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49화
어둠이 깔린 비밀의 공간.
그 안에 여러 그림자가 있었다.
세상을 뒤흔들 만한 힘과 권력을 가진, 12인의 선구자.
좀처럼 모이기 힘든 그들이 다시 한번 자리를 잡았다.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문제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하아, 그 병신 새끼는 왜 잡혀가지고 사람 귀찮게 만드는 거야? 진짜?”
“내가 말했죠? 그 사람 정신적으로 이상해 보인다고. 하여간 처음 볼 때부터 기분 나빴다니까.”
“그 새끼는 원래 그래. 애 자체가 원래 음침해.”
“그런 멍청한 녀석이 우리 중 서열 7위라니. 어디 가서 같은 선구자라고 말하기 쪽팔리네요.”
“내 말이.”
그들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극독의 선구자, 녹스였다.
이미 궁정 내부의 첩자를 통해 극독의 선구자가 붙잡혔다는 정보를 들은 그들이었으니까.
“그런데 누가 잡은 거야? 녹스를 제압할 정도면 꽤 알아주는 실력자일 텐데.”
“설마 왕실 친위대가 나선 건가?”
“데칸의 왕실 친위대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어요?”
“이건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오망성이 나선 건……?”
“그들이 나선다고 녹스를 잡을 수 있을 리 없죠.”
“왜 없어? 다른 건 몰라도 독에 어느 정도 내성을 가진 녀석들 아니야? 놈들이 자랑하는 그 오러로.”
“아무리 그래도 오러 유저 따위가 9서클 마법사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애당초 오망성이 데칸 왕국을 지원한다는 것 자체도 말이 안 돼요.”
“맞는 말이다. 5군주가 나섰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어. 괜히 헛다리 짚지 마라. 그나저나…….”
서열 3위인 무표정의 사내가 목소리를 깔았다.
“잡담은 이쯤하고, 대책을 세워야지. 누구 좋은 의견 없나?”
녹스를 깎아내리기 바빴던 일대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누구 하나 대책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발루두크 말고는.
“크흘흘, 이것들 머릿속에 대책이 들어 있을 리가 없지. 다들 자기 일 아니라고 뒷짐만 지고 있던 녀석들인데.”
“영감! 지금 당신이 영입한 녹스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거 아니야!”
“조용하거라, 애송아.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버릇없이 굴었다간 평생 얼음과자를 못 먹게 만들어줄 테니.”
“하! 자기 잘못은 생각 안 하고 남한테 화풀이야!”
투덜거리는 청년이었지만 더는 발루두크에게 덤비지 않았다.
서열 2위의 위엄은 괜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나저나 그분은 오늘도 불참한 겐가?”
“일이 있어 못 오신다 들었다. 그건 그렇고 발루두크.”
사내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발루두크를 쳐다봤다.
“에탄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계획을 짠 건 다름 아닌 그대가 아닌가?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지?”
“우리 철남자가 간만에 옳은 소리 하네!”
청년과 사내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발루두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흘흘, 다들 극독의 선구자가 잡혔다는 소식에 자신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은데…… 너무 걱정하진 마시게. 당연히 그에 대한 대책도 세워놨으니.”
“그러니까 그 대책이 뭔지 말해보라고, 얼른.”
“원, 성격이 이리 급해서야.”
느긋한 어조로 말하던 발루두크가 대책이란 것을 꺼냈다.
“왕실에는 두 명의 첩자가 있지. 궁정 마법사단에도 메리라는 계집이 도와주고 있고, 또 코렐 쉐도우의 위장도 들키지 않았어. 녹스를 빼낼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소리지.”
“예정했던 암살은? 취소할 계획인가?”
“원래는 그럴 계획이었다만, 녹스가 붙잡힌 이상 이제는 조용히 진행할 필요가 없지. 계획을 강행한다.”
“그런데 녹스를 정말로 탈옥시키려고?”
“그 새끼 그냥 죽게 내버려 두면 안 되나?”
발루두크는 고개를 저었다.
“녹스에겐 금제가 걸려 있지 않다. 그레고르 때처럼 뒤처리하기는 힘들어.”
“그럼 어떡해? 녹스가 우리에 대해 다 불어 재끼면 끝나는 거 아니야?”
“그건 걱정할 거 없다. 녀석은 그래 봬도 알비츠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 같잖은 고문에 입을 열 녀석이 아니지.”
사내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발루두크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녹스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첩자를 이용해서 꺼내주기를.”
“그럼 문제 될 게 없네.”
“하지만.”
말을 끊은 발루두크가 돌연 미소를 지었다.
“혹시 모르니 만일을 대비해야겠지. 크흘흘.”
* * *
선구자들의 회의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온 발루두크는 통신구를 집어 들었다.
불빛이 몇 번 번쩍이더니 이내 상대방과 연결됐다.
-아, 발루두크 님.
“계획을 속행하기로 했다. 이른 시일 내에 코렐과 접선하도록. 녀석은 지금 지크 맥러플린의 모습으로 위장한 상태니까.”
-알겠습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차례 고비를 넘긴 발루두크가 긴 한숨을 쉬었다.
“병신 같은 새끼 같으니. 내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그렇게 얘기해 줬건만, 그걸 잡히고 말아?”
이미 잡힌 녹스를 향해 욕설을 내뱉던 발루두크는 한 가지 의아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왕실 친위대가 녹스를 붙잡을 수 있었던 거지? 아무리 그래도 녀석의 독에 대한 대책은 없을 터인데…….”
극독의 선구자가 감옥에 갇힌 이유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 유명한 오망성이 모두 달려들어도 녹스를 제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녹스의 위치를 알았다면 말록에게서 정보를 얻은 것일 터. 하루라도 빨리 암살을 진행해야 한다.”
발루두크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 * *
-지크, 이제 어떡할 거냐? 발루두크라는 놈을 어떻게 찾을 거지?
‘아 쫌. 기다려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자신을 닦달하는 드래곤의 영혼을, 지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물렸다.
하루라도 빨리 발루두크를 찾길 바라는 카르볼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왕실에 정말로 첩자가 있다면 녹스가 감옥에 갇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거야. 그걸 발루두크에게 보고했을 테고.’
따라서 발루두크는 최대한 빨리 계획을 속행하려고 들 것이다.
궁정의 누군가에게 독약을 사용할 계획을.
이미 잡혀버린 마당이라면 거리낄 것도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첩자가 누군지부터 알아봐야 하는 게 순서 아니겠느냐?
‘그게 말처럼 쉽겠어? 첩자가 자기 이마에 첩자라고 써 붙인 것도 아니고.’
물론 감옥에 갇혀 있는 녹스를 고문한다면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그쪽에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았다.
‘아버지가 녹스를 고문해 정보를 빼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쉽지 않겠지. 쉽게 입을 열 만한 놈이었으면 12인의 선구자라는 자리에도 오르지 못했을 테니까.’
-그럼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 것이냐?
‘계획이라면 한 가지가 있긴 한데…….’
-어떤?
‘내가 나서는 거지. 알렉스 때처럼.’
알렉스에게서 증거를 끌어내기 위해, 지크는 손수 검은 달의 암살자로 위장하고 알렉스에게 접근했었다.
지크가 떠올린 방법은 그때와 비슷했다.
‘발루두크는 아직 코렐 쉐도우가 죽었다는 걸 모르고 있어. 메리도 여전히 협박을 받는다고 여길 테고. 그러니 나를 코렐이 위장한 가짜라고 생각하겠지. 진짜 지크가 아니라.’
-그렇다면……?
‘그래. 조만간 왕실의 첩자가 나한테 접근할 거야. 암살을 지시하기 위해.’
즉, 지크는 그저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첩자가 알아서 자신에게 접근해 올 테니.
그때,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면 된다.
지크로 위장한 코렐 쉐도우인 척.
이미 놈들의 계획을 대략 알고 있으니 연기가 어렵진 않으리라.
지크도 연기하는 데는 나름대로 자신 있었고.
‘메리에게도 첩자인 척 행세하라고 말을 해놨으니까 계획에 문제는 없어.’
메리야 애당초 철저한 연기파였으니 들킬 걱정은 하지 않는다.
문제는 놈들이 언제 접근하느냐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밝히느냐다.
‘흐음. 아무래도 말을 해야겠지?’
혼자서 진행하기엔 일이 커지고 있다.
“설마 위험하니까 빠지라고 하진 않으시겠지?”
지크가 조금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 * *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다! 모두 고생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궁정 마법사단의 훈련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지크는 평소처럼 방으로 들어가 숙련도를 올릴 생각으로 걷고 있었다.
의문의 사내가 접근하기 전까지는.
“지크 맥러플린이시죠?”
“예, 누구십니까?”
“반갑습니다. 코렐 쉐도우라고 합니다.”
지크의 눈빛이 단박에 변했다.
상대가 코렐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안다.
코렐이 죽는 순간을 두 눈으로 목도했으니까.
변화를 눈치챘는지 상대 또한 눈빛이 달라졌다.
말투 역시도.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지.”
지크는 끄덕이며 확신했다.
‘첩자다.’
조금 있으면 첩자가 접근할 거라는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자연스럽게 연기하면 돼. 자연스럽게.’
기숙사에는 사감이 지키고 있었기에 인근 골목으로 안내했다.
그러자 녀석이 본색을 드러낸다.
“물건은?”
“가지고 있습니다.”
“보여봐라.”
이럴 줄 알고 품에 가지고 있던 지크가 조심스레 약병을 꺼내 보였다.
녹스가 제조한 독약이었다.
“맞군.”
“이제 계획이 뭡니까?”
지크가 알기로 코렐 쉐도우는 위장까지만 계획을 전달받았다.
그 이후는 모르기에 자연스러운 물음이었다.
상대도 그래서인지 의심하는 낯빛이 아니다.
“자세한 건 모르는 게 약이다. 너는 시키는 일만 하면 돼.”
“뭘 하면 됩니까?”
“나 말고 궁정 내부에 첩자가 한 명 더 있다. 요리사인데, 시간과 접선 포인트를 알려줄 테니 그를 만나서 물건을 전해줘라.”
“그게 끝입니까? 요리사에게 이 물건을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 나머지는 그 녀석이 알아서 할 거다. 그런데…….”
갑자기 첩자가 지크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정말로 지크 맥러플린이 마법사단의 실세가 맞느냐?”
“맞습니다. 지금 마법사단도 그렇고 궁정 내부에 소문이 파다할 텐데요?”
“그건 그렇다만……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말이지. 15살밖에 안 되는 소년이 벌써 6서클의 경지에 올랐다니. 게다가 무영창은 또 뭐야? 어처구니가 없어선.”
무영창을 할 수 있었지만, 상대는 그저 부풀려진 헛소문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가웬 발도르를 대련에서 꺾은 것만은 확실합니다. 메리도 보증했고요.”
“그년이 보증했다면야 더 물을 필요는 없군.”
찰나지만 지크가 눈을 빛냈다.
‘처음 만나는데도 메리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 말은 코렐 쉐도우의 임무가 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군.’
말하자면 이 새끼도 살려둬선 안 되는 놈이었다.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말입니다…….”
“제시 가너. 가너라고 불러라.”
[현재 바라보는 대상이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지를 본 지크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제시 가너. 좋은 이름이네요. 그런데 가너 님께선 무슨 임무를 맡고 계십니까?”
“쓸데없이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제가 궁금한 건 또 못 참거든요. 하하.”
“알아서 좋을 거 없다.”
쉽게 입을 열지 않자 순간 지크의 주먹이 울었다.
‘그냥 패버릴까?’
아니다.
아직 약속한 장소와 시간을 말하지 않았지 않은가?
고문해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독약으로 누구를 독살할 계획입니까?”
“질문이 많구나?”
“말했듯이 궁금한 건 못 참아서요.”
“알아서 좋을 거 없다니까?”
“그래도 타깃을 알고 있는 편이 변수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끈질긴 물음에 가너가 빤히 지크를 쳐다봤다.
지크는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듯, 혼신의 표정 연기를 펼치고 있었고, 다행히도 그것이 먹혀들었는지.
“뭐, 타깃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가너가 입을 열었다.
“독살 대상은 쉐인 2세다.”
[현재 바라보는 대상이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국왕… 이라고?’
지크의 눈동자가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