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69화
“트, 트레이시! 사, 살려주…….”
“이름 부르지 마. 역겨우니까.”
서릿발 같은 음성에 아고스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더 말했다간 화만 돋울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용서를 구해봐도 소용없다는 것 역시.
‘X발, 큰일이다. 이러다간 진짜로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겠어……!’
자신이 간음한 여인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좌우되는 운명이라니.
차라리 전장에서 전사로서 죽는 게 낫지, 이딴 최후나 당하려고 악착같이 살아온 인생이 아니다.
“제, 제발 살려다오.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무릎 꿇고 빌 테니까…….”
“전 이미 결정 내렸어요, 아버지. 빨리 저 쓰레기를 치워주세요.”
냉정하기 그지없는 딸의 목소리에 헤밀톤 백작은 조금 난감한 심정이었다.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결정을 넘길 줄 알았는데 트레이시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이야…….’
자신이라고 어찌 딸을 간음한 쓰레기를 가만 놔두고 싶겠는가?
마음 같아선 이 자리에서 눈알을 파내고 목을 쳐버리고 싶다.
하나,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다.
아무리 전쟁이라도 저항하지 않는 상대의 목숨을 끊는 건 사회의 통념상 용인되는 일이 아니었으니.
하물며 상대가 영주라면 더더욱.
‘명분이 있다곤 하나, 처형하면 주변에서 결코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겠지.’
아고스 영주에게 우호적인 여러 귀족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기도 하고, 이 틈을 비집고 비난의 화살을 퍼부으며 시류에 편승하려는 날파리들이 꼬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사회의 통념과 정치적인 관계 때문에 쉽사리 목을 칠 수 없는 것.
그러니 잡음이 나지 않으려면 목숨을 끊지 않는 선에서 죄를 물어야 한다.
‘그걸 딸한테 설명하려 해봤자 이해하려 들지 않겠지…….’
저토록 격한 반응을 보이는 딸이었기에, 영주는 차마 살리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알았다. 아고스 백작의 목을 치마.”
“그, 그 무슨 소리인가! 이리 성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제발 살려주시게! 아니, 살려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죽고 싶지 않았던 아고스 백작이 필사적으로 간청했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듣기 싫다는 듯 외면하고 있었고, 헤밀톤 백작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신 한 명이 옆으로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마침 잘 왔소. 지금 바로 아고스 백작을 처형하기 위한 준비를…….”
“그러면 아니 되옵니다, 영주님.”
가신의 반대에 영주가 이맛살을 구겼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면 이미 알고 있소. 그 부담은 내가 고스란히 감수할 예정이니…….”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그럼?”
가신이 가까이 접근하더니 영주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닥거렸다.
그 내용은 영주가 놀라기에 충분했다.
“그게 정말이오?”
“예. 저도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지크 경이 사전에 눈치채고 사로잡았다고 하니 이리 데려와서 삼자대면해 보십시오.”
“알겠소. 이리로 불러주시오.”
가신이 나가자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여긴 트레이시가 아버지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조금만 기다리거라. 나도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니.”
이윽고 나갔던 가신이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한 명은 지휘관인 바튼 경이었고, 나머지는 이번 전쟁의 일등 공신인 지크였다.
“안녕하십니까, 영주님.”
“어서 오시오, 지크 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을 다시 만난 것은 반가우나, 사안이 이렇다 보니 본론부터 말하겠소.”
“예. 말씀하십시오.”
“내가 조금 전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는데…….”
헤밀톤 백작의 시선이 무릎 꿇은 바튼에게 향했다.
“바튼 경이 첩자라는 말이 사실이오?”
“예, 사실입니다.”
“영주님! 오해입니다! 이 자의 말을 믿으시면…… 커억!”
지크는 곧바로 옆에 있던 바튼의 주둥이를 걷어찼다.
턱이 돌아가며 피가 튀자 가신들이 너무한 것 아니냐는 눈빛을 보내온다.
심지어 영주조차도.
하지만 지크도 증거 없이 이러는 건 아니었다.
“영주님. 이러쿵저러쿵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백번 말하는 것보단 한 번 듣는 게 나을 테니까요.”
“무슨 소리인지…….”
지크는 영주의 말을 무시한 채 나비 브로치를 꺼냈다.
반역자를 색출할 때 유용하게 썼던 그 도청기였다.
딸칵―
곧 두 남자의 음성이 브로치에서 흘러나왔다.
―나한테 알려준 작전은 확실한 거겠지?
―물론이죠. 저희가 조금 있으면 기병 100을 보낼 겁니다. 백작님은 어울려주는 척 기병을 상대하시고 진짜 본대는 후문으로 오시면 됩니다.
―후문도 열려 있나?
―그건 아닙니다만 문을 부수기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제가 병력 대부분을 정문에 배치해 놨으니까요.
―정문에서 후문과의 거리는?
―거리야 충분하니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아고스 백작님의 본대가 보일 시점에 움직이더라도 문이 부서지는 걸 막진 못할 겁니다.
―자네 작전대로 되기를 바라야겠군.
―염려 놓으십시오. 그럼 변경 사항이 생기면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만 해도 무슨 짓을 하나 궁금해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놀란 눈으로 바튼을 바라보고 있다.
헤밀톤 백작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뻔뻔한 얼굴의 반역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바튼 경. 이게 사실인가? 그대가 정말로 아고스 백작과 내통한 것인가?”
“…….”
바튼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또한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아고스 백작과의 통화가 녹음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대체…… 언제?’
내용을 들어보면 녹음의 시점은 영지전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때부터 자신을 의심하고 도청을 시도했다는 뜻이 된다.
‘한참 전부터 내가 반역자라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인가?’
단순히 심증만으로 자신을 붙잡은 것이 아니었다.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고서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빌어먹을! 어리다고 해서 얕볼 게 아니었어!’
바튼은 지크를 힐끔거리며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얕보지 않았더라도 바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의 실수라기보단 지크의 능력이 워낙 사기적이었던 것뿐이니까.
“바튼 경! 대답해 보시오! 저 대화가 사실이냔 말이오!”
더는 물러설 데가 없다는 걸 직감한 바튼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주를 올려다봤다.
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표정이었다.
“멍청한 영주 놈 같으니.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됐나?”
“바튼… 경?”
“젠장, 다 이긴 게임이었는데 이깟 영지 하나 점령하지 못하다니.”
중얼거리는 그 소리에 충격받은 헤밀톤 백작이 뒤늦게 현실을 자각하고 분노했다.
“바튼 경! 내 그대를 믿고 지휘관을 맡겼는데 영지를 위험에 빠트리다니!”
“그러게 누가 나한테 지휘관을 맡기래?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이노오오옴!”
비아냥을 참지 못한 영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바튼에게 다가갔다.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고서.
“내 이 자리에서 네놈의 목을 치겠노라!”
“여, 영주님. 참으셔야 합니다.”
당장이라도 죽이려는 걸 가신들이 뜯어말리고 나서야 영주의 화가 누그러졌다.
그만큼 헤밀톤 백작이 받은 배신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였느냐. 언제부터 우리 영지를 집어삼키려고 첩자 노릇을 한 것이지?”
“지금 상황에서 그게 중요한가?”
“그게 아니면 뭐가 중요하단 말이냐?”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뭔지가 중요하겠지.”
“정보?”
“설마 이 일에 나랑 아고스 백작만 관여되어 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헤밀톤 영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체를 들킨 주제에 왜 이렇게 당당하나 싶더니만 이유가 다 있었다.
입꼬리를 올린 바튼이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사건에 연관된 배후를 알고 싶으면 나와 거래하자.”
“뭐? 거래?”
“내가 떠날 수 있게 말 한 필과 50만 골드를 준비해라. 그럼 누구의 지시로 헤밀톤 영지를 치라고 했는지 알려주지.”
“웃기지도 않는 소리! 영지를 집어삼키려던 반역자를 내 풀어줄 것 같으냐!”
“그럼 영원히 배후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할 것이다.”
“흥, 정보를 얻을 곳이 너한테만 있는 건 아니지.”
코웃음을 친 영주가 아고스 백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백작. 너도 이번 일의 배후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무, 물론 알고 있…….”
“백작을 털어봐야 나오는 건 없을 거다. 저 자식은 아무것도 몰라.”
“내, 내가 왜 몰라!”
“넌 그분과 만난 적도 없고 심지어 이름도 모르잖아? 모른다는 건 그런 거야.”
‘그분?’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지크가 그분이라는 말에 눈을 빛냈다.
[현재 바라보는 대상이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스템도 그렇고 확실히 누군가 뒷배에 있는 모양이었다.
헤밀톤 령을 치도록 설계하고 지시한 거물이.
그때, 예기치 못한 퀘스트가 눈앞에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 : 사건의 배후 찾기】
└키어스 바튼이 영지전을 지시한 배후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변조 스킬을 활용해 사건의 배후를 밝혀내십시오.
<조건>
└변조 스킬을 활용해 배후 밝히기
<보상>
└랜덤으로 스탯 600 증가
└5차 스킬 숙련도 4,000 증가
그간 숙련도만 올랐었는데 보상에 오랜만에 랜덤 스탯이 추가되어 있었다.
‘시스템이 배후를 밝히길 원하고 있어.’
안 그래도 여기서 끝내기엔 찝찝했던 지크다.
‘보상도 준다는데 까라면 까야지.’
그리 생각하며 바튼과 아고스 백작을 바라봤다.
아직도 투덕거리고 있다.
‘변조 스킬을 활용해 배후를 밝히라고?’
때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영주를 향해 지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영주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말씀하시오, 지크 경.”
“일단 두 사람을 감옥에 구금하고 처벌은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으로?”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배후가 있는 듯한데,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달을 일으킨 원흉을.”
“어떻게 찾는단 말이오. 설마 고문이라도 하자는 말이오?”
지크가 끄덕이자 아고스 백작과 바튼이 차례로 놀랐다.
“고, 고문이라니!”
“아니, 날 풀어주면 배후를 불겠다니까?”
“고문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뭐하러?”
그 말에 바튼은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 쓸데 없는 짓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될 테니까.”
“말 안 해도 그럴 거다. 물론 영주님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지크가 그리 말하며 헤밀톤 영주를 바라봤다.
하지만 영주의 눈빛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결정권자는 자신이 아니라는 듯.
“괜찮겠느냐? 아고스 백작을 살려놓아도?”
“어쩔 수 없잖아요…….”
달리 방도가 없는 걸 아는지 트레이시는 체념한 목소리였다.
아고스 백작을 당장이라도 죽여줬으면 하지만 배후의 누군가가 얽힌 일이다.
정보를 뽑아내기 전까진 죽일 수가 없다.
“후우, 알겠다. 여봐라!”
“예!”
“지크 경의 말대로 두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라!”
바튼과 아고스 백작이 병사들의 손에 끌려가자, 영주가 이어서 가신에게 명령했다.
“놈들의 정보를 끌어내야 하니 고문할만한 사람을 구해내시오.”
“알겠습니…….”
“잠시만요.”
지크가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러지 말고 저에게 맡겨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