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64화
“지크가 마법을 배웠었다니…… 내 마법이 안 써지던 건 그래서였나? 디스펠 마법을 배워서?”
‘디스펠?’
뜬금없는 소리에 호기심을 느낀 에스카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지크가 뭘 어쨌다고?”
“디스펠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지크 그놈이 디스펠을 쓴 것 같아요.”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게.”
알렉스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지크 녀석이 암살자로 위장해서 저를 찾아왔을 당시에 있던 일인데…… 제가 놈에게 수면 마법을 걸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마법이 취소되더라고요.”
“마법이 취소됐다?”
“예. 모아놨던 마력이 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마력이 안 모이니 저로선 뭘 할 게 없었죠.”
“흐음.”
“당시엔 영문을 몰랐었는데 이제 보니 알겠네요. 마법에 재능이 있었다면 디스펠로 제 마법을 차단했을 수도…….”
“아니, 그건 불가능해.”
에스카가 즉시 반박했다.
“디스펠은 9서클의 고등 마법. 대마법사나 쓸 수 있는 마법으로 무영창과 동급으로 취급받지.”
“아…….”
“그런 대단한 기술을 고작 1년 전에 썼다? 15살의 나이에? 있을 수 없는 일이네. 마법에 통달했다는 12인의 선구자들도 불가능한 일이야. 마법사라면서 이런 기본적인 상식도 모르는군.”
“하, 하지만 정말이에요. 마법이 전혀 안 써졌다니까요? 한두 번도 아니고 몇 초 동안 계속!”
‘몇 초간 계속?’
상당히 구체적인 진술이었지만 에스카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술에 취한 몰락 귀족이 떠드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기엔 신빙성이 떨어졌다.
“그것 말고 다른 정보는 없는가?”
“어음, 딱히…….”
‘결국 쓸 만한 정보는 없었군.’
알렉스가 더 떠올리지 못하자, 에스카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았네.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지. 그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카의 몸에서 방대한 마력이 폭사 되었다.
“허억, 어어억!”
“돈은 돌려줘야지?”
잘그랑.
떨어지는 돈주머니를 받아든 에스카가 몸을 돌렸다.
한동안 부들거리며 서 있던 알렉스의 신체는 에스카가 나가는 즉시 기울었다.
쿵.
잠시 후 바닥에 엎어진 알렉스의 얼굴에서 시뻘건 피가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 * *
헤밀톤 령은 평화로운 영지였다.
산악지대에 위치해서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지만, 근방에 자원이 풍부한 광산이 있다.
일거리 걱정이 없는 것은 물론 자급자족도 가능하다는 뜻.
영주의 인품 또한 훌륭했다.
다쳐서 일을 못 하는 영지민들을 위해 세율을 대폭 감소시키고 그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지는 영주는 근방에선 찾아보기 힘드리라.
이토록 버크 헤밀톤 백작은 영지민들 사이에서 어질고 성품이 올곧은 영주로 추앙받았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딸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딸바보라는 점이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이성을 잃기 쉽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 영주님.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실 겁니까?”
“저희 영지의 재정 상태론 손해가 불가피합니다.”
“영지전에서 패배하기라도 하는 날엔 파산입니다. 파산!”
“그렇다고 그 파렴치한 놈을 가만 놔둘 순 없지 않소!”
가신들의 만류에도 헤밀톤 백작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백작이 치려는 영지는 근방에 있는 아고스 령.
보통은 상대 영토를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헤밀톤 백작이 바라는 바는 딱 하나였다.
바로 게리 아고스 백작의 머리.
이유야 단순했다.
“그 개새끼가 보석 같은 내 딸을 간음했소. 그걸 나더러 참으라는 소리요?”
상대 영주가 자신의 딸을 건드렸기 때문.
울면서 강제로 당했다고 고백하는 딸을, 세상 어느 아버지가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특히나 하나뿐인 딸이라 애지중지 키웠다면 더더욱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그 짐승 같은 놈은 내 딸인 걸 알면서도 보란 듯이 욕보였소! 이건 나에 대한 도전이자 영지 전체를 욕보인 거요! 딸과 영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도발에 응하지 않을 수 없소!”
“하지만 영주님! 아가씨만이 아니라 영지민들도 생각하셔야죠. 전쟁을 일으킨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안 그래도 부족한 형편에 전쟁을 치른다면 그 손해가 막심합니다. 만일 패배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패배라니! 경들은 어째서 패배부터 생각하시오?”
영주가 반박했지만, 상대의 병력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아고스 영주의 정규군은 탄탄하기로 소문났습니다. 듣기로는 대다수가 오러 익스퍼트 급이라고 합니다. 여러 개의 마법사단을 고용할 수 있는 재력도 갖췄다고 들었고요.”
“아고스 영주는 전쟁에서 패배해도 손해가 크지 않지만, 저희는 모든 걸 걸어야 합니다. 얻는 것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도 큽니다!”
“어찌… 어찌 경들은 내 말에 반박만 하는 거요! 어찌……!”
탄식하듯 내뱉은 헤밀톤 백작이었지만 이 와중에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영지전은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무모하다는 것을.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전쟁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가신들도 필사적으로 말리는 것이었다.
이번 한 번만 꾹 참고 버티라고.
“아가씨가 당한 일은 너무도 안타깝지만, 이번만큼은 참고 물러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고 버티면 언젠가는 복수할 날이 올 겁니다. 차라리 그때를 노리시지요.”
“하아아아…….”
반대 의견만 표하는 답답한 상황에 영주의 한숨이 짙어졌다.
그러나, 모두가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쯧쯧, 보자 보자 하니 다들 겁쟁이처럼 패배주의에 빠져 있구만. 이래가지고 약소영지라 자처하는 꼴이 아니오?”
혀를 찬 자는 영주의 가신 중 한 명인 키어스 바튼이었다.
“영주님.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리하시오, 바튼 경.”
“저희 영지가 약소영지로 취급받았음에도 왜 적들이 침공하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광산을 잇는 이 지형 덕분입니다.”
어느새 지도를 펼친 바튼이 설명을 이어갔다.
“저희 영지는 산악지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산악지대는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고요. 여기, 이 좁은 지형과 광산이 영지를 요새처럼 막아주고 있는 게 보이십니까?”
“으음, 보이네.”
“이러한 지형적 이점 덕분에 저희는 외부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점을 지녔는데 어찌 패배부터 생각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바튼 경. 그건 수성에서나 유리하지, 공성전에선 전혀 이점이 없지 않소?”
한 가신의 반박에도 바튼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공성전이 문제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공성을 안 하면 되지 않습니까?”
“상대를 먼저 쳐야 하는 건 이쪽인데 공성을 안 하겠다니? 그 무슨 소리요?”
“생각해 둔 작전이라도 있는 게요?”
가신들이 의아해하자 바튼은 당연하다는 듯 작전을 이야기했다.
“먼저 적은 병력을 이용하여 적을 도발하는 겁니다. 그리고 일부러 밀리는 척하면서 적들을 저희 진영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러면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적들을 끌어들여서 수성전을 유도하자는 말이군.”
“하지만 적들이 그 뻔한 작전에 걸려들겠소이까? 우리 쪽의 수성이 강하다는 걸 상대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러니 되도록 먹음직스럽게 포장해야겠지요. 공성하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성의 병력을 허술하게 배치하는 겁니다. 성문도 개방하고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성문을 개방하면 위험하지 않는가?”
“위험하지 않습니다. 문 근처에 매복을 시켜놓으면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문은 충분히 적들이 모였을 때 닫으면 그만입니다.”
“요지는 성문을 개방하여 적들을 우리 진영 앞까지 유인하자는 게로군.”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수성전으로 전환되고 낙승을 받을 수 있겠지요.”
전략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방심을 유도하고 적을 낚아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잡아먹자는 전략.
병력과 군자가 부족한 헤밀톤 영지로선 아고스 영지에 맞설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리라.
“과연, 바튼 경! 과거 전술 교관으로 활동했었다더니 그 명성이 어디 가지 않았군!”
“과찬이십니다, 영주님.”
“좋소. 그대의 전략을 십분 반영하여 아고스 백작에게 복수하겠소.”
“영주님! 성급히 결정하실 일이 아니옵…….”
“그만! 난 이미 결정했소!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고 적을 어떻게 이길지나 생각하시오!”
“…….”
가신들이 말렸지만, 영주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딸을 욕보인 그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딸에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영주의 성미를 잘 알기에 가신들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바튼 경! 그대가 낸 작전이기도 하니 그대가 이번 영지전의 지휘관을 맡아줬으면 좋겠소.”
“영광입니다, 영주님. 반드시 적을 섬멸하겠나이다.”
전쟁도, 지휘관도 단번에 결정해 버렸다.
중대사를 혼자서 쉽게 결정하는 영주가, 가신들은 못내 불만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주의 머릿속은 온통 전쟁 생각뿐이었지만.
“우리가 출정시킬 수 있는 군사는 얼마나 되오?”
“정규병은 다 해야 300 내외이고 사병을 끌어모아도 1,000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용병들이 필요하겠군. 영지전을 잘하는 용병단이 어디 있소?”
“붉은 늑대 용병단과 황금독수리 용병단이 가장 유명합니다. 용병의 수도 가장 많고 둘 다 전투 마법사단을 따로 보유할 정도로 전문적인 용병단입니다.”
“영지전에선 모름지기 마법사가 중요하지. 가장 높은 서클을 보유한 용병단은 어디요?”
“최근에 6서클 마법사가 황금독수리 용병단에 들어왔다곤 합니다만, 너무 신입이라…….”
“6서클?”
용병단에서 고용할 수 있는 서클은 높아 봐야 5서클.
6서클이나 되는 인재가 들어왔다는 말에 눈이 뜨일 수밖에 없었다.
“이쪽 업계가 소문이 빨라서 아고스 영주도 황금독수리 용병단을 노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서로 경쟁하게 되면 시세가 생각보다 많이 오를 겁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지. 돈이 많이 들더라도 황금독수리 용병단으로 고용하시오.”
영지전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이동하는 마차 수십 대 사이에는 지크 일행이 타고 있었다.
마차의 목적지는 산악지대가 특징인 헤밀톤 령.
헤밀톤 영주의 초대를 받고 영지전을 치르기 위해 고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마동차만 타다가 일반 마차를 타니 엉덩이가 다 아프네.”
“투덜거리지 좀 마세요. 지크 님도 이렇게 가만히 계시잖아요.”
“하, 얘 좀 봐라?”
메리의 타박에 피터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성격대로 쏘아붙이진 않았다.
옆자리에 있는 지크의 눈치가 보인 것이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맞지? 그렇지 않다면 저 여자가 왜 따라다니겠어?’
메리가 백작가의 여식이라는 건 본인의 입을 통해 들었다.
지크와의 관계는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느낌이라는 게 있다.
‘지크에게 홍조를 띄우는 걸 보면 적어도 메리가 관심 있어 하는 건 확실하지.’
그리 생각하던 피터는 문득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전쟁하러 가는 와중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헛웃음을 짓던 피터가 지크를 돌아봤다.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다.
“지크. 넌 긴장되지도 않나 보다? 영지전은 처음 아니야?”
“처음이죠.”
“그런데 왜 그렇게 태연해?”
순전히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었지만 지크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게 뭐 중요한가요?”
“중요하진 않지……. 그냥 나만 긴장하는 거 같아서.”
“저는 왜 빼먹어요? 저도 긴장하고 있다고요.”
“아, 그러세요?”
며칠 같이 다녀서 그런지 메리와 피터는 퍽 친해졌다.
서로 대화도 자주 하고 간간이 장난도 치곤 한다.
지크는 그런 두 노예를 내심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마치 우애 좋은 형제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랄까?
“지크. 단장에게서 들었는데, 이번에 우릴 고용한 영주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뭔지 알아?”
“뭐, 땅이 탐나서 그런 거 아닌가요?”
“아니. 자기가 애지중지하는 딸을 건드려서 그런 거래. 그래서 상대 영주의 목을 베어버리려고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서 전쟁까지 일으키는 거고. 진짜 황당하지 않냐?”
“황당하다니요, 제 딸이 그런 상황이었으면 저라도 눈이 뒤집혔을 것 같은데요?”
메리가 끼어들자 피터는 뭘 모른다는 듯 실소를 지었다.
“아니, 그렇다고 그런 사소한 일로 전쟁을 일으켜? 패배하기라도 하면 성도 먹히고 깡그리 몰살하는데? 영지민 입장에선 완전 미친놈이지.”
“글쎄요, 저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되는데요?”
“아, 그, 그래?”
지크가 긍정하자 피터는 더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뭐라 해도 지금은 지크가 갑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영지전이라…… 이거에 관한 퀘스트는 안 뜨나?’
지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시스템이 때마침 퀘스트를 제공해 줬다.
그런데.
‘어?’
지크는 놀란 눈으로 메시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떠오른 퀘스트가 두 개나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