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70화
“그러지 말고 저에게 맡겨주시겠어요?”
“지크 경이?”
잠깐 놀라워하던 헤밀톤 백작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시오. 지크 경이라면 믿음직스럽지 않을 수 없지. 바튼이라는 반역자도 잡아내셨으니.”
“감사합니다. 반드시 배후를 알아내겠습니다.”
“그럼 고문 도구는 뭐로…….”
“도구는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다? 그게 무슨 소리요?”
“고문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거든요.”
씨익 웃던 지크의 눈은 정보창을 향해 있었다.
[기본 스킬 : 변조]
-효과 : 30분간 원하는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습니다.
-특이사항 : 기억에 있는 사람만 가능하며, 공격받을 시 효과가 해제됩니다. 시전 후 30분의 쿨타임이 있습니다.
* * *
헤밀톤 영지성의 죄수들을 수용하는 지하 감옥 독방.
철커덕!
그곳에 홀로 갇힌 아고스 백작의 볼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키어스 바튼. 그 개새끼가 감히 나를 배신해?’
수년간 헤밀톤 영지의 가신으로 잠입하여 자신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던 바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비로소 전쟁을 실행할 때가 왔다며 자신에게 이런저런 작전을 알려주기도 했다.
자신은 곧이곧대로 그 말을 따랐고.
한마디로 바튼을 완전히 신임하고 있던 아고스 백작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믿음이 깨졌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줬는데 지 혼자 살겠다고 날 밀어내다니. 개만도 못한 X새끼!’
물론 녀석의 말대로 자신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분의 이름도 모르고, 직접 본 적도 없다.
그저 위대한 분이라는 것만 알았고 통신구로 대화 한 번 해봤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위대한 존재의 이름을 팔아서 살아남으려고 하다니.
웬만한 깡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분이 알게 되면 넌 죽은 목숨이다, 바튼. 뭐,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마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국에 누굴 걱정하는지 원.
아고스 백작은 그리 생각하며 쓸만한 정보를 떠올려보고 있었다.
거래할 만한 정보가 있어야 놈들이 자신을 살려줄 테니.
“하아아. 정보가 없어. 정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였다.
철커덕-!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봤더니 의외의 인물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 뭐야? 네가 왜 여기로 와?”
“수용할 자리가 없다고 하니 같이 신세 좀 집시다.”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바튼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를 씹어대고 있던 백작이었기에 눈에 불똥이 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너 이 새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
“이거 놓지? 간수 부르기 전에.”
멱살 잡고 실랑이를 벌이던 아고스가 거칠게 손을 놓았다.
똑같이 갇힌 처지에 녀석과 드잡이질을 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빌어먹을 개새끼. 주인을 물고서 살아나가면 끝나는 줄 알지? 넌 그분의 이름을 팔고 나가는 순간 죽은 목숨이야.”
“그러니 조건으로 말이랑 생활 자금을 요구한 거 아닙니까? 그분을 피해 살아남으려고.”
“퍽이나 가능하겠다. 네깟놈이 그분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거 같아?”
그 말에 바튼은 비웃음을 흘렸다.
“마치 그분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이름도 모르고 본 적도 없는 주제에.”
“그렇지만 대화는 해봤다고. 브라함의 환술사라는 이명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잘 알고.”
“그럼 뭐해. 여기서 곧 죽게 될 텐데. 난 살아서 나갈 거고. 흐흐.”
“이 배신자 새끼가…….”
얄미운 웃음소리에 아고스 백작은 다시금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네가 말했잖아. 헤밀톤령을 점령하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고.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야? 지휘관 자리를 얻었으면서 일을 이 모양 이 꼴로 망쳐놔?”
“이제 와서 내 탓하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잘못했지! 네가 작전만 잘 짰으면 일이 이렇게까진 꼬이지 않았어!”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냐고.”
“그분과 연락하는 사이면 더 확실한 대책을 세웠어야지!”
“그러는 당신은 실수한 게 없는 줄 알아?”
“내가 뭐? 헤밀톤 영주의 딸을 간음하고, 네가 말해준 그대로 작전을 지휘했어.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일을 다 한 게 당신뿐인 줄 알아? 우기는 것도 정도껏 우겨야지.”
“이 자식이 그래도!”
분노를 참지 못한 백작이 손을 치켜든 그때.
독방의 문이 열리며 간수가 호명했다.
“바튼! 자리가 났으니 이제 나와라!”
“이만 떠나야 할 때가 됐군. 대화 즐거웠어.”
바튼은 그 말을 끝으로 독방을 나섰다.
아고스 백작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하지만 백작은 몰랐다.
자신이 상대한 사람은 바튼이 아니라 바튼으로 위장한 지크라는 것을.
꿀렁꿀렁-
바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듯싶더니 어느덧 지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현장에서 직관한 간수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마법이란 대단하군요.”
‘음……?’
간수의 말에 순간 의아함을 느낀 지크였지만 그러려니 했다.
“저도 동감합니다.”
“어떻습니까? 심문해 보니 소득이 있었습니까?”
“예. 나름의 정보를 얻었죠.”
몇 분 전.
지크는 영주에게 고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었다.
그 방법이란 서로의 모습으로 위장한 뒤 감방에 들어가 유도신문을 하는 것.
이렇게 하면 고문할 필요도 없이 쉽게 정보를 캐낼 수 있다.
위장이 들통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물론 지크로서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변조라는 새로 배운 스킬이 있었기 때문.
‘얼굴은 물론 목소리까지도 바꿔주다니. 이러면 다들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지.’
변조는 상대방으로 위장하는데 특화된 스킬이었다.
형상 변형 스크롤의 상위 호환 버전이랄까?
겉모습만이 아닌 목소리까지 바꿔주니 상대를 속이는 데는 이것만 한 게 없었다.
그것이 현재 지크가 영주의 허락하에 위장하고 있는 이유였다.
“이제 바튼을 심문하실 겁니까?”
“그래야죠.”
간수의 말에 대답하던 지크는 이내 쿨타임이 끝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금 모습을 변형시켰다.
꿀렁꿀렁-
영락없는 아고스 백작의 모습으로.
“문 열어주세요. 다녀오겠습니다.”
간수가 끄덕이며 바튼이 갇힌 독방의 문을 열었다.
* * *
끔찍한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보통은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적어도 귀족의 딸이라면 그러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애지중지 커온 마당에 끔찍한 기억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트레이시 헤밀톤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떠올려보라면 즉답할 수 있을 정도.
그만큼 그녀가 겪은 고통은 선명했다.
‘그날, 밖에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영지 바깥에 아름다운 꽃나무가 피었다는 소문을 듣고 구경하러 나간 게 화근이었다.
설마 가는 도중 납치당해 그런 고통을 겪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나한테 칼 한 자루라도 있었더라면…… 최소한 저항은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후회를 되뇌며 트레이시는 품에 있는 단검을 꼭 쥐었다.
그날 이후로 항상 호신용 단검을 지니고 다니는 트레이시였다.
물론 다닌다고 해봐야 영주성 안.
외출은 트라우마가 생겨 꿈도 꾸지 못한다.
남성에 대한 두려움 또한 생겼다.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외톨이가 된 것도 이런 이유.
방에만 박혀 있다 보니 극단적인 생각도 종종 떠올랐다.
자기 자신을 죽여서라도 그때의 기억을 지우고 싶었기에.
‘아니지. 내가 왜 죽어. 죽어야 한다면 그 쓰레기가 죽어야지.’
전쟁에서 승리하고 아고스 백작을 포로로 붙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적어도 아고스 백작이 죽는 꼴은 보고서 죽자고.
죽어야 한다면 자신이 아니라 가해자가 죽는 게 이치에 맞다고.
그래서 아버지에게 당당히 요구했다.
죽여 달라고.
자신을 겁탈한 그 쓰레기를 죽여 달라고.
그러나 단호히 말했음에도 자신의 요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아고스 백작이 배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럼 정보를 얻으면 백작을 죽일 건가요?
-으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꾸나.
조금 전에 했던 아버지와의 대화를 곱씹어봤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필요한 정보를 얻고 나면 죽여야지 뭐하러 살려둔단 말인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쓰레기라면 더더욱 죽여야지 도대체 왜?
정치적인 관계가 얽혀 있다는 걸 깨닫기엔 트레이시의 나이가 아직은 어렸다.
‘이러고 있을 순 없어. 아버지한테 다시 한번 말해봐야 해.’
방에서 고민해 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까딱했다간 정말로 아고스 백작이 풀려날지도 모르는 일.
벌떡 일어난 트레이시는 서둘러 방문을 나서 영주관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어떻게든 설득해 아고스 백작의 처형을 진행할 것이다.
자신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던 아버지였으니 몇 번 매달리면 진행해 주실지도 모른다.
걸음을 재촉하던 트레이시는 이내 영주관에 이르렀다.
가까이 가려는데, 마침 문이 열리며 우르르 가신들이 나왔다.
순간 겁이 난 트레이시가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트라우마 때문에 아직은 사람을 마주하기가 무서웠다.
“다행이군. 영주님의 심지가 굳어서.”
“그러게 말일세. 끝내 처형을 진행하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말이야.”
“영주님도 아시는 거지. 아고스 백작을 죽이면 상황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는 걸.”
대화하던 가신들이 점점 멀어져 간다.
그 뒷모습을 훔쳐보던 트레이시가 충격에 입을 벌렸다.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들었으니까.
‘아버지는…… 아고스 백작을 죽일 마음이 없는 거야…….’
아버지를 설득하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희망이 무너져 내렸다.
지금 가봤자 보나 마나 거절할 게 뻔하다.
정치적인 이유로 처형은 불가능.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내가 하는 수밖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