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73화
‘죽기 전에 복제해 놔서 다행이야.’
첩자라는 게 밝혀진 이상 간수의 죽음에 애도할 마음은 없다.
그저 뒤처리를 어떻게 할지가 걱정일 뿐.
‘일단 영주님한테 가서 말해야겠어.’
시체를 놔두고 가려는데, 녀석의 옷깃 사이로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품을 뒤적이니 눈에 익은 금색의 배지가 나왔다.
‘이건…… 켈브리지 조합원 배지잖아?’
영지전의 배후에 12인의 선구자가 있고, 놈들이 심어놓은 첩자가 켈브리지 조합원이다?
뭔가 냄새가 났다.
‘우선은 나만 알고 있는 게 좋겠어. 누군가 또 연결고리가 있을 수도 있으니.’
배지를 주머니에 넣고 또 품 안을 뒤적거렸는데 손바닥만 한 통신구가 손에 잡혔다.
‘누구와 연결되는 통신구지? 설마 브라함의 환술사?’
잘은 몰라도 단서가 될 듯하다.
통신구까지 품에 챙긴 지크가 감옥을 둘러봤다.
각각의 독방을 살펴본 결과 시체 두 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죽었군. 서둘러야겠어. 괜히 오해받기 전에.’
지크의 걸음이 영주관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 * *
“허! 간수가 첩자였다니!”
감옥에서 있던 일을 지크에게 보고를 받은 영주는 허탈한 심경이었다.
간수 또한 자신이 임명한 사람이었으므로.
“정말로 그 두 사람이 죽었단 말이오?”
“예. 확인해 보니 아고스 백작과 키어스 바튼. 두 사람 다 심장이 꿰뚫려 즉사한 상태였습니다. 백작의 독방엔 범행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단검이 확인되었고요.”
“이런… 바튼이야 상관없었지만, 백작은 죽이지 않으려 했거늘…….”
참담한 심정의 영주였지만 그와 달리 트레이시는 내심 흡족해하고 있었다.
아니라곤 해도 은근히 백작이 죽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둘만으로 일을 진행하기엔 스케일이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첩자가 한 명 더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아마 브라함의 환술사가 뒤처리를 위해 심어놓은 첩자겠지. 일이 틀어지면 죽이라고 명령을 받았을 테고.”
“백작을 죽임으로써 전쟁의 불씨를 키울 명분을 마련하기 위함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이라 생각되오. 그놈의 광산이 뭐라고 이리도 집착하는지, 후우…….”
영주는 긴 한숨을 쉬었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
그 모습을 지크는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사실 지크에겐 헤밀톤 영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자신은 그저 전쟁을 위해 고용된 용병일 뿐.
이만큼이나 사건에 개입한 것도 어떻게 보면 지나친 오지랖이었다.
물론 영주 입장에선 과분한 도움을 받은 셈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는지 영주가 뒤늦게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런, 내가 전쟁 영웅을 너무 붙잡아뒀군. 지크 경. 도와주신 일은 정말로 고맙소. 덕분에 첩자들을 둘씩이나 잡아낼 수 있었소.”
“별말씀을요.”
“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들어드리고 싶으나, 특별히 없다고 하니 용병단에게 포상을 지급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소.”
“예. 그게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언제 떠날 예정이시오?”
“단장님에게 듣기론 내일 출발 예정이라고 합니다.”
“알겠소. 영지에 남은 숙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지크 경은 남은 시간만이라도 푹 쉬시구려. 저녁에 용병단을 위해 성대한 만찬을 마련하라고 하겠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영주님. 그럼.”
지크가 인사한 뒤 물러났고, 그 뒤를 영주와 트레이시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늦은 시간에 열린 만찬장.
스무 명이 넘는 황금독수리 용병 단원들이 저마다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
“캬아, 이거 맛 죽이는데?”
“많이 마셔둬. 이런 귀한 술을 언제 마셔보겠어?”
“귀족이라도 된 거 같은 기분이야.”
“쉿, 목소리 좀 낮춰. 누가 들을라.”
“뭐 어때? 여기 우리 말고 더 없잖아?”
단원들은 저마다 취기가 오른 얼굴로 떠들썩하게 만찬을 즐겼다.
잔을 부딪치며 영지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배를 들기도 했다.
그들의 안줏거리는 명실상부 승리의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는 지크였다.
“지크가 마검사라니. 캬, 그 녀석, 어려 보여도 의외로 엄청난 실력자였잖아?”
“검 들고 싸울 때 못 봤냐? 가차 없이 목 썰고 다니는 거? 16살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터프하다니깐?”
“아고스의 오러 기사들이 다들 겁먹어서 지크 곁으론 접근도 못하더라. 푸흐흐.”
“그럼, 혼자서 몇 명을 썰었는데! 나 같아도 오줌 지리겠다.”
“지크가 아니었으면 못 이겼을지도 몰라. 그만큼 불리한 싸움이었어.”
“피터, 너는 알았지? 지크가 마검사인 거.”
갑자기 받은 이목에 피터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아, 네…… 알았죠.”
솔직히 말하면 몰랐다.
분위기상 아니라고 하면 더 골치 아파질 것 같아서 거짓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마법사단엔 왜 온 거야? 검을 그렇게 잘 쓰면서.”
“엄밀히 말하면 오러 유저가 아니니까 왔겠지. 아티팩트 덕분에 그런 실력을 발휘한 거라잖아.”
“그런 아티팩트는 어디서 구한 걸까? 피터, 넌 알아?”
“아, 아니요. 저도 잘…….”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피터는 정신이 없었다.
전원이 지크 관련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따금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도 하고.
하지만 피터는 지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지크가 검을 잘 쓴다는 건 테오 공자랑 대련하는 걸 봐서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잘 다룰 줄은…….’
그러한 심정은 옆에 있던 메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크가 이 정도로 압도적인 무위를 보인 적은 처음이었기에.
‘하긴 무영창도 하시는 분인데 이 정도쯤이야…… 그런데 진짜로 정체가 뭘까? 지크 님은.’
주인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괜히 물으면 기분 나빠하실 것 같아 생각을 접는 메리였다.
주변에서 떠드는 이야기를 들으며 샴페인을 마시는 그때, 주인공인 지크가 나타났다.
“이게 누구야? 지크!”
“지크가 왔다고!?”
“어서 와, 지크!”
“이쪽! 이쪽으로!”
“지크! 그 아티팩트란 것 좀 보여줄 수 있어?”
“너 마법도 쓸 수 있는 거 맞아? 실은 마법사 아니지?”
“영주님이랑 무슨 얘기 하고 온 거야?”
“어, 저기…… 정신없으니까 한 명씩 질문해 주실래요? 이게 뭔…….”
단숨에 용병단의 스타가 된 지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인파 사이에 파묻혔다.
그러다 상황이 일단락된 것은 단장인 크리스가 나타났을 때였다.
“다들 조용! 지크랑 할 얘기 있으니까 다들 조용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다가온 크리스의 눈빛은 사뭇 진중했다.
“지크. 영주님께 얘기 들었다.”
“무슨 얘기요?”
“너에게 내려질 포상을 단원들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며?”
처음 듣는 소리인지 주위의 용병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포상을 나눈다고?”
“지크, 정말로 그랬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 네가 일등 공신이잖아.”
“그래, 전쟁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포상을 많이 받는 건 당연한 거지.”
다들 이해하는 분위기였지만 크리스는 지크의 결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거냐? 왜 네가 가지지 않고 우리한테 나눠주라고 한 거야?”
“그야…….”
지크는 뭐라고 변명할까 생각하다가 조금 오글거리는 대사를 떠올렸다.
“우리는 한 팀이니까요.”
“뭐?”
당황해하던 크리스가 이내 으하하핫 웃음을 터트렸다.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는 용병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답변이었다.
“네가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튼 고맙구나.”
“뭘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지크를 보는 단원들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실력도 확실한 데다 인성까지 바르다니.
용병들의 확실한 신임을 얻은 순간이었다.
* * *
“후우.”
지크는 지친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단원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느라 진이 다 빠져 버렸다.
그런 지크의 모습에 카르볼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괜찮냐?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
-날이 밝을 때까진 푹 쉬어라. 브라함의 환술사를 찾으려면 체력을 아껴둬야지.
‘너는 이 와중에도 12인의 선구자를 찾을 생각만 하고 있구나?’
-당연하지. 그놈들이라면 내 동족들의 행방을 알고 있을 거다. 분명히!
‘악마의 술법을 쓴 건 발루두크뿐이잖아.’
-그 발루두크란 놈이 12인의 선구자 아니더냐? 그놈이랑 연관되어 있다면 다른 놈들도 모를 리 없을 거다.
‘하긴, 녹스 베노마이어를 잡았을 때는 그런 걸 물어볼 정신이 없었지.’
카르볼은 지크가 브라함의 환술사를 찾기를 바라고 있었다.
물론 그러지 않아도 찾을 생각이지만 지크는 그리 서두를 필욘 없다고 여겼다.
아직 이렇다 할 단서도 없었고.
‘퀘스트라도 뜨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하지만 퀘스트도 마땅히 안 뜨는 걸 보면 시스템 역시 환술사의 행방을 모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거나.
‘어쨌거나 지금은 좀 쉬자.’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며 휴식을 취하려는데.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가 지크의 휴식을 방해했다.
“누구세요?”
“지크 경 계세요? 저 트레이시예요.”
“아, 예. 들어오세요.”
영주의 딸이 무슨 일로?
지크는 의문을 느끼며 문을 열어줬다.
트레이시가 샴페인을 가지고 들어왔다.
“저랑 한잔 더 해요.”
“예? 여기서요?”
수줍게 끄덕이는 트레이시를 보니 차마 거절하기 뭐 했다.
나름대로 용기를 낸 듯하여.
“네, 그러죠.”
둘은 곧이어 탁자에 마주 앉아 샴페인 잔을 채웠다.
트레이시가 여기에 온 의도가 심히 궁금했다.
그건 카르볼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저 여인이 너한텐 무슨 일이지? 설마 너랑 짝짓기라도 할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