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90화
‘이건……?’
손을 뗀 지크가 다시 한번 벽을 짚어봤다.
그러자 동일한 메시지가 떠오른다.
‘이 벽 너머에 마력이 있다고?’
확실했다.
벽에 손 댈 때마다 메시지가 떠오르는 걸 봐서는.
‘파보면 알겠지.’
굴을 파기 위해선 곡괭이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지크에게 그런 건 없어도 된다.
돌무더기도 조각내버리는 오러 블레이드가 있었으니까.
츠츠츠츠-
기다란 검의 형상을 만들어낸 뒤 방향을 잡고 벽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카각! 카가각!
돌무더기가 흩날리며 공간이 늘어난다.
동굴이 점점 깊어져 간다.
‘나중에 작업반장이 알면 난리 치겠군.’
지크로선 단서를 발견한 이상 놓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팔자에도 없는 채광을 하는 거였지만.
카각! 칵!
벽면이 두부처럼 조각나며 돌무더기가 우수수 떨어진다.
그렇게 굴을 파대던 지크는 마력이 느껴지는 지점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43m 지점에서 마력이 감지되었습니다.]
[26m 지점에서 마력이 감지되었습니다.]
……………………
………………
[1m 지점에서 마력이 감지되었습니다.]
혼자서 59m를 파내고 기어코 1m를 남겨둔 시점에서 지크는 마지막 돌무더기를 파헤쳤다.
‘응? 저건?’
돌무더기 사이에 푸른색의 뭔가가 박혀 있었다.
칙칙한 광물들 사이에서 보석이라도 되는 듯 홀로 빛을 발하고 있다.
산삼을 캐듯 조심스럽게 오러 블레이드를 이용해 주변의 돌무더기를 제거했다.
그렇게 꺼낸 푸른색의 광물은 어른 머리통만 한 크기였다.
‘생각보다 큰데?’
분명히 이 광물에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마력석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의 광물이었다.
‘이거야. 아즈라힐이 원했던 광물이.’
아즈라힐은 알고 있던 것이다.
헤밀톤 광산 깊숙한 곳에 이 이름 모를 광물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이걸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뭔지 알까?’
자문하던 지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광물에 대해 안다 하더라도 보여줬다간 그 여파가 어떨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여기서 나오는 흔한 철광석보다 수십, 수백 배 비싼 광물이라면…….’
광부들 사이에서 광물을 차지하기 위한 내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광물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퍼지는 순간, 12인의 선구자가 정보를 숨길 요량으로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모를 일이었고.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당장은 나만 알고 있어야겠어.’
지크는 아공간을 열어 푸른빛의 광물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금 오러 블레이드를 운용했다.
[3시 방향 2m 지점에서 마력이 감지되었습니다.]
[4시 방향 3m 지점에서 마력이 감지되었습니다.]
[11시 방향 1m 지점에서 마력이 감지…….]
광산 곳곳에 잠들어 있는 광물을 캐내기 위해.
* * *
‘더 있지만 여기까지만 할까?’
적당히 광물을 캐고 나온 지크는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지나가던 시녀에게 물어보니 영주는 트레이시의 방으로 갔다고 한다.
“영주님. 지크입니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며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잠들어 있는 트레이시였다.
그런 그녀를 영주와 데포르테 부녀가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고.
“지크 경. 광산은 잘 구경하고 왔소? 찾고자 하는 것은?”
“글쎄요. 평범한 광산과 별다를 게 없더군요.”
“역시 그런가?”
물론 거짓말이었다.
푸른빛의 광물을 엄청 많이 캐왔다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하지만 영주는 지크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처음부터 광산에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깊게 생각할 상황이 아니거나.
‘왠지 분위기가 안 좋은데…….’
근심·걱정으로 가득 찬 백작을 향해 지크가 물었다.
“트레이시는요?”
“조금 전에 잠들었소.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아고스 백작이 죽은 뒤로 트라우마를 극복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요?”
“아닌가 보오. 하긴 그런 일을 당했는데 쉽게 잊혀질 리가 없지…….”
‘공황 장애, 대인기피, 뭐 그런 건가?’
당장은 상태가 호전된 듯 보이나, 또다시 사람들, 특히 남자들을 마주하면 지금처럼 발작을 일으킬 것이다.
‘극복하기 쉽지 않겠어. 내가 돕지 않으면.’
지크에겐 트레이시를 도울 방법이 있었다.
환각을 이용해 좋은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지우진 못하겠지만 덮어씌우는 건 가능하지.’
그런 생각으로 지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제가 트레이시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어떻게 말이오?”
지크는 환술을 이용하면 도움이 될 거라며 설명했다.
“환술? 지크 경이 환술도 할 수 있었소?”
“예. 브라함의 환술사에 비하면 미천한 실력이지만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 지크 경이 우리 딸의 환술을 해제해 줬다고.”
데포르테 공작도 지크의 말에 힘을 실어줬다.
헤밀톤 백작으로선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내 딸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해도 좋소. 부탁드리겠소, 지크 경.”
“예. 그럼 제가 해결해 보겠습니다.”
허락을 받은 지크가 트레이시의 머리에 손을 대려는 그때였다.
[돌발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응?’
난데없이 퀘스트가 떠올랐다.
무슨 퀘스트인가 봤더니 별거 아니었다.
【돌발 퀘스트 : 트레이시 치료하기】
└버크 헤밀톤 영주의 딸인 트레이시 헤밀톤이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환각 마법을 이용해 좋은 기억을 심어주고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도와주십시오.
<조건>
└환각 마법으로 트레이시 치료하기
<보상>
└5차 스킬 숙련도 6,000 증가
트레이시를 환각에서 치료해 주기였다.
어차피 하려던 지크의 행동이 퀘스트로 주어진 것이다.
‘어려운 퀘스트는 아니야. 아닌데…….’
지크는 이번 퀘스트로 시스템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째, 시스템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점.
지크의 행동을 보고 뒤늦게 퀘스트를 준 걸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둘째, 시스템은 퀘스트를 통해서만 보상을 줄 수 있다는 점.’
트레이시를 치료함으로써 보상을 주고 싶었다면 그냥 치료 후에 줬어도 된다.
그런데 그 전에 퀘스트를 내림으로써 보상을 걸었다?
어쩌면 퀘스트라는 조건 없이는 보상을 줄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흠, 나름대로 귀중한 단서를 얻었네.’
시스템에 대해 한 걸음 더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보상을 준다는데, 나야 거절할 이유는 없지.’
퀘스트를 수락한 뒤 원래 하려던 행위에 집중했다.
트레이시의 머리에 손을 얹고 환각을 씌우는 작업을.
* * *
“된 건가? 지크 경?”
“예, 끝났습니다. 이제 트레이시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수고했네, 수고했어.”
영주가 어깨를 두들기자 지크는 괜히 이마를 훔쳤다.
사실 그렇게까지 힘든 작업은 아니었다.
환각 마법을 통해 넣고자 하는 내용을 설계하고 주입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옅어지도록 좋은 기억만 잔뜩 집어넣었지. 더 이상 그때의 고통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이렇게 해도 되나 싶었지만, 영주가 허락한 일이고, 선의의 마음으로 행한 일이다.
기억을 조작하는 거창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떠올려 보려고 해도 안갯속에 있는 듯 기억은 안 날 거야. 그 정도로 옅은 환각을 주입했으니까.’
대신 사람에 대한 좋은 느낌만 남도록 신경 써놨기에 그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일어났네.”
“트레이시, 정신이 드느냐?”
잠에서 깬 트레이시는 눈을 비비고 있었다.
뭔가 좋은 꿈을 꿨는지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를 짓고서.
“하암, 잘 잤… 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트레이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버지와 데포르테 부녀, 지크가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내심 안도했다.
트레이시는 딱 봐도 광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잠시 이야기하고 있었단다. 그 사이에 네가 잠들었고…….”
“그랬나요? 죄송해요, 자버려서.”
“아니다, 아니야.”
트레이시가 사과하자, 데포르테 공작은 손을 저으며 영주의 눈치를 살폈다.
영주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기에.
그 모습을 본 트레이시가 깜짝 놀랐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아, 아니, 눈에 뭐가 들어가서…….”
되지도 않는 변명으로 눈물을 훔친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레이시가 피곤해 보이니 우리는 가서 쉽시다.”
“그러죠.”
“너는 좀 더 자고 있거라. 트레이시.”
“아, 아버지?”
도망치듯 밖으로 나온 영주의 뒤로, 데포르테 부녀와 지크가 따라 나왔다.
그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감격의 눈물이었다.
“자네 왜 그러나?”
“기뻐서 그럽니다. 딸이 원래대로 돌아온 게 너무 기뻐서…….”
“하긴 내가 보기에도 트레이시가 안정을 되찾은 것 같더군.”
“지크 공자가 성공했군요?”
눈물을 훔친 영주가 그제야 지크를 돌아봤다.
그 어느 때보다 고맙다는 눈길로.
“정말 고맙소, 지크 경.”
“아닙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걸요.”
“아니오. 그대가 아니었으면 트레이시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었을 거요. 정말 고맙소.”
지크의 손을 맞잡고 연신 감사 인사를 전하는 영주에게서, 지크는 아버지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지크 경. 이런 상황에 물어보긴 그렇지만 혹시 약혼녀가 있소?”
약혼이라는 말에 당사자인 지크보다 곁에 있던 데포르테 부녀의 귀가 쫑긋했다.
“아니요, 없습니다만 그건 왜 물으시는지……?”
“그대를 꼭 곁에 두고 싶어서 그러오. 마음 같아선 작위라도 주고 싶지만 공작가의 자제라는 걸 알게 된 이상 그럴 수도 없는 노릇 아니오?”
한마디로 지크를 사위로 삼고 싶다는 소리였다.
“어떻소? 트레이시와 나이 차도 별로 안 나는 걸로 아는데…….”
“자, 잠깐만! 헤밀톤 백작. 아니, 버크!”
당황한 데포르테 공작이 황급히 막아섰다.
“지크 경은 임자가 이미 있네.”
“ 있다고요? 그게 누구입니까?”
“……?”
영주는 물론 당사자인 지크 또한 궁금하다는 눈으로 공작을 바라봤다.
자신도 모르는 약혼녀가 있다니.
그게 누구란 말인가?
데포르테 공작이 얼버무렸다.
“아무튼 있네! 그러니 괜히 넘보지 마시게.”
“설마 공작님이…….”
“이런 곳에서 하기엔 부적절한 이야기 같군! 얼른 방으로 가세나.”
당황했는지 서둘러 영주의 등을 떠미는 호세 공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