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47화
‘말록이 직접 찾아왔다고?’
연락하라고 건넨 통신구는 어쩌고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그것도 말도 없이.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든다.
동시에, 발루두크의 경고가 머리를 스친다.
-말록과 연락이 안 되고 있네. 꼬리를 잡혔을 가능성이 있어.
녹스가 매서운 눈으로 에반을 노려봤다.
“손님이 그림자의 달이라니. 잘못 본 거 아니야?”
“아, 아닙니다. 얼마 전에도 봤는데 그것 하나 기억 못 하겠습니까? 분명히 그림자의 달이었습니다.”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지만 녹스는 반대로 의구심이 짙어진 얼굴이다.
‘검은 달의 수장이 말도 없이 찾아왔을 리는 없다. 발루두크의 말대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어쩌면 찾아온 상대는 진짜 수장이 아닐 수도 있다.
얼굴을 바꾼 가짜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형상 변형 스크롤은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이지만, 검은 달의 수장을 죽이고 탈취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기에.
“어떡할까요? 녹스 님.”
“일단 기다리라고 전해라. 접대실로 데려가서 차 한잔내어주고.”
“예.”
명령을 받은 에반이 사라지자, 녹스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에반이 나간 문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정체가 누군진 몰라도 굳이 부딪칠 이유는 없다.’
녹스는 이대로 뒷문으로 몸을 피할 심산이었다.
9서클이자 독에 관해선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그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혹시 모르지 않는가?
왕실 친위대가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을지도.
‘친위대든 뭐든 죽여 버리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랬다간 내 존재가 알려지고 말 테니 피하는 편이 좋겠지.’
자신은 알비츠 왕국 소속으로 이곳에 없어야 하는 존재.
존재가 밝혀지는 것만으로도 준비한 계획이 틀어질 수 있다.
안 그래도 증거들을 파기하고 몸을 사리라는 발루두크의 명도 있었고.
‘모양새는 좋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몸을 피하는 수밖에.’
물질적인 증거는 모두 없앴다.
남은 건 납치해서 수족으로 부리던 이곳의 평민들.
‘평민들은 발루두크가 알아서 뒤처리하겠지.’
일단은 몸부터 피하자.
끼익-
뒷문을 연 녹스가 주변을 살핀 뒤 골목으로 빠져나왔다.
텔레포트를 쓰면 간단하겠지만 한동안 마력의 흔적이 남는다.
하려거든 남들의 이목이 없는 하수도에서 사용해야 한다.
이런 곳에서 자신의 마력 패턴이 발견되면 곤란하다.
그런 생각으로 인비저빌리티를 쓰고 움직이려던 녹스였지만.
‘음?’
정작 실행에는 옮길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마법이…….’
이유는 모르지만, 마력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흩어지고 있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그때였다.
저벅- 저벅-
골목 안으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녹스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상대는 자신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말록?’
검은 달의 수장. 아니, 수장으로 위장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뒷문으로 나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누구냐? 뭔데 남의 행세를 하는 거지?”
“오, 대단한데? 바로 간파해버린 거야? 12인의 선구자라는 명성이 괜한 건 아닌가 봐?”
‘내 정체를 알고 있어?’
누군지 몰라도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
게다가 말록으로 위장한 채로 다가오고 있다.
녹스가 자신의 편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누구냐? 혹시 발루두크가 보냈나?”
“예상대로 발루두크와 연관이 있었네?”
녹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아까부터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기 말만 중얼거리고 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삽시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녹스의 마력이 골목 일대를 집어삼켰다.
가히 폭력적인 마력.
“대답해라. 누구냐고 물었다.”
“누군지 말하면? 알기나 해?”
“…….”
순간 녹스의 얼굴에 황당함이 물들었다.
‘내 정체를 알면서 쫄지 않는다고?’
도대체 무슨 깡으로 자신에게 말대답하는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은 무려 일인 군단이라 불리는 12인의 선구자인데.
‘8서클인 검은 달의 수장도 굽실거리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저놈은 위축되는 기색이 전혀 없어. 나 따위는 겁나지 않는 듯.’
그 사실을 깨닫자, 녹스도 조금은 상대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쫄지 않는 걸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
일단은 대화로 적인지 아군인지부터 판별하는 게 우선이다.
“누가 보냈어?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다짜고짜 덤빌 줄 알았는데 안 그러네?”
“끝까지 내 질문엔 대답하지 않는군.”
“대답할 필요가 없으니까.”
“…….”
녹스는 여전히 어처구니가 없었다.
솔직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신에게 대드는 사람이라곤 같은 급의 12인의 선구자 말고는 없었기에.
‘뭐 하는 놈인지 몰라도 죽여야겠군.’
아군이었다면 진즉에 정체를 밝혔을 것이다.
발루두크가 말도 없이 사람을 보냈을 리도 없고.
그런 판단을 내리기 무섭게.
녹스의 손아귀에서 마력이 형성됐다.
독 마법의 대가인 그였기에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암살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포이즌 미스트(Poison mist).’
무색무취의 독 안개가 녹스의 손으로부터 피어 나와 골목 일대를 장악했다.
녹스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이쯤이었다.
전혀 눈치를 못 했는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상대였으니까.
“정체는 모르지만 비켜라. 갈 길이 바쁘다.”
그리 말하며 지나치려는 녹스였다.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골목을 막고 서 있었다.
“누가 비켜준대?”
“……?”
이미 쓰러져야 마땅한 녀석이 멀쩡하게 서 있다?
녹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왜 아직도 쓰러지지 않는 거야? 독 안개가 이미 온몸에 스며들었을 텐데?’
안개가 호흡기로 들어가자마자 반응이 와야 하는 게 정상이다.
저렇게 평온한 얼굴로 버틸 수 있는 성질의 독이 아니다.
상대의 실력을 모르니만큼 처음부터 강력한 독으로 뿌렸으니까.
‘그런데 왜……?’
시간이 지날수록 녹스의 얼굴은 당황으로 물들었다.
현재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포이즌 미스트? 이거 뭐 하는 마법이야? 딱 봐도 위험한 독 마법 같은데.”
‘내 마법을…… 간파했어?’
포이즌 미스트는 무색무취의 형태라 소리 없는 살인자라 불리는 궁극의 마법.
그런 마법을 간파한 것도 모자라 평온한 얼굴로 서 있기까지 한다고?
녹스의 입이 벌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누구냐? 뭐 하는 놈인지 정체를 밝혀라.”
“내가 누군지가 그렇게 궁금해? 그럼 보여주지.”
상대가 비로소 형상 변형 마법을 지웠다.
곧이어 말록이 아닌, 다른 얼굴이 드러났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녹스는 내심 놀랐다.
상대는 고작해야 1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으니까.
“됐지? 이게 내 본모습이야. 누군지 알아보겠어?”
“…….”
‘모르는 얼굴이네. 하긴 알 리가 없지.’
형상 변형 마법을 푼 지크는 녹스를 보며 픽 웃음 지었다.
자신이 아무리 3대 마법 명가라 불리는 맥러플린 가문의 자제라지만 어디까지나 데칸 왕국 내에서의 서열.
대륙에서 위엄을 떨치고 있는 12인의 선구자로선 알아볼 리가 없다.
무엇보다 녀석은 다른 걸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내 독 마법을 어떻게 버틴 거냐? 설마 성녀의 축복을 받은 것이냐?”
“참나. 정작 정체를 밝혔더니 다른 걸 궁금해하고 있네?”
한숨을 쉰 지크가 대답은 하지 않고 시야에 뜬 메시지를 바라봤다.
[시전된 마법 ‘포이즌 미스트’를 흡수합니다.]
[스킬의 숙련도가 120 증가하였습니다.]
[7성 성취까지 남은 숙련도 14,860/30,000]
[마법 ‘포이즌 미스트’를 차원의 틈새에 저장하였습니다.]
[저장한 마법 1/7]
[제한 시간 내에 마법을 방출할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 00:09:34]
‘뭔지 몰라도 엄청난 마법이네. 숙련도가 120이나 오른 걸 보면.’
마법 한 번 흡수하는데 120이나 오른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마법의 종주인 카르볼조차 그렇게는 못했다.
물론 마력석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거겠지만.
‘숙련도가 90을 넘길 수 있다? 좋은 사실을 알았네.’
일단은 놈을 제압해서 아버지에게 넘겨야 한다.
그것이 지크에게 뜬 새로운 퀘스트였으니까.
“네 이름, 녹스 베노마이어 맞지? 뭐, 포이즌 미스트라는 고급 독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보면 확실하겠지만.”
“…….”
“적국이라 할 수 있는 알비츠 왕국의 인물이 여긴 왜 있는 걸까? 그것도 쥐새끼처럼 몰래 들어와서는.”
지크는 주먹을 뚜두둑 풀며 녹스에게 접근했다.
“네가 뭘 꾸미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나랑 같이 가줘야겠어. 이것저것 조사해 볼 것이 있거든.”
“미친 새끼가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이고 있구나. 내가 순순히…….”
“순순히 잡힐 거야. 바로 지금.”
말을 끊은 지크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마법을 쓴 녹스였다.
펑-!
작은 폭발과 함께 녀석이 한순간에 연기를 뿌리고 사라졌다.
투명화처럼 모습을 감춘 건지, 뭔지는 몰라도 한가지는 분명했다.
[시전된 마법 ‘배니쉬 위드 포이즌’을 흡수합니다.]
[스킬의 숙련도가 120 증가하였습니다.]
[7성 성취까지 남은 숙련도 14,980/30,000]
[마법 ‘배니쉬 위드 포이즌’을 차원의 틈새에 저장하였습니다.]
[저장한 마법 2/7]
[제한 시간 내에 마법을 방출할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 00:09:59]
‘뭐야? 그냥 연기가 아니라 독이었어?’
지크는 당황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단순한 도주기인 줄 알았는데 고맙게도 공격 마법이었다.
‘무슨 마법인지는 써봐야겠지?’
지크가 원하는 마법을 떠올리며 속으로 시동어를 외웠다.
‘방출.’
곧이어 지크의 몸이 독 안개를 뿌리며 사라졌다.
10m 떨어진 지점에서, 투명화 상태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녹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놈이 어떻게……?’
자신과 똑같은 마법을 사용했으니까.
하지만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아하, 이런 마법이었구나?”
지크가 턱-하고 녹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투명화 상태로 있던 녹스가 귀신이라도 본 듯 식겁했다.
“무슨 마법인가 했더니 투명화가 되면서 독 안개를 뿌리고 원하는 지점으로 10m를 이동하는 마법이었어. 맞지?”
“네, 네놈! 어떻게 내 위치를…….”
“어떻게 알았냐고? 그냥 봐도 보이는데?”
지크의 말에 녹스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어느새 투명화가 해제되고 온몸이 드러나 있었다.
‘어, 언제 마법이 해제된 거지? 아니, 그보다 난 해제한 기억이 없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강제로 투명화가 풀렸다.
녹스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크는 내내 여유로운 표정이었지만.
“과연 9서클답게 무영창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네?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응하지도 못했겠어?”
“…….”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녹스는 도망갈 생각도 잊고 있었다.
‘아, 얼른 자리를 떠야…….’
다시금 마법으로 이동하려던 녹스였지만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마력이 갑자기 차단되기라도 했는지 모이지 않았으니까.
‘젠장! 아까도 이러더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구속구를 찬 것도 아닌데 마력이 모이지 않는다.
상대는 어찌 된 게 독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고.
‘게다가 내 마법을 똑같이 따라 했어.’
그 말은 상대 또한 자신과 같은 9서클이라는 뜻.
아마 소년의 모습도 진짜가 아닌 방심을 끌어내기 위한 위장에 불과할 거다.
‘큰일이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아.’
애써 당황을 감춘 녹스는 물리적인 힘을 써서라도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녹스는 몰랐다.
“뭐해? 도망가려고?”
“…….”
힘으로는 절대로 눈앞의 소년을 당해낼 수가 없다는 걸.
“안 됐지만 넌 잡혔어. 내가 아까 말했잖아. 잡을 거라고.”
어린아이처럼 붙들린 신세가 된 녹스가 커진 동공으로 지크를 바라봤다.
흡사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숨 자.”
곧이어 날아온 지크의 주먹에.
뻐억-!
녹스의 시야가 암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