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54화
맥러플린 가문에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부인 크리스티나 맥러플린.
둘째 부인 데이나 맥러플린.
일부다처제가 지배적인 판게아 대륙이었지만 그렇다고 두 부인의 관계가 좋을 리는 없었다.
정실인 크리스티나로선 첩으로 들어온 데이나가 못마땅하기 마련.
남편인 제라드의 결정을 존중했기에 그동안 참고 지낸 크리스티나였다.
그러나 그것도 여기까지다.
“가슴을 너무 꽉 조였잖아! 이러다 숨넘어가면 책임질 거야?”
“죄, 죄송합니다.”
히스테릭한 반응에 등 뒤에서 벨트를 조이던 시녀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가.”
“예?”
“말귀 못 알아먹어? 나가라니까?”
“네, 죄, 죄송합니다.”
시녀가 물러서자 크리스티나의 표독스러운 눈길이 다른 시녀들에게 향했다.
“너희는 안 나가고 뭐 해? 전부 꺼지라고!”
“예, 예에…….”
“그, 그럼 이만…….”
불똥이 튄 시녀들은 황급히 머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요즘 들어 크리스티나의 시중을 들기가 불편한 시녀들이었다.
툭하면 별것도 아닌 일로 짜증을 부리기 일쑤였으니까.
하지만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주인마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흐흑, 우리 피터…… 알렉스…… 보고 싶구나.”
혼자 남은 방에서 아들의 초상화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크리스티나였으니까.
“왜 그런 짓을 벌였어…… 대체 왜……!”
발작하듯 소리친 크리스티나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삼공자인 알렉스야 철없는 녀석이니 그러려니 생각했다.
후계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기 형제들을 암살시키려 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정말 이해되지 않는 건 일공자인 피터였다.
“가만히 있으면 후계자 자리는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였잖아. 그런데 왜 마탑주와 손을 잡아서는…….”
마탑주인 그레고르가 반역을 꾸민다는 건 몰랐겠지만 함께 공모하여 지크를 팔아넘기려 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가주인 제라드도 그 점을 용서치 않는 것이었고.
자업자득이었으나 그 대상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점이 크리스티나로선 뼈아팠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러셀밖에 없어…….”
그러고 보니 오늘이 후계자 시험을 발표한다던 날.
크리스티나는 유일하게 남은 아들을 만나러 갔다.
똑똑-
“러셀. 문 열어 보거라.”
노크 뒤에 열린 문 앞에선 러셀이 의아한 눈을 뜨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어머니?”
“잠깐 얘기 좀 하자꾸나. 네 의중을 확실히 알고 싶어서 말이다.”
“예? 무슨…….”
무작정 안으로 들어선 크리스티나가 문을 닫으며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러셀.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
“그럼요. 아버지께서 후계자 시험을 발표하시는 날이잖아요.”
“후계자가 될 생각은 있고?”
“어머니.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그만! 관심 없다는 말은 하지도 말거라!”
“…….”
“피터도, 알렉스도 없는 내게,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라곤 러셀 너뿐이다. 그런 내게 또다시 실망만 안겨줄 셈이냐?”
“어머니…… 저도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누누이 말했듯 가주 자리는 제게 어울리지 않아요. 가문을 이끌 자신도 없고요.”
“사내로 태어났으면 모름지기 가주 자리는 차지해 봐야지. 어째 너는 욕심이 없느냐?”
“……죄송합니다.”
“그런 말이나 들으려고 온 게 아니다. 나는 확답을 듣고 싶은 게야.”
평소 같으면 적당히 하고 물러섰을 크리스티나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단단히 각오한 얼굴.
그도 그럴 것이 러셀이 포기하면 가주가 되는 건 꼴도 보기 싫은 지크다.
그것만큼은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닦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자존심을 뭉개면서까지.
“네가 할 줄 아는 게 무엇이냐? 피터처럼 재능이 있기를 하냐, 알렉스처럼 결단력이 있기를 하냐? 책만 읽고 마법 조금 배울 줄 알았지, 내세울 게 있기는 하느냐? 살면서 무엇하나 이루기를 했냐는 말이다.”
“…….”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다른 형제들 그늘에 파묻혀 있으면 편하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정신 차리거라. 너는 3대 마법 명가인 맥러플린 가문의 차남이다. 이제는 장남이나 다름없고. 명가에서 태어난 이상 절대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어. 그래서도 안 되고!”
“…….”
“지크가 후계자에 오르면 너를 가만히 놔둘 것 같으냐? 데이나 그것이 나도 그렇고 걸리적거리는 우리 가족 모두를 쓰레기 치우듯 치워 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작은어머니랑 지크가 그런 짓을 할 거라곤 상상이…….”
“아직 어리구나, 어려!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된 네가 어찌 사람 마음을 알겠느냐?”
“…….”
할 말을 잃은 러셀의 모습에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크리스티나가 휙 돌아섰다.
“후계자 자리는 너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거라. 기회를 잡을지, 이대로 패배자로 남을지.”
* * *
러셀은 한동안 어머니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솔직한 말로 후계자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그였다.
일찍이 포기해서 지크에게 넘겨줄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대화 이후로 고민이 깊어졌다.
‘어머니가 저렇게까지 원하시는데…… 후계자 시험을 치러야겠지?’
동생인 알렉스도, 맏형인 피터도 나락으로 가버린 상황에서 기댈만한 자식이라곤 오직 자신뿐.
그렇기에 저리도 강경하게 말하는 거겠지만 그럼에도 러셀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자신에겐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과연 내가 가문을 잘 이끌 수 있을까? 마법적 재능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가?’
오히려 막내인 지크가 더 어울릴 만한 재목일 거다.
이른 나이에 6서클에 이른 것은 물론 궁정 마법사단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고 들었다.
재능도 개화하지 못한 장애인이라고 비난받던 건 어디까지나 옛말이다.
그뿐인가?
반역자 색출과 국왕의 암살을 막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장 가주가 되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의 자격을 갖췄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어떠한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
‘어머니 말씀이 맞아. 살면서 뭐 하나 이룬 것이 없어. 나보다 어린 지크는 벌써 수많은 공을 세웠는데도.’
이대로면 지크가 후계자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
그렇게 되어도 솔직히 상관은 없다.
어머니의 말처럼 작은어머니와 지크가 우리 가족을 홀대할 거란 걱정도 하지 않았다.
지크를 믿었으니까.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걸 잘 아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내어줘선 안 되겠지.’
입가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도 이대로는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패배자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하는 걸 보면.
‘한 번 해보는 거야. 자신을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기엔 러셀의 심성이 약했다.
똑똑-
“이공자님.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알겠어. 금방 나갈게.”
문밖에서 들려온 시녀의 목소리에, 러셀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한 번 해보는 거다.
후계자 경쟁에.
* * *
러셀이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시각.
지크 또한 똑같은 말을 전달받았다.
“도련님.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후계자 시험 때문이겠지?”
“그건 저도 잘…….”
“알았어, 헬렌. 곧 준비해서 나갈게.”
지크는 옷매무새를 고친 뒤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걸었다.
아버지가 부른 이유야 뻔했다.
‘오늘이 약속하신 1년이 되는 날이니까.’
1년 전, 제라드는 후계자 시험의 방식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을 발표하겠다던 날이 바로 오늘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렇듯, 지크는 후계자 시험에 관심이 없었다.
떠맡아봐야 귀찮은 자리일 뿐이다.
머릿속은 이미 어떻게 거절해야 아버지를 납득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후계자 자리를 포기한다고 말하면 아버지께서 실망하시겠지. 나한테 거는 기대가 크시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서 고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가주 자리는 러셀 형님에게 맡기면 되지. 큰어머니도 그걸 바라실 테고.’
안 그래도 자신을 보는 눈이 곱지 않았던 크리스티나인데, 이번 일로 조금 화를 가라앉혔으면 한다.
‘설마 가주가 되면 러셀 형님을 시켜서 날 내쫓진 않겠지?’
크리스티나의 성품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솔직히 상관은 없다.
아니, 오히려 내쫓아주기를 바라는 지크였다.
이번에 각성한 5차 스킬의 숙련도를 쌓기 위해선 집 밖으로 나가는 게 더 도움 되니까.
‘그러니 후계자 자리를 거절하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거야. 몇 년간 외출 좀 하고 싶다고.’
이제 지크도 16살이다.
판게아 대륙에서 16살이면 혼례도 치르는 나이.
새장 밖으로 떠날 때가 되었다.
“어? 형님?”
“지크.”
아버지의 방으로 가던 지크는 문 앞에서 러셀을 만났다.
“아버지께서 둘째 형님도 부르셨어요?”
“응. 그렇지.”
“그럼 후계자 시험 때문에 부른 게 맞았네요.”
고개를 주억이던 지크가 웃으며 러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리 축하드려요.”
“응? 뭐가 말이냐?”
“사실 저는 후계자가 될 생각이 없거든요.”
“뭐?”
몰랐던 사실에 러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험이 뭐든 간에 가문은 형님이 이으세요. 그게 맞는 그림 같아요.”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예. 전부터 쭉 생각해 온 걸요.”
“하…….”
맥이 풀리는지 긴장했던 러셀의 어깨가 스르르 내려간다.
아무래도 자신과 경쟁하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던 모양.
지크는 빙긋 웃으며 러셀의 등을 다시 한번 두들겼다.
“가시죠, 형님. 아버지께서 기다리시겠어요.”
“으응, 그래.”
노크를 한 두 사람이 제라드의 허락하에 문을 열었다.
제라드가 기다렸다는 듯 웃는 낯으로 두 아들을 반겼다.
“러셀, 지크. 왔느냐?”
“부르셨어요? 아버지?”
“무슨 일로 저희를 찾으셨는지…….”
“너희도 예상했겠지만, 오늘이 바로 새로 개정한 후계자 시험을 발표하기로 한 날이란다. 그 때문에 후계자 자격을 가진 둘을 여기로 부른 거지.”
“아.”
러셀과 지크는 덤덤히 고개를 주억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시험의 내용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본론부터 말하마. 너희들은 오늘부로 2년간 가문을 떠나야 한다.”
“예?”
“무,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가문을 떠나라니…….”
갑작스러운 발언에 놀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지크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 : 후계자 시험 수락하기】
└제라드 맥러플린이 후계자 자격시험으로 2년간 가문을 떠나 있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시험을 수락하고 가문을 떠나십시오.
<조건>
└후계자 시험을 수락하고 가문 떠나기
<보상>
└5차 스킬 숙련도 2,000 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