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48화
제라드는 생각했다.
요즘 들어 부쩍 당황스러운 일이 많이 생긴다고.
“……이 사람이 누구라고?”
“녹스 베노마이어입니다. 들어보셨죠? 12인의 선구자 중 극독의 선구자라 불리는…….”
지크가 설명을 이어갔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눈초리로 기절한 사내를 내려다볼 뿐.
“잠깐 확인 좀 해보마.”
제라드는 녹스라는 자의 손목에 마나를 흘려보았다.
‘가슴에 아홉 개의 고리가 있다. 9서클의 강자야.’
녹스 베노마이어가 맞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자신보다 강한 9서클의 대마법사다.
그런 사람이 왜 기절해 있단 말인가?
그것도 지크의 손아귀에 붙들려서.
“달란트.”
“…….”
“달란트!”
“…예, 예!”
“구속구를 채운 뒤 이 자를 왕실 지하 감옥에 가두거라. 가면서 스승님도 데려오고.”
“알겠습니다.”
자신의 눈에도 황당한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달란트가 녹스를 데리고 나갔다.
탁-
집무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제라드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후우, 지크. 갑자기 나타나서 이게 뭐란 말이냐? 정말로 저자가 극독의 선구자라고?”
“네. 아버지. 독 마법을 쓰는 걸 보면 확실해요. 검은 달의 수장이 정보를 주기도 했고요. 아 참! 검은 달의 수장은 잘 받으셨죠?”
“받았지. 브라이언트 백작과 메리에게서 사정도 전부 들었고.”
“그렇다면 전후 사정은 설명할 필요 없겠네요.”
싱긋 웃는 지크였지만 제라드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지크. 네가 무영창까지 사용하는 드래고니안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무모했다. 마법을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검은 달의 수장을 잡아 오다니? 그것도 모자라서 극독의 선구자까지 직접 잡으려고 나서? 만약 일이 잘못됐으면 어쩔 뻔했느냐?”
“결국엔 잘 됐잖아요.”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이… 후우…….”
쏘아붙이려던 제라드는 천진난만한 얼굴의 아들을 보며 화를 가라앉혀야 했다.
잡아 온 인물이 정말로 극독의 선구자라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셈이니.
‘만약 나였다면…… 극독의 선구자를 잡을 수 있었을까?’
자문해 봤지만 돌아온 답은 부정적이었다.
드래고니안인 지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극독의 선구자를 데려오다니. 정말로 경이로운 재능이구나. 드래고니안이라는 것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겉으론 근엄함을 유지했다.
지금은 아들을 훈계하는 아버지를 연기해야 했기에.
“다음부턴 뭘 할 건지 적어도 언질이라도 주거라. 이렇게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막무가내로 행동했죠?”
“말이라고 하느냐? 하마터면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
‘그 정도로 위험하진 않았는데.’
대꾸하고 싶었지만, 지크는 꾹 참았다.
제라드는 지크에게 마법을 차단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모른다.
오러 마스터 급의 실력자라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마법에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을 깨우친 특이한 존재로만 알 뿐이다.
그러니 이렇게 걱정할 수밖에.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반성하는 연기가 통했는지, 제라드는 이후로 잔소리다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시금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을 뿐.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예. 멀쩡해요.”
“내 아들이 혼자서 검은 달의 수장과 극독의 선구자를 잡아 오다니. 세상 어느 누가 이 말을 믿을까. 허허허.”
화를 내긴 했지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니 아들이 은근히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메리에게 들으셨겠지만, 극독의 선구자는 암살을 위한 독약을 만들고 있었어요. 왕실의 누군가를 독살할 계획인 거예요. 그 이상은 모르겠지만…….”
“그래, 자세한 건 내가 녀석을 심문해서 알아보도록 하마. 그러니 너는 당분간 이 일에서 물러나 있거라. 사단장의 권한으로 며칠간 휴식 시간을 줄 터이니.”
“알겠어요. 아, 그리고 녹스는 가능하면 아버지가 잡은 걸로 해주세요. 아직은 제 힘을 드러내기엔 너무 이른 것 같아서요. 주목받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야 당연하지. 사실대로 말한들 누가 믿겠느냐? 네 말대로 손을 써두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지크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 모습을, 제라드가 걱정과 자랑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어이가 없네, 정말.’
녹스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그럴 만한 게 12인의 선구자라는 명성으로 자자한 자신이 이깟 구속구와 철창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으니 어찌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녹스를 어이없게 만드는 건 자신을 이렇게 만든 소년이었다.
‘대체 뭐 하는 녀석이길래 독이 전혀 먹히지 않지? 내가 개발한 독 마법은 어떻게 사용한 거고?’
의문이 가득했으나 그보다는 감옥에 갇힌 지금이 문제였다.
‘보아하니 데칸의 궁정 지하 감옥 같은데…….’
비싼 구속 철창으로 도배된 걸 보면 확실하다.
‘젠장. 마법을 전혀 쓸 수가 없어. 어떻게 빠져나간다?’
이럴 때는 발루두크가 참 부럽다.
구속구에 영향이 없는, 악마의 술법을 사용할 수 있었으니.
녹스가 불안감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을 때였다.
“녹스 베노마이어.”
누군가의 부름에 고개를 들자, 조금은 눈에 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네놈은…… 맥러플린 가문의 가주구나.”
“그 유명한 12인의 선구자께서 날 알아보다니.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허헛.”
웃음 짓는 제라드를 향해 녹스가 찢어발길 듯 눈을 부라렸다.
서클이 낮은 상대에게 비웃음당하기엔 자존심이 상했기에.
“고작해야 8서클밖에 안 되는 애송이 주제에 마법 명가라니. 데칸 왕국이 왜 약소국인지 이해가 되는군.”
“그러는 네놈은 15살밖에 안 된 소년에게 당하지 않았나? 명성이 아깝군. 아까워.”
“…….”
조롱을 당했지만, 사실이라 할 말이 없다.
“그 소년은 누구지? 정체가 뭐냐?”
“질문은 내가 한다. 알비츠 왕국의 유명인사가 우리 왕국은 무슨 일로 기어 들어왔지?”
“…….”
“대답하지 않겠다? 뭐, 그럴 줄 알고 이미 준비한 게 있지.”
제라드의 눈짓에 간수 세 명이 나타났다.
손에는 기다란 꼬챙이를 들고 있다.
“고문할 셈인가?”
“기회를 줄 테니 목적을 말해라.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지?”
“마음대로 해봐라. 내가 입 하나 벙긋하나.”
녹스는 강하게 나갔다.
적국에 정보를 털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놈들이 왕국에 충성하는 만큼 녹스 또한 알비츠 왕국에 헌신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지, 제라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 끝난 마당에 피차 힘 빠지게 하지 말고 말하지 그러나?”
“…….”
“입을 열지 않을 생각이라면 어쩔 수 없군. 시행하라.”
“예!”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푸푸푹!
세 개의 꼬챙이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녹스의 몸을 꿰뚫었다.
그럼에도 녹스는 눈만 부릅뜰 뿐,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레고르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고통을 마비시키는 독이라도 복용했나? 허…….’
제라드는 직감했다.
녀석을 굴복시키는 게 쉽지 않겠다는 것을.
* * *
검은 달의 수장, 말록 피어스.
그가 입을 열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샤아아아-
지크의 손에서 나온 빛이 말록의 터져버린 고간을 원상 복구시켰다.
가히 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
그동안 의심하던 말록의 얼굴에 햇살 같은 희망이 번졌다.
아무런 느낌도 없던 바지 아래에 묵직한 것이 자리 잡았으니까.
“자, 원래대로 고쳐줬지? 이제 내가 묻는 말에 전부 불어. 안 그러면 다시 고자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말하지……. 궁금한 게 있으면 전부 물어봐라.”
소중한 것을 되찾은 말록은 그 이후로 무척이나 협조적이었다.
지난날을 회상하던 지크가 방에서 혼자 피식 웃음 지을 정도로.
‘그거 하나 복구시켜 줬다고 고급 정보까지 술술 불어버리다니. 고자가 되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모양이야.’
지크가 말록에게서 뽑아낸 정보는 세 가지였다.
1. 독약을 개발한 사람은 12인의 선구자 중 한 명인 녹스 베노마이어라는 점.
2. 녹스 베노마이어의 위치.
3. 발루두크가 아공간을 쓰고 악마의 술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
여기서 세 번째 정보를 듣고 좋아한 건 자신이 아닌 카르볼이었다.
-발루두크란 녀석을 찾으면 리치 드래곤과의 연관성을 알아낼 수 있겠군! 아공간은 리치 드래곤만이 쓸 수 있는 악마의 술법이니!
리치 드래곤을 찾으면 다른 드래곤의 생사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기대를 가지는 카르볼이었지만 지크로선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은 퀘스트에 여념이 없었으니까.
【메인 퀘스트 : 녹스 베노마이어를 제라드에게 넘겨라!】
└이곳 데칸 왕국에 알비츠 왕국의 선구자인 녹스 베노마이어가 들어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녹스 베노마이어를 찾아내 제압한 뒤 제라드 맥러플린에게 인계하십시오.
<조건>
└녹스 베노마이어 제압 후 제라드 맥러플린에게 인계
<보상>
└스킬 ‘사냥꾼의 감각’ 획득
└아이템 ‘극독의 조끼’ 획득
말록에게서 정보를 듣자마자 이러한 퀘스트가 떠올랐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수락한 지크는 그 뒤로 말록을 기절시켰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말해주라고 메리에게 지시한 뒤, 자신은 녹스를 찾으러 떠났다.
그것이 여태까지 벌어진 일이었다.
‘다행히도 일은 잘 풀렸어. 뭐, 내 능력을 믿고서 움직인 거지만.’
12인의 선구자라고 해도 결국엔 마나를 이용하는 마법사일 뿐이다.
남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일지언정 마법사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자신 앞에선 한낱 범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보상을 확인해 봐야겠지?’
이때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퀘스트 보상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30분 전에 녹스를 제압해 아버지에게 인계했으니 슬슬 들어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녹스 베노마이어 제압 후 제라드 맥러플린에게 인계 완료!]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첫 번째 보상으로 새로운 기본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두 번째 보상으로 아이템이 지급되었습니다. 아이템은 아공간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상대가 상대라 그런지 이번에 들어온 보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태의 메인 퀘스트가 그랬듯 스킬이 주어졌다.
[기본 스킬 : 사냥꾼의 감각]
-효과 : 주변의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이사항 : 스킬의 On/Off가 가능하며, 원하는 대상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스탯의 총합에 따라 범위가 늘어납니다.
처음 보는 스킬이지만 꽤 유용해 보이는 스킬이다.
‘배운 김에 써볼까?’
스킬을 쓰겠다고 마음먹자마자, 지크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주변의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이 하나하나 느껴진다.
‘미쳤는데? 범위가 반경 280m는 되는 거 같아!’
놀라운 경험을 한 지크였지만 계속 켜두기엔 무리가 있는 스킬이었다.
280m 내의 모든 움직임이 느껴지니 머릿속이 금세 혼란스러워졌다.
복잡한 시장통에 던져진 느낌이랄까?
정보 과부하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훈련이 필요해 보인다.
‘휴우. 이건 시간 날 때마다 적응해 보기로 하고…… 두 번째 보상을 볼까?’
두 번째 보상은 황당하지만 아이템이었다.
‘전생에선 아이템 같은 게 없었는데…… 아공간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했지?’
게임으로 치면 인벤토리에 아이템이 들어온 셈.
즉시 아공간을 열어보니 못 보던 조끼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극독의 조끼]
-분류 : 상의
-효과 : 모든 독과 독 속성 마법에 면역, [배니쉬 위드 포이즌] 사용 가능.
-내구력 : 무한
-사용 제한 : 지크 맥러플린 귀속
-설명 : 극독의 선구자가 사용했던 조끼. 총 13개의 아이템이 존재하며 세트 효과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선구자의 의복 세트 효과 (1/13)
-4세트 효과 : ?????
-7세트 효과 : ?????
-10세트 효과 : ?????
-13세트 효과 : ?????
‘이거 뭐야? 진짜 아이템이야?’
일견 평범해 보이는 조끼였지만 만지면 시스템창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아마도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리라.
‘와아. 이걸 입기만 하면 독에 면역이 되고 마법도 사용할 수 있어?’
[배니쉬 위드 포이즌]은 녹스가 사용하던 독 마법으로, 독 안개를 뿌리며 10m 순간 이동을 하는 마법이었다.
‘이동기로 쓸 수도 있고, 투명화 기술까지 있으니 엄청나게 쓸 만할 거야.’
즉시 조끼를 입으니 기본 스킬 목록에 ‘배니쉬 위드 포이즌’이란 이름이 박힌다.
‘아이템이라는 거, 좋은데?’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좋다.
게다가 설명을 보니 세트 효과까지 있다.
‘세트 효과를 최대로 얻으려면 13개를 모아야 하네?’
그렇다는 건 적어도 주어질 아이템 보상이 12개는 남았다는 뜻.
지크의 입가에 스르르 미소가 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 그런데 세트 효과 이름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선구자의 의복 세트 효과?’
설마 12인의 선구자를 모두 제압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왜 12개가 아니라 13개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정말로 선구자를 잡아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에이…… 설마. 시스템이 나한테 그런 짓을 시키겠어?’
애써 현실을 부정하는 지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