법인 파이어 배리어로 대응한 걸 보면 최소 그 이상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
그런데 어떻게 15살이 무영창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다시 해본다. 다시!’
현실을 인정할 수 없던 가웬이 연이어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그때마다 소용없다는 듯 지크가 상성에 유리한 마법을 꺼내 여유롭게 막아냈다.
‘내 마법이 저리도 허망하게 막히다니.’
허무했다.
흡사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먼저 공격할 수 있는데도 방어만 하면서 날가지고 놀아?’
무영창의 장점은 방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상대보다 빠르게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도 막기만 한다는 것은 자신을 농락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가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죽여 버린다.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살면서 이런 치욕을 당한 적은 처음일 정도로 굴욕적이었다.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자!’
가웬은 기어코 쓰면 안 되는 마법을 꺼내고야 말았다.
* * *
‘지금쯤이면 대련은 끝났겠지?’
훈련 교관인 제이크 팔머는 조용히 기숙사에서 빠져나왔다.
언제쯤 말리러 갈까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데 지금이 그 타이밍으로 보였다.
‘광장에서 대련한다고 했지?’
느긋한 발걸음으로 광장을 향하자 아니나 다를까 단원들이 모여 있다.
얼추 200명은 되어 보이는 게 거의 모든 원생이 대련을 구경하러 나온 것 같았다.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이야. 하긴 근래에 가웬이 마법 대련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따분한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면 싸움 구경에 눈 돌아가는 건 당연지사.
그 대상이 에이스인 가웬이라면 누구라도 앞뒤 제쳐두고 달려 나올 것이다.
이윽고 단원들과 가까워지자 제이크는 짐짓 근엄한 교관의 모습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뭣들 하는 거야? 무슨 구경 났어?”
윽박질러봤지만 단원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대련 장소만 응시할 따름이었다.
“이거 원, 교관이 부르는데 말이야. 보는 척이라도 해야…….”
단원들을 따라 시선을 옮긴 그때.
제이크도 그들과 같이 멍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콰콰콰콰-!
화르르르-!
대련 장소에서는 한쪽에서 마법을 쓰면 한쪽에서 적절한 속성으로 맞받아치는 광경이 연신 벌어지고 있었다.
흡사 창과 방패의 대결.
하지만 그중에서도 사람들을 놀랍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지크였다.
‘마, 말도 안 돼. 무영창을 쓰잖아?’
자신의 눈이 틀림없다면 지크는 캐스팅 시간 없이 빠르게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면서 가웬의 마법을 보란 듯이 상쇄시키며 방어하고 있었다.
상대의 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무영창으로 빠르게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게 가능하나? 어떻게 15살의 어린 나이에…….’
사람들이 대련 장소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15살이 무영창을 쓴다는 건 세상이 발칵 뒤집힐 만한 대사건.
이러니 교관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맥러플린 가문에 저런 천재가 있었다니…….’
놀라웠지만 한편으론 사단장에게 서운했다.
‘너무하시네. 분명 나한텐 4서클이라고 소개했으면서…….’
지크는 절대로 4서클이 아니었다.
지금도 보란 듯이 6서클 마법을 쓰지 않는가?
게다가 어린 나이에 무영창도 쓰는 천재 중의 천재다.
어쩌면 6서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이건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다. 가웬은 절대로 저 아이를 이길 수 없어.’
6서클,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상대를 가웬이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지금도 쓰는 족족 마법이 막혀서 헉헉거리는 마당에.
이미 승부가 났다는 건 여기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가웬만은 인정할 수 없던 모양이다.
자신이 쓸 수 있는 궁극의 마법을 꺼내는 걸 보면.
“어디, 자신 있으면 이것도 막아봐라!”
소리치던 가웬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마력을 쥐어 짜냈다.
가웬이 쓰려는 마법의 정체를 깨달은 교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건 스톰 거스트?’
6서클이 쓸 수 있는 최강의 범위 마법으로 잘못하면 관중들까지 휘말릴지도 모른다.
인명피해가 예상되는 위험한 상황.
“다들 피해! 뭘 멍하니 있어!”
이미 술식을 마친 터라 막기엔 늦었다.
서둘러 사람들을 대피시키려는데 가웬의 지팡이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아, 끝났다.’
저건 막지 못한다.
지팡이를 내리는 순간, 살을 찢는 돌풍이 지크는 물론 지켜보던 관중들까지 덮칠 것이다.
“실드! 실드라도 펼쳐서 방어해라!”
다급한 외침 속에 거대한 마력의 폭풍이 덮치려던 그 순간.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모여 있던 마력이 급속도로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니 지팡이를 휘두르려던 가웬이 별안간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이 새끼 미쳤네. 사람들이 다칠 뻔했잖아.”
주먹을 말아쥔 지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