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84화
‘데포르테의 공녀를 구하라고?’
지크가 주위를 둘러봤다.
공녀로 짐작되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아까 봤던 중년인이 딸로 짐작되는 여성을 끌어안고 있다.
‘아마도 저 아버지가 데포르테 가문의 가주겠지. 딸이 실리스 공녀고.’
퀘스트 내용대로 실리스 공녀는 환각에 걸렸는지 허공을 보며 발작하고 있었다.
“실리스. 제발 정신 차리거라. 실리스!”
아버지는 딸을 어떻게든 환각에서 깨우기 위해 흔들고 있었고.
지크가 그들을 향해 곧장 움직이자 아즈라힐의 눈썹이 꿈틀댔다.
“왜 대답이 없지?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힐끗 시선을 준 지크는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아즈라힐의 얼굴에 황당함이 번졌다.
“허. 죽여야 할 놈이 한 사람 더 늘었…….”
아즈라힐이 지크에게 마력탄을 사용하려던 그때였다.
“잠시만요. 제가 해결할게요.”
“응? 자넨…….”
지크가 실리스 공녀를 보더니,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발작이 멎고 표정이 편안해졌다.
“이제 됐습니다. 환각은 풀렸어요.”
“뭐? 그게 정말인가!?”
아버지인 호세 공작이 딸의 얼굴을 살폈다.
아까완 달리 잠을 자는 듯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다.
호세 공작의 눈이 기적을 마주한 듯 서서히 커졌다.
반면 아즈라힐은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고.
‘……내 환각을 해제했어?’
그러거나 말거나 할 일을 마친 지크가 공녀에게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안도감에 눈물이 흐를 것 같던 호세는 홱 고개를 들었다.
딸을 구해준 은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자네는……?”
“지크라고 합니다.”
“지크……?”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럴 만한 게 지크의 이름은 그리 유명하지 않다.
맥러플린 가의 사공자라면 몰라도.
[환각 마법 해제하기 완료!]
[돌발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보상으로 5차 스킬 숙련도 5,000이 증가합니다.]
[8성 성취까지 남은 숙련도 22,080/100,000]
공녀를 구하고 보상을 얻은 지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다가 표정을 굳혔다.
메인 퀘스트가 아직 남았으므로.
지크의 시선이 아즈라힐에게 향했다.
“당신인가? 실리스 공녀에게 환각을 건 사람이?”
“네놈. 내 환각을 어떻게 푼 거지?”
“내 질문이 먼저야. 아, 그 전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지크는 환영 장막을 사용했다.
츠츠츠츠-
지크와 아즈라힐이 있는 공간이 장막에 가려졌다.
정확히는 다른 환영으로 덮어씌웠다.
“이제 대화가 새어나갈 일은 없을 거야. 이 안에서 치고받고 싸워도 다른 사람 눈에는 가만히 서 있는 걸로만 보일 테고.”
아무렇지 않게 환영 마법을 사용하자 아즈라힐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퍽 놀란 눈치였다.
“……어떻게 한 거냐? 나 말고 환술을 익힌 사람은 없을 텐데?”
“없긴 왜 없어. 여기 있잖아?”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아즈라힐은 당장이라도 놈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알고 싶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자신이 창조해낸 환술을 사용하는 건지.
어떻게 환술 하나로 선구자 자리에 오른 자신과 똑같은 형식의 환술을 구사할 수 있는 건지.
“그보다 물어볼 게 많아. 아즈라힐.”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지?”
“너한테 질문을 허락한 적은 없어.”
건방진 대답이었지만 아즈라힐은 그보다 상대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지크라고 했나?’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이내 기억을 떠올린 아즈라힐이 씩 웃었다.
“그렇군. 영지전을 승리로 이끈 마검사. 그리고 에스카가 쫓던 타깃. 그게 바로 네놈이었군.”
“누가 날 쫓아?”
“놈에겐 미안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표적은 내가 가로채야겠어.”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아즈라힐이 손을 들었다.
하룻강아지를 상대하는 데는 지팡이도 필요 없었다.
조금 전에 시전했던 정신 붕괴 한 방이면 뇌가 녹아버리는 듯한 두통에 시달릴 테니.
“말해라. 어떻게 환술을 사용하는 거지?”
“그걸 내가 왜 말해?”
“……?”
생각보다 멀쩡한 모습에 아즈라힐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떻게 된 거지? 방금 놈에게 정신 붕괴를 시전했는데?’
시전된 마법은 분명히 지크의 머리로 흡수되듯 스며들어 갔다.
그런데 인상을 찌푸리지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물론 당사자인 지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한테 쓰려던 마법이 정신 붕괴였어? 이걸로 고통스럽게 해서 내 입을 열게 하려고?”
‘내 마법을…… 간파했다고?’
아즈라힐의 눈이 다시금 커지는 그때, 지크가 손을 뻗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손아귀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술식이 생성되며 마력이 느껴졌다.
‘무영창?’
놀란 아즈라힐이 서둘러 마력 방벽을 펼쳤다.
상대의 마법을 막는 데엔 더 큰 마력으로 막는 수밖에 없다.
터엉-!
지크가 시전한 마법이 방벽에 막혀 흩어졌다.
“오, 뭐야? 막았어?”
정신 붕괴를 되돌려주던 지크는 진심으로 놀랐다.
설마 자신의 마법을 막아낼 줄이야.
하지만 놀란 건 아즈라힐도 마찬가지였다.
‘뭐냐, 이 무식한 마력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나랑 대등한 마력이라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방벽을 느끼며, 아즈라힐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러 블레이드조차 흠집 낼 수 없었던 방벽이 녀석의 마법 한 방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자신과 대등한 마력을 지녔다는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죽여야 한다. 환술에 대한 정보고 나발이고 이 자리에서 놈을 죽여야 해.’
원래대로라면 정신 붕괴로 천천히 고문하면서 환술에 대한 정보를 뜯어낼 요량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보다 떨어지는 실력이었을 때의 이야기.
이 정도로 수준 차이가 없는 상대라면 고문할 여유도 없다.
그런 것에 굴복하지도 않을 테고.
츠으으읏-
아공간을 사용한 아즈라힐이 오랜만에 지팡이를 꺼냈다.
상대의 격에 맞춰 제대로 상대하겠다는 의미였다.
“아공간? 그렇다면 악마의 술법을 배웠다는 뜻인데…….”
중얼거린 지크가 히죽 웃었다.
아즈라힐로부터 얻어야 할 정보가 추가됐다.
“좋은 말로 해서는 불지 않겠지?”
지팡이를 꺼내 마력을 모으는 걸 보면 순순히 입을 열 것 같진 않다.
대화는 나중에 하기로 한 지크가 여유롭게 다가갔다.
마력 차단을 시전하고서.
“……!”
순간 끌어모았던 마력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자, 아즈라힐의 얼굴에 당황이 묻어나왔다.
‘어떻게 된 거야? 마력이 완전히 사라졌잖아?’
상대를 압살해버리기 위해 거대한 마력을 모아놨더니 한순간에 증발해버렸다.
아즈라힐로선 말도 안 되는 기현상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
당황을 뒤로하고 재차 시도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도 되는 듯 마력을 모아도 어딘가로 줄줄 새어나간다.
‘뭘 한 거지? 디스펠? 아니. 디스펠은 이렇게 지속해서 마력을 증발시킬 수 없어.’
뭐가 됐든 상대가 벌인 짓이라는 건 분명했다.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저 얼굴이 그 증거다.
“왜 그래? 지팡이에 뭐 문제 생겼어?”
“무슨 짓을 한 거냐?”
“지금 그런 게 중요할까?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처지인데.”
츠으으읏-
지크가 아공간에서 깃털 검을 꺼냈다.
마찬가지로 사용하는 아공간에 아즈라힐의 동공이 확장됐다.
“설마 그분에게 받은 건가?”
“그분? 누굴 말하는 거지?”
“아닌가 보군.”
아즈라힐은 입을 꾹 닫았다.
더 이상의 정보는 주지 않겠다는 듯.
팔을 잘라도 입을 열 것 같지 않은 단단한 모습이었지만 지크는 혹시나 싶어 물었다.
“대강은 알고 왔어. 네가 뭘 꾸미고 있는지. 헤밀톤 광산에서 재료를 얻으려고 이런 짓을 벌인 거잖아? 맞지?”
“알면서 뭘 묻는 거지?”
“몇 가지 추가로 알고 싶은 정보가 있거든.”
“…….”
“내가 묻고 싶은 건 크게 세 가지야. 첫째, 광산에서 무슨 재료를 얻으려는 건지. 둘째, 재료로는 뭘 만들 셈인지. 셋째, 마을 사람들을 마도스교에 끌어들여서 뭘 할 작정인지.”
“그걸 왜 궁금해하지? 너완 하등 상관없는 일일 텐데?”
“상관 있어. 알려줄 순 없지만.”
12인의 선구자의 목적을 알면 나머지 선구자들을 찾기도 수월할 거다.
선구자들을 찾으면 퀘스트도 주어질 테고.
‘그럼 한층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지.’
그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기에 지크는 입을 닫았다.
아즈라힐도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내가 말할성싶으냐?”
“그럼 말하게끔 해주지.”
지크가 아즈라힐에게서 습득한 환각 마법을 사용했다.
환각으로 팔다리를 베며 정신적 고통을 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즈라힐은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환술을 쓰려는 건가? 아쉽지만 9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에겐 환술이 걸리지 않는다. 나한테 써봐야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거지.”
“아, 그래? 좋은 정보 고마워.”
놈의 말대로 환술을 사용해도 먹히는 기색이 아니었다.
즉시 취소시킨 지크는 깃털 검을 집어넣고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배니쉬 위드 포이즌(Banish with poison).”
무영창으로 스킬을 시전하자 작은 폭발과 함께 지크의 몸이 독 안개를 뿌리며 사라졌다.
아즈라힐의 눈살이 찌푸려진 것은 그때였다.
‘이건…… 녹스 베노마이어의 독 마법이 아닌가?’
서열 7위의 마법을 녀석이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자신의 환술도 그렇고.
의문이 몰아쳤지만, 그것도 잠시.
“쿨럭.”
아즈라힐의 입가로 선홍빛 선혈이 흘러내렸다.
안개 속 어디선가 지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지금 독에 중독됐다. 예상으론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죽겠지. 동료의 독이니까 더 잘 알지?”
“흥, 동료는 무슨.”
비릿한 웃음을 흘린 아즈라힐이 심장을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시간이 없다. 빨리 불어. 내가 한 질문 중 하나라도 답하면 해독해 주지.”
“후후,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살려줄 생각도 없으면서.”
죽음을 각오한 듯, 아즈라힐은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지크로선 난감한 상황.
“정말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겠다고?”
“죽으면 죽는 거지. 너 따위에게 알려줄 정보란 없다.”
아즈라힐이 죽어가는 게 눈에 보였는지 카르볼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지크! 녀석에게 그걸 물어봐, 어서!
‘알았어.’
지크는 즉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이거 하나만 묻자. 리치 드래곤에 대해 알고 있나?”
“리치 드래곤이라…….”
이어진 대답에, 지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