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82화
‘드디어 주어졌네.’
기다리고 기다렸던 퀘스트였다.
문제는 아즈라힐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점.
‘좌표만 알면 아즈라힐한테서 얻은 텔레포트로 추적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럴 줄 알고 있다는 듯, 또 하나의 퀘스트가 올라왔다.
【서브 퀘스트 : 아즈라힐 존스턴 추적하기】
└아즈라힐 존스턴을 죽이기 위해선 녀석을 찾아야 합니다.
└아즈라힐 존스턴이 텔레포트 했던 장소로 가 마력의 잔향을 읽으십시오.
<조건>
└마력의 잔향 읽기
<보상>
└5차 스킬 숙련도 10,000 증가
└텔레포트 좌표
‘녀석이 텔레포트 했던 장소에 가서 마력의 잔향을 읽으라고?’
장소라면 기억한다.
지력 스탯 덕분에 남다른 기억력을 가지게 된 지크였으니까.
하지만 마력의 잔향을 읽는 법은 모른다.
‘마법을 쓰면 잔향이 남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따로 느껴본 적은 없는데…… 가보면 알려나? 기본적으로 마나를 감지할 순 있으니.’
어쨌든 당장 이동할 수밖에 없다.
마력의 잔향이 사라지기 전에.
지크가 애물단지 보듯 조합원들을 바라봤다.
“뭐해? 우유 마시지 않고.”
“저, 정말로 마십니까?”
“마셔라. 명령이다.”
지크의 말에 모두가 우유병을 집었다.
보스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
벌컥벌컥-
물처럼 시원하게 들이켠 조합원들이 빈 병을 바닥에 떨궜다.
“하나 더 마셔라.”
“예?”
“두 번 말하게 할 거냐?”
단호한 지크의 음성에 조합원들은 또다시 우유병을 집었다.
벌컥벌컥-
또 한 병을 끝내자 이제 우유가 얼마 남지 않았다.
“마셔라, 또.”
“…….”
명령을 거부할 자신이 없던 조합원들은 재차 우유를 마셨다.
세 병째였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몇 사람은 우유를 먹지 않았다.
채드와 그레그, 네이선이 그랬다.
그걸 뒤늦게 발견한 다른 조합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야, 말단! 너는 왜 안 마셔?”
“채드 님은 왜 안 마십니까?”
“우유가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레그 님.”
모두가 이의를 제기했지만 세 사람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인형처럼 가만히만 있을 뿐.
“아즈라힐 님! 이것 좀 보십쇼. 여기 우유를 안 마신 사람이 있습니다!”
“걔네는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르륵-
채드, 그레그, 네이선이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뭐, 뭐야!?”
남은 조합원들이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환각이 걷히고 현실이 보였다.
거품을 물고 죽어 있는 그레그의 시체가.
“너희가 오기 전에 녀석에게 테스트해 봤거든. 우유를 일정량 이상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아즈라힐이었던 지크가 꿀렁이며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경악한 눈으로 보던 조합원들의 귀에 사형선고가 들려왔다.
“정확히 세 병째 마시니까 저렇게 거품 물면서 죽더라.”
“뭐, 뭣?”
“어, 어억……!”
반응이 오기 시작한 조합원들이 저마다 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한동안 이어지던 꿈틀거림은 이내 심장과 함께 완전히 멎었다.
그 모습을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던 지크가 휙 몸을 돌렸다.
“이제 아즈라힐을 죽이러 가볼까?”
* * *
데칸에서 알아주는 마법 명가라면 보통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비그스란드, 맥러플린, 판테인이 3대 마법 명가로 유명하고, 그 뒤를 발도르와 데포르테가 잇는다.
하나, 어디까지나 예전의 순위였고 지금은 다르다.
판테인과 발도르 가가 반역을 저질렀기 때문.
그 탓에 5위였던 데포르테 가문은 어부지리로 3대 명가에 이름을 올렸다.
그 때문일까?
요즘 따라 부쩍 가문의 영애인 실리스 데포르테에게 구혼하는 남자들이 많아졌다.
눈앞에서 끈질기게 달라붙는 금발의 남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실리스 공녀. 그대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소. 이런 내 진심을 받아주지 않을 거요?”
“싫다고 몇 번을 말해요.”
실리스가 미간을 구기며 대놓고 거절했지만 남자는 그리 실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늘 아주 결판을 내고야 말겠다는 얼굴.
“약혼자도 아직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왜 이렇게 거절하는 거요?”
“전 아직 약혼할 생각이 없어요.”
“20살이면 혼기는 이미 찬 나이인데 없다니. 데포르테 가주님도 같은 생각이시오?”
“그, 그건…….”
실리스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안 그래도 아버지가 약혼 상대를 정하라고 몇 년 전부터 닦달했기에.
“혹시 맥러플린 가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거요? 마법 가문 2위라는?”
“그쪽에는 관심 없어요.”
피터 맥러플린이라고 했나?
이미 혼약을 위해 맥러플린 가문 장남의 초상화까지 받았지만 실리스의 눈에 차진 않았다.
‘그 정도면 인물도 빼어나고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싫어.’
원래 닦달하면 더 하기 싫은 게 사람 마음이다.
맥러플린의 일공자라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만 추천해 준 사람과는 결혼하기 싫다.
무엇보다 정략결혼 같아서 더더욱.
‘나는 운명 같은 상대를 원한다고.’
딱 보면 직감적으로 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
실리스는 그런 운명적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눈앞에 있는 금발의 남자는 취향이 아니다.
그걸 몰라서인지 상대는 오해하고 있었지만.
“설마 내 가문 때문에 거절하는 거요? 내 가문이 검술 명가라서?”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그렇고 저도 오러 유저에 대한 편견은 없으니까. 무엇보다 라인하르트 가문이라면 명가 중의 명가이니 정략결혼으론 충분한 상대죠. 그렇지 않다면 저희 가문에 뭐하러 들어오게 했겠어요?”
“그걸 알면서 왜 자꾸 거절하는 거요?”
“그냥…… 마음이 안 끌려서요.”
설명은 불충분했지만 실리스로선 솔직한 답변이었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일공자 잭이 그걸 받아들이느냐가 관건이었지만.
다행히도 잭은 납득하는 얼굴이었다.
평소와 달리 표정이 굳은 걸 보면.
“알겠소.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는데 더는 뭐라 할 수 없는 노릇이지.”
‘드디어 마음을 바꾸나?’
몇 달간 이어진 끈질긴 애정 공세를 이제야 접는 것인가?
그런 기대를 애써 감춘 실리스가 잭을 바라봤다.
고개를 주억이며 뭔가 결심을 내리는 듯하더니 마침내 입을 연다.
“어쩔 수 없이 장인어른을 설득해야겠군.”
“뭐, 뭐라고요?”
잭은 그리 말하며 몸을 돌렸다.
실리스가 사색이 된 얼굴로 따라붙었다.
“기, 기다려요! 어디 가는 거예요!?”
잭은 실리스를 무시한 채 공작가를 누비며 누군가를 찾았다.
“아, 저기 계시군.”
데포르테 공작가의 가주, 호세 데포르테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도 심각한 얼굴로.
“그런 부탁은 받을 수 없네! 당장 우리 가문에서 나가시게!”
뒤따라오던 실리스가 그 외침에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아, 아버지?”
“지금 대화하는 분이 누군지 아시오?”
잭의 말에 실리스의 시선이 상대에게로 향했다.
“알아요. 윌스턴 가문의 벨키르 윌스턴 후작이에요. 원래 사이좋으신 분들인데 어째서…….”
“계급이 다른데 서로 사이가 좋단 말이오?”
“저희 가문은 사람만 좋다면 그런 건 따지지 않는다는 풍조거든요. 더구나 우리 가문과 맞닿은 지역에 윌스턴 영지가 있으니 사이가 좋은 것도 이상하지 않죠. 저와 헤밀톤 백작가의 사이가 좋은 것처럼.”
“그렇구려. 어쨌거나 장인어른이 저렇게 화내는 건 처음 보는군.”
“저도요…….”
평소라면 멋대로 장인어른이라는 호칭을 쓰지 말라며 소리쳤겠지만 실리스는 그런 것도 잊고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윌스턴 후작에게 언성을 높인다는 건.
“호세 공작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공작님에게도 좋은 제안입니다.”
“더 들을 것도 없으니 썩 나가래도!”
“헤밀톤 백작이 아고스 백작을 죽였습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영지전을 벌인 것도 모자라 항복하는 백작을 아주 잔혹하게 참수해 버렸단 말입니다. 그걸 이대로 좌시하고만 계실 겁니까?”
“그쪽 나름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우리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아니요. 끼어드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공작님이 곤란해지실 겁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이미 인근의 수많은 귀족이 죽은 아고스 백작의 편을 들어주며 연합을 만들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여하는 귀족은 많아질 테고 끝내 헤밀톤 영주를 몰아내야 한다는 뜻을 세우겠지요. 그런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데포르테 가문 때문입니다.”
“…….”
“연합이 당장이라도 헤밀톤 영주성을 치지 않는 건 데포르테 가문이 헤밀톤 백작과 친분이 있어서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공작님이 본의 아니게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있는 겁니다.”
“본의 아니게라니. 말은 똑바로 하시게. 지키고 싶어서 지키는 것이니.”
“왜 그렇게 헤밀톤 백작을 지켜주시는 겁니까? 그자는 투항하는 아고스 백작을 가차 없이 죽인 살인마입니다.”
“내가 헤밀톤 영주의 말을 들었네만, 사실이 아니네. 아고스 백작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암살당했어. 직접 죽였다는 건 와전된 소문일 뿐이야.”
“그 암살을 지시한 사람이 헤밀톤 영주가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애초에 딸이 겁탈당했다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도 헤밀톤 영주 아닙니까?”
“자네… 내가 알던 윌스턴 후작이 맞는가? 딸 가진 사람이 그런 인간답지도 않은 소릴 하다니. 믿기지 않는군.”
“상황을 냉정하게 보자는 거지요. 자꾸만 이렇게 헤밀톤 영주 편을 들면 여러모로 곤란해지십니다?”
“그래서 나더러 뒤로 물러나 있으라는 건가? 헤밀톤 영주가 연합군에 의해 침략당해도?”
“예. 그렇게만 하시면 공작님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쩌면 연합군이 헤밀톤 영지를 일부 나눠줄지도 모르죠.”
“끝까지 역겨운 소리만 하는군. 내 마음은 바뀔 일 없으니 당장 돌아가시게!”
매몰찬 축객령에도 윌스턴 후작은 물러날 생각을 안 했다.
끈덕지게 설득할 뿐.
“그러지 말고 생각 좀 다시 해보시지요. 안 그러면 후회하실 겁니다.”
“호위병! 이 자를 당장 끌어내게!”
의리를 중시하는 호세 데포르테 공작으로선 재고의 여지도 없는 제안.
축객령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후우…… 결국 이렇게 나오시는 겁니까? 어쩔 수 없군요.”
후작이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그 순간이었다.
“……!”
후작의 얼굴이 별안간 물결처럼 일렁였다.
호세 공작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사이, 후작의 얼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웬 중년 남자의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
“이거 듣던 대로 고집이 만만치 않은 양반이군. 결국 본모습을 드러내게 만들다니.”
“너, 넌 누구냐!”
“처음 뵙겠소. 아즈라힐 존스턴이라고 하오. 브라함의 환술사라고 해야 더 잘 알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