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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86화 (86/112)

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86화

어두컴컴한 공간.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공간에, 실리스는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누, 누구 없어요? 여기가 대체…….”

“흐흐흐.”

순간 대답처럼 들려온 것은 음흉한 웃음소리.

한 명이 아니었다.

“흐흐흐.”

“흐흐흐.”

십여 명의 남성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실리스는 순식간에 건장한 남성들에게 둘러싸였다.

“하, 하지 마. 다가오지 마…….”

상체를 벗고 있는 남성들.

욕망에 번들거리는 눈빛.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뭔지.

자신에게 하려는 게 뭔지.

곧 있으면 당할 일까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려움에 몸이 굳었다.

실리스는 5서클의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공포에 잠식된 나머지 마법을 쓸 생각도 못 했다.

남성의 손길이 닿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버렸으니까.

“이, 이러지 마세요. 제발…….”

눈물이 금세 차올라 바닥을 적셨다.

거친 손길에 옷이 찢긴다.

그 와중에 실리스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충격에 뇌가 정지된 기분이었다.

도돌이표처럼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는 걸 보면.

“이러지 마세요. 제발, 그만 하세요. 누가 좀 도와줘. 제발. 아무나 날 좀 도와줘…….”

희망의 불이 점점 꺼져간다.

절망에 완전히 지배되려던 그때.

번쩍-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리쬐었다.

그와 동시에 옷을 찢던 남성들의 손길이 멈췄다.

빛은 점점 크기를 더했고 남성들은 벌레처럼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 쳤다.

실리스가 희망을 본 것은 그때였다.

‘손?’

빛 사이로 누군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고민할 것 없이 그 손을 잡았다.

구원의 손길이었다.

* * *

“하악, 하악…….”

“괘, 괜찮으세요? 아가씨?”

정신을 차린 실리스가 눈을 깜박거렸다.

남정네들은 어디로 가고 익숙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내 침실?’

전담 시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꾼 건가?”

지독한 악몽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악몽이 아니라는 건 시녀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환각? 내가 환각에 걸렸었다고?”

“네…… 브라함의 환술사라는 자가 나타났었는데 실은 윌스턴 후작으로 변신을 했었대요. 뭔가 공작을 펼치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정체를 드러내고 아가씨에게 환각을…… 정말로 기억 안 나세요?”

그 말을 들으니 기억났다.

환각에 걸리기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녀가 보충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게 된 거예요. 저도 보진 못했지만 그런 일이 있었대요.”

“그랬구나…….”

모든 정황을 듣자 기억이 좀 더 선명해졌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환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

“그건 갑자기 나타나신 공자님 덕분이에요.”

“공자님?”

“지크 맥러플린 공자님이요.”

뜬금없는 이름에 토끼 눈이 됐지만, 시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모든 정황을 알 수 있었다.

“그 지크라는 분이 나타나서 늦기 전에 환술을 풀어줬단 말이지……?”

“맞아요.”

‘그럼 꿈속에서 내가 잡았던 손이 바로……?’

실리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디 가세요?”

“그분을 만나고 싶어.”

“누구요?”

“지크 맥러플린 공자님. 아직 저택에 계시지?”

“네. 그렇긴 한데…….”

“안내해 줘.”

실리스는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절망 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 * *

실리스가 깨어난 비슷한 시각.

“끄응…….”

데포르테 가문의 손님인 잭 라인하르트 또한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셨어요? 공자님?”

시녀의 물음에 잭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상황을 파악했다.

실리스완 달리 직전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죠?”

“반나절 정도 됐습니다.”

그래서일까?

“후우…….”

잭의 얼굴엔 절망과 한탄이 뒤섞여 있었다.

기절 직전에 누구와 싸우다 이 꼴이 됐는지 기억했으니까.

‘누구였는진 몰라도 엄청나게 강한 자였어. 내 오러 블레이드가 전혀 먹히질 않는다니…….’

당시 잭은 자신이 검을 겨눈 상대가 브라함의 환술사라는 것도 몰랐다.

그저 실리스 공녀에게 이상한 수작을 부린 걸 보고 눈이 돌아가서 공격했을 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실리스 공녀는요? 어디 다친 덴…….”

“아가씨는 괜찮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괜찮다고요? 제가 기절할 때까지만 해도 정신을 못 차리지 않았나요?”

“그랬는데 다행히 맥러플린 가문의 공자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맥러플린 가문?’

잭은 바이소라는 인근 동맹국의 국민이었지만 데칸의 3대 마법 명가 이름쯤은 외우고 있었다.

데포르테 가문에서 맥러플린 가문의 일공자와 혼약 이야기가 오갔다는 것 또한.

‘설마 맥러플린의 일공자인 피터라는 녀석을 말하는 건가?’

순간 잭의 눈빛에 질투심이라는 불똥이 튀었다.

실리스에게 첫눈에 반한 그로서는 다른 남자의 접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설령 실리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일지라도.

‘실리스는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실리스 공녀와 혼인하는 건 나여야만 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잭이 시녀에게 물었다.

“어디입니까? 맥러플린 공자가 있는 방은.”

* * *

지크가 머무는 방으로 향하던 실리스는 긴장했다.

‘날 구해줬잖아. 그러니까 고마움을 표시하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잖아. 그런데…….’

가슴에 손을 대자 심장이 폭발하듯 펌프질하고 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지?’

가문이 서열 3위에 오르며 구혼자가 급증했다지만, 원래도 아름다운 외모 탓에 찾아오는 남자가 많던 실리스였다.

심지어 잭처럼 타 왕국에서조차 찾아와 구혼을 청하곤 했다.

그렇게 수많은 구혼자를 만나봤지만 실리스는 한 번도 두근거림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 누구도 운명의 상대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랬는데.

‘지금은 달라.’

아직 상대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그 이유는 실리스도 어렴풋이 짐작했다.

‘내가 그토록 찾던 운명의 상대. 그게 지크 공자인 거야.’

사실을 깨달았을 땐 어느새 지크의 방문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두방망이질하는 심장을 애써 달랜 실리스가 침을 삼키곤 문을 두드렸다.

똑똑―

“지크 공자님 계신가요?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예.”

안에서 소리가 들리며 이윽고 문이 열렸다.

생각보다 어린 소년이 나타나자 실리스의 두 눈이 커졌다.

“지크 공자님 되세요?”

“예. 맞습니다. 실리스 공녀님이시죠?”

“네.”

자신을 알아보는 걸 보니 위기에서 구해준 그 사람이 맞나 보다.

‘7서클이라더니 생각보다 더 어리잖아? 잘해야 16살 정도로 보여.’

그렇다고 남자다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20살인 자신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들어.’

지크에 대한 첫인상은 합격이었다.

준수한 외모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운명의 상대라는 생각에 모든 부분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마디로 첫눈에 반한 것이었다.

갑자기 말 없는 모습에 지크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공녀님. 저한테 하실 말이라도……?”

“아, 아, 그, 그…….”

남자 앞에서 한 번도 말 더듬어본 적 없던 실리스가 자신의 모습에 내심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크는 눈을 맞추며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려고요.”

“아, 환각을 해제해준 것 말입니까?”

“예. 이야기는 전부 들었어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를 구해주신 것도, 공작가를 구해주신 것도.”

“별거 아니었는데요, 뭘.”

지크는 겸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실리스의 눈엔 그 모습마저 설렘 포인트였지만.

“저기, 지크 공자님.”

“네.”

“시간이 되시면 그, 저랑…….”

좀 더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말하려던 그때.

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웬 방해꾼이 나타났다.

“실리스 공녀.”

“잭 공자?”

난데없이 나타난 사람은 자신에게 구혼했던 잭 라인하르트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시오?”

“아아, 전 괜찮아요. 그보다 이야기 들었어요. 저를 위해 나서줬다고요. 정말 감사해요.”

“하핫, 남자로서 당연한 행동을 한 것뿐이오. 그나저나…….”

잭의 시선이 실리스와 지크를 번갈아 봤다.

“공녀님은 왜 여기 계시는 거요?”

“아, 여기 계신 공자님에게 고맙단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어요.”

“그대가 실리스 공녀를 구해준 맥러플린 가의 일공자였구려.”

‘일공자?’

지크가 눈살을 찌푸리든 말든, 잭이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일공자. 실리스 공녀를 구해줘서.”

얼결에 손을 맞잡은 지크는 순간 가해진 아귀힘에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놈 봐라? 왜 힘을 주고 난리야? 힘자랑이라도 하려는 건가?’

갑자기 악수를 청하더니 손아귀에 온 힘을 주고 있다.

물론 근력 스탯이 3천을 넘어가는 지크로선 어린아이가 힘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갑자기 일공자라고 하질 않나, 여자 앞에서 힘자랑하질 않나, 웃긴 놈이네.’

지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잭은 당황하고 있었다.

‘뭐지? 왜 반응이 없는 거야?’

아프다고 인상을 찌푸려야 할 상대가 평온한 얼굴로 받아주고 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힘에 맞서며 적당히 힘을 주기도 한다.

‘나와 힘이 같다고? 오러 마스터인 나와?’

말도 안 되는 일.

고작해야 16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자신과 같은 힘을 지녔을 리가 없다.

‘마법으로 힘을 키웠나? 뭐가 됐든 같은 일공자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진심으로 힘을 줘볼까 여기는 그때, 실리스가 말했다.

“잭. 이분은 일공자가 아니라 사공자예요.”

“음?”

오해와 동시에 잭의 손아귀 힘도 풀렸다.

“사공자라고 했소?”

“소개가 늦었습니다. 사공자인 지크 맥러플린이라고 합니다.”

지크의 소개에 잭이 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다가 뒤늦게 예를 차렸다.

“하하, 이거 오해해서 미안했소. 일공자가 아니라 사공자였구만.”

“그런데 어디의 누구신지…….”

“아, 나도 소개가 늦었소. 바이소 왕국 라인하르트 가문의 일공자 잭 라인하르트라고 하오.”

잭은 소개하면서도 콧대를 높였다.

자신의 이름을 대면 검술 명가라는 걸 알고 놀라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지크의 반응은 덤덤했다.

“그렇군요.”

그게 끝이었다.

뭐, 어쩌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이것 봐라? 우리 가문을 듣고도 놀라질 않아?’

검술 명가로서 자존심이 흔들린다.

그래서였을까?

잭의 입에서 충동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지크 공자. 듣기론 16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에 7서클이나 되는 실력자라고 하던데, 어떻소? 나와 대련해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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