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74화
‘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거 보아라. 얼굴을 붉히고 눈을 똑바로 못 쳐다보질 않느냐?
그건 그랬다.
갑작스레 찾아온 것도 그렇고,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의문스러웠다.
그때 트레이시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죄송했어요, 정말.”
“네? 뭐가요?”
“지크 경을 아고스 백작으로 오해해서 찌르려고 한 거요.”
“아, 괜찮습니다. 이미 잊었습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거든요. 그런 일을 겪고 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고민도 많이 했고.”
“힘드셔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심이…….”
“알아요. 그러면 안 되는 거. 백작을 죽이려던 것도 못 할 짓이었다는 거.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남은 생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 그러다 고민 끝에 직접 끝내기로 한 거고요. 설마 지크 경이 변신해서 정보를 캐내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요.”
“…….”
지크는 말없이 샴페인만 홀짝였다.
이러나저러나 자신과는 관계없는 이야기.
동정은 들지만, 그 이상 관심은 없었다.
트레이시가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맥러플린 가의 사공자 도련님 되시죠?”
“……!”
“반응을 보니 맞는 것 같네요. 어쩐지.”
“……어떻게 알았어요?”
“피터라는 분을 보고서 알았어요. 저희 가문이 마법 명가로 유명한 데포르테 공작가와 친분이 있는데, 거기의 첫째 공녀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거든요. 약혼 후보라고 초상화를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때 본 얼굴이 맥러플린 가문의 일공자인 피터 맥러플린이었어요.”
‘피터 형님을 보고서 알았다고?’
생각지도 못한 지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피터의 혼약 상대로 데포르테 공작가 딸이 어떠니 하는 이야기는 얼핏 들은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피터의 얼굴을 알아보고 신분이 밝혀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걱정 마세요.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않았어요. 다들 모르는 눈치고. 비밀은 지킬게요.”
“그래 주신다면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그리고 저야말로 고맙죠. 지크 경이 아니었으면 우리 가문은 어떻게 됐을까요. 상상하기도 힘드네요.”
백작의 죽음 때문인가?
싱긋 웃는 트레이시는 한결 밝아진 얼굴이었다.
뭐, 백작의 죽음이 더 큰 위험을 몰고 올지는 모를 일이지만.
“저한테 찾아온 건 그럼…….”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었고, 또 피터 님과 같은 맥러플린 가문인지도 확인하고 싶었어요.”
“으음. 그렇군요.”
오해가 풀렸다.
카르볼의 말처럼 음흉한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그저 겸사겸사 대화나 나누려고 온 것이었다.
이후로 트레이시와 몇 번의 대화를 더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처음엔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대화해 보니 생각보다 밝은 여인이었다.
‘이렇게 밝은데 그런 험한 꼴을 당하다니…….’
심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는데.
깜빡깜빡.
품 안에 있던 통신구에서 빛이 점멸했다.
그 모습을 본 트레이시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통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럼 푹 쉬시고 내일 떠나실 때 뵈어요.”
“예. 들어가십시오.”
문이 닫히고 방 안에 홀로 남은 지크가 심각한 눈초리로 번쩍이는 통신구를 바라봤다.
다름 아니라 죽은 간수에게서 빼앗은 통신구였으니까.
‘지금 타이밍에 연락이 올 줄이야. 뭐가 됐든 받아야 한다. 간수의 상관일 확률이 높아. 어쩌면 브라함의 환술사일지도 모르고.’
그냥 받을 순 없고 간수의 목소리를 흉내 내야 한다.
지크는 즉시 변조 스킬을 사용해 모습을 변형시켰다.
꿀렁꿀렁-
얼굴은 물론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변한 뒤, 통신을 받았다.
통신구에서 흘러나온 건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왜 이렇게 늦게 받는 거냐, 네이선.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간수의 이름이 네이선이었다는 걸 기억해낸 지크가 눈치껏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뒤처리할 게 있어서 보고가 좀 늦었습니다.”
-맡은 일은 어떻게 됐지?
“둘 다 확실히 처리했습니다.”
-그럼 빨리 빠져나와라. 행여나 추적이 붙어선 안 돼.
“걱정 마십시오. 안 그래도 빠져나왔습니다.”
-그렇담 다행이군. 다음 지령 전달을 위한 회의 장소를 알려주겠다. 장소는 엘브로드령과 황천의 계곡 사이에 있는 숲이다. 나무에 표식을 해놨으니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모레, 여명이 뜨기 전까지 모이도록.
남자는 그렇게 약속을 잡은 채 통신을 먼저 끊었다.
잠시 장소를 떠올려본 지크가 씩 웃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네.’
다행히 단서가 생겼다.
그래서일까?
갑작스럽게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 회의 참석하기】
└브라함의 환술사인 아즈라힐 존스턴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얻었습니다.
└네이선으로 위장한 채 회의 장소인 엘브로드령과 황천의 계곡 사이의 숲으로 향하세요.
<조건>
└위장한 채 회의 참석
<보상>
└스킬 ‘현자의 눈’ 획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인 퀘스트였다.
* * *
아침이 밝자 용병단이 떠날 준비를 마쳤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영주님의 배려에 잘 쉬다 갑니다.”
“아니오. 나야말로 그대들에게 신세 많이 졌소.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나와 가족, 영지민들은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오. 다시 생각해도 황금독수리 용병단을 선택한 게 신의 한 수였던 것 같군.”
“하하, 과찬이십니다.”
단장과 대화 나누던 헤밀톤 백작이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크 경. 그대가 보여준 무위는 실로 놀라웠소. 정녕 작위를 받고 이곳에 머무를 생각은 없소?”
“예. 저는 바람 가는 대로 움직이는 용병일 뿐입니다. 어딘가에 얽매이는 삶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쉽군…….”
‘만약 머무른다면 내 딸과 짝을 지어주려 했거늘…….’
뒷말은 삼킨 백작이 옆에 선 트레이시를 바라봤다.
항상 그늘지던 얼굴이 예전처럼 화사하다.
‘다행이군. 트라우마를 극복한 듯하여.’
사람을 기피하던 딸 아이가 직접 용병단을 배웅하겠다고 나섰다?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진전이었다.
‘가만 보면 트레이시도 지크 경을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한데…… 아쉽구나.’
트레이시의 시선이 지크에게 향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백작의 착각이었다.
호감을 느끼고 있긴 하나 감사함과 미안함이 공존하는 마음일 뿐이지, 그 이상은 없었다.
그건 지크도 마찬가지였지만, 눈빛은 트레이시에게 향해 있었다.
다른 의미의 눈빛이었다.
-비밀 지켜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지크 경.
그리 대답하며 눈웃음치는 트레이시의 모습에, 지켜보던 백작의 오해가 깊어졌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겠습니다. 다음에 일 있으면 저희 용병단을 또 불러주십시오!”
“하하핫, 당연히 그러겠소. 살펴 가시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용병단의 마차가 이동했다.
영지전에서 승리하고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기분 좋았다.
“하아, 드디어 끝났구나.”
“다들 수고했어요. 피터 형님도, 메리도.”
“수고는 무슨. 네가 거의 다 했지.”
“맞아요. 지크 님의 활약이 제일 두드러졌죠.”
“뭘 이 정도 가지고.”
마차 안에서 피터와 메리의 칭찬을 대수롭지 않게 흘린 지크는 그들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공유했다.
“단장님한테 들었는데 다음 영지전까지 2주 정도의 시간이 빈다고 하더라고. 그동안은 자율행동을 해도 좋다고.”
“그래요?”
“그래서 말인데, 조금 있다가 엘브로드령 근처에서 내릴 거야. 나 혼자만.”
“네? 저희는 빼고요?”
“왜? 무슨 일 있어?”
메리와 피터가 놀라서 물었지만, 지크는 자세한 이야기를 숨겼다.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그래. 그러니 두 사람은 용병단에 돌아가서 쉬고 있어. 이미 크리스 단장님이랑은 끝난 이야기야. 허락도 받았고.”
“아…… 알겠어요.”
“흠.”
켈브리지 조합원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함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두 사람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지크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둘을 데리고 다닐 필요는 없지. 모습을 위장할 수 있는 건 나 혼자 뿐이기도 하고.’
지크는 그런 생각으로 마차를 얻어탔다가 엘브로드령 근처에 이르자 혼자서만 내렸다.
용병들과는 볼 일이 있어서라고 둘러댄 뒤에 헤어졌다.
‘엘브로드령과 황천의 계곡 사이에 있는 숲이라고 그랬지? 시간 좀 있으니 미리 답사나 다녀올까?’
지크의 발걸음이 빠르게 움직였다.
* * *
에스카는 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표적의 위치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지크 맥러플린이 후계자 시험을 위해 집을 떠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뿐이야. 단서가 없어, 단서가.’
유능한 추적 전문가를 고용해 족흔을 알아내 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발길이 중간에 끊긴 탓에 지크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 길이 없다.
‘텔레포트라도 썼으면 마력의 흔적을 쫓기라도 했을 텐데 그마저도 없으니…….’
그 말은 걸어서 이동했다는 뜻이 아닌가?
대체 어디로?
‘알렉스라는 놈을 찾아가 봐도 이렇다 할 정보는 없었지. 디스펠을 쓴다는 헛소리나 해대고. 젠장! 표적에 대해 아는 게 이렇게나 없다니.’
한 달이 지났는데 발루두크가 지시한 암살 임무를 아직도 끝내지 못했다.
에스카로선 불안한 게 당연했다.
‘이러다가 발루두크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하면 내 12인의 선구자 자리는…….’
이후는 상상도 하기 싫었는지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런 일이 현실이 되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지크를 찾아 죽이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단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추적 전문가에 의하면 지크가 향한 방향은 동남쪽이라고 했다.
출발할 때부터 목표를 정한 건지 정확하게 그쪽으로만 향했다고 한다.
게다가 동행이 껴 있는지 여성으로 짐작되는 발자국이 하나 있었다고.
‘분명 그 여자다. 그때 녹스를 죽일 때 지크와 같이 있던 소녀.’
증거는 없지만,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남쪽엔 뭐하러 간 거지? 가봤자 발로트, 아우크, 텐진 등, 별 볼일 없는 지방 도시만 잔뜩…… 아!’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에, 에스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맥러플린의 일공자가 추방당한 곳이 텐진 지방이라고 했지? 설마 형을 찾아 떠난 건가?’
얼추 가닥이 잡혔다.
단서가 나름의 도움이 됐다.
‘텐진 지방으로 가 봐야겠어. 피터 맥러플린이 살던 마을을 뒤지면 또 다른 단서가 나오겠지. 흐흐.’
새로운 실마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그때.
똑똑-
“에스카 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실험실의 문을 두드리는 부하의 말에 에스카의 미소가 사라졌다.
“손님? 누구 말이냐?”
“그게…….”
“나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남자를 보며 에스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놀란 나머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덤이었다.
찾아온 손님은 브라함의 환술사로 유명한 아즈라힐 존스턴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