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104화
‘퀘스트가 아니었으면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지.’
어둠의 군주가 도착하고 난 직후.
눈앞에 기다렸다는 듯이 퀘스트가 떠올랐다.
지크가 바라마지 않던 선구자 퀘스트!
자카르가 불사의 선구자임을 알게 된 것도 사실상 시스템 덕분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내 동의 없이 퀘스트가 수락됐다는 점이랄까?’
그동안은 Y/N로 선택지가 주어졌었는데, 지금은 곧바로 수락됐다.
제한 시간 30분과 함께.
[메인 퀘스트 종료까지 남은 시간 : 20분 11초]
그랬기에 어느 정도 대화를 지켜보다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너무 끌었다간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이제는 보상이 없으면 섭섭할 정도야.’
어차피 죽일 놈이었기에 참으로 적절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는 상황.
하지만 퀘스트는 하나가 아니었다.
【서브 퀘스트 : 페트로 라이더몬드 백작을 죽여라!】
└페트로 라이더몬드 백작이 불사의 선구자와 한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악행에 가담한 페트로 라이더몬드 백작을 죽여 본보기를 보이십시오.
<조건>
└페트로 라이더몬드 백작 처치
<보상>
└5차 스킬 숙련도 40,000 증가
‘와, 보상 뭐야? 백작 죽이면 4만이나 오른다고?’
스킬의 성취를 올리기 위해선 31,880의 숙련도가 필요한 상황.
백작을 죽이면 곧바로 8성을 찍을 수 있다.
‘어차피 죽여서 영지전을 막을 셈이었는데……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네.’
퀘스트를 수락한 지크의 첫 번째 타깃은 다름 아닌 백작이었다.
물론 다른 녀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기습적이어야 한다.
“너희들. 말로 해선 안 들을 거지?”
“애송이가 살려달라고 빌지는 못할망정 주둥이만…….”
지크가 아공간을 열어 우리엘의 깃털 검을 꺼내자, 말리고르가 말끝을 흐렸다.
“너흰 특별히 이걸로 상대해 주…… 뭘 그렇게 봐? 이런 무기 처음 봐?”
“어떻게 한 거냐? 네 따위가 무슨 재주로 아공간을…….”
“놀란 이유가 아공간 때문이었어?”
머쓱해진 지크는 아공간이 악마의 전유물이라는 걸 깨닫고 슬쩍 떠봤다.
“내가 최근에 가르침을 받았거든.”
“뭐? 설마 너도 그분에게…….”
“말리고르! 쓸데없는 말은 삼가라! 곧 죽일 상대와 뭘 그렇게 주절거리는 게냐!”
“죄송합니다.”
뒤에서 들린 호통에, 말리고르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더는 말할 것 없다는 듯 어둠의 오러가 폭사 된다.
“죽어라.”
“싫은데.”
대꾸한 지크가 검을 들고 달려들다가 기습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방향은 다름 아닌 백작.
지크가 검을 내지르자 백작이 새된 비명을 지른다.
“흐익!”
하지만.
카앙!
그보다 말리고르의 행동이 더 빨랐다.
오러 블레이드로 지크의 공격을 튕겨낸 것이다.
몸을 움츠렸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백작이 감사를 표했다.
“가, 감…….”
“좋아서 살려준 게 아니니 인사는 필요 없다.”
“…….”
쌀쌀맞게 말한 말리고르의 시선은 지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한테 달려드는 척하면서 백작을 노리다니. 진짜 원하는 건 이 녀석의 목숨이었군.”
“칫.”
지크의 입에서 아쉬운 소리가 나온 순간.
말리고르의 신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지크의 눈으론 좇을 수도 없는 속도.
사실상 지크에겐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 봐도 무방했다.
오러 마스터 중급이 정점이라 불리는 그랜드 오러 마스터와 맞대결한다?
어린아이와 어른만큼이나 체급 차이가 심하다.
일전에 대련했던 크리오스도 이런저런 스킬을 퍼부으고 나서야 털끝을 건드는 데 그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오러만 사용했을 때의 격차지.’
마법을 쓰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걱!
단숨에 거리를 좁혀 지크의 머리를 두 쪽으로 쪼갰다고 생각한 말리고르가 히죽 웃었다.
그러나.
‘음?’
자신이 벤 것이 잔상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크의 몸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이 자식. 어디 있는 거냐!?”
투명화 마법을 썼다고 생각한 말리고르가 허공을 베었다.
스각―!
보기만 해도 위압적인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를 이리저리 휘둘러봤지만 걸리는 느낌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지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어서 나와!”
말리고르가 소리치며 크게 횡으로 휘두른 순간.
“커억!”
투명화가 해제되며 지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털썩.
무릎을 꿇은 지크는 피를 토하더니 그대로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크크, 멍청한 자식. 투명화만 쓰면 내가 못 죽일 줄 알았나?”
말리고르가 비릿하게 웃었지만 사실 지크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환술로 말리고르가 다른 곳을 공격하게 유도했을 뿐.
그리고 그 다른 곳에는.
“끄어어…….”
라이더몬드 백작이 있었다.
[페트로 라이더몬드 백작 처치 완료!]
[서브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보상으로 5차 스킬 숙련도 40,000이 증가합니다.]
[스킬 ‘마법 복제’의 성취도가 8성에 도달하였습니다.]
[습득할 수 있는 마법의 개수가 7개▶8개로 상향되었습니다.]
[9성 성취까지 남은 숙련도 8,120/300,000]
‘역시, 내가 직접 죽이지 않아도 클리어한 걸로 처리되네.’
환술을 이용해 말리고르의 손으로 처치하게 했음에도 보상이 들어왔다.
간접적으로나마 죽여도 보상을 받으리라는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어둠의 군주가 환술을 간파하지 못할 거라는 것 또한.
‘아즈라힐의 환술은 오망성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교해.’
일전에 크리오스와 대련할 때 환술을 썼다면 눈치챘을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지만…….
지크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만큼 환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자가 바로 아즈라힐 존스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대단한 마법도 9서클의 대마법사를 속일 순 없었다.
오러 유저와 달리 마력을 읽는데 탁월한 감각을 지닌 그들은 환술의 낌새가 보이면 곧장 눈치채고 만다.
아무리 정교하다 한들 저것이 마력으로 만든 환영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건 불사의 선구자인 자카르 또한 그랬다.
같은 편을 죽인 말리고르를 멍하니 보다가 곧장 지크 쪽으로 눈 돌리는 걸 보면.
“네놈…… 어떻게 환술을 사용하는 거지? 누구한테서 익힌 거냐?”
“아즈라힐한테서 배웠는데?”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아즈라힐은 자신의 마법을 남에게 공유할 놈이 아니야.”
“그건 인정. 반역이나 꾸미는 걸 보면 그런 위인이 아니긴 하지.”
지크의 말에 자카르가 또 한 번 놀랐다.
“……그런 정보는 또 어떻게 아는 거지?”
“몰라도 돼. 그보다 너만 질문하지 말고 나한테도 질문할 기회 좀 줄래? 여기서 하던 의식이란 게 뭐야? 어둠의 군주가 말한 그분이라는 건 누굴 말하는 거고?”
“말할성싶으냐.”
“너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면 엉덩이에 뿔난다?”
잠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은 자카르가 말리고르를 쳐다봤다.
환술로 청각, 시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을 속이고 있으니 자신이 부른다 해도 들을 수 없으리라.
“아무래도 내가 직접 네놈의 아가리를 찢어버려야겠군.”
말리고르에게 맡기는 건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자카르가 나섰다.
키이이잉!
들고 있던 해골 지팡이의 안구에서 불빛이 번뜩였다.
“핑거 오브 데스(Finger of death).”
지팡이 끝에서 쏟아져나온 검은 손길이 지크를 잡아먹을 듯 덮쳤다.
그 모습을 본 자카르가 입술을 비죽 올렸다.
‘끝났다.’
손아귀의 범위에 걸린 이상 9서클 마법사라도 막기는 불가능.
제아무리 강한 배리어를 펼친다 해도 죽음의 손아귀에 뼛가루 남기지 않고 부서질 터다.
‘서열 1위인 그분이 아니라면 막는 건 불가능…….’
하다고 믿고 있던 자카르의 두 눈이 큼지막이 벌어졌다.
조각났을 게 뻔하다고 여긴 지크가 멀쩡한 채로 서 있었기 때문.
‘뭐지…? 어떻게 저놈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단 말이냐?’
자카르는 보았다.
죽음의 손이 닿자마자 마치 다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것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똑똑히 봤는데도 통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마법을 쓴 것이냐? 설마 공간 전이를 쓴 것이냐?”
“아까부터 질문이 많으시네. 내 질문엔 대답도 안 해주면서.”
퉁명스레 말한 지크가 깃털 검을 지팡이로 변형시켰다.
그 모습에 자카르가 놀랐지만, 더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방출.”
자신이 시전한 핑거 오브 데스를 똑같이 따라서 시전한다.
‘내가 쓴 마법을…… 모방한다고? 그것도 무영창으로?’
놀랄 틈은 없었다.
죽음의 손아귀가 무서운 기세로 자카르를 노렸으므로.
“Leperseid schnab sitotni nightier(연기처럼 사라져라).”
악마의 술법을 이용하자 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러기 무섭게 죽음의 손아귀가 간발의 차이로 지나갔고, 곧.
쿠콰콰콰쾅!
폭발음이 거대한 홀을 뒤흔들었다.
“어이고, 악마의 술법으로 잘도 피했네?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네놈…….”
“걱정하지 마. 쉽게 죽이진 않을게. 놀 시간은 많으니까. 안 그래도 이럴 줄 알고 환영 장막으로 소음을 막아놨거든.”
어깨를 으쓱이며 어디 마음껏 싸워보자는 식으로 말한 지크지만, 사실 질질 끌 생각은 없었다.
보아하니 고통을 준다고 입을 열 녀석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고문은 통하지 않을 테고…… 그럼 그 방법밖에 없으려나?’
지크는 한쪽에 뜬 메시지창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사이, 자카르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궁금증을 해소하기 바빴지만.
“어떻게 내 마법을 카피한 거지?”
“내가 좀 천재라서. 한 번만 봐도 따라 할 수 있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건 9서클 마법사도 불가능한 일이다.”
“되든 안 되든 지금 그러고 있잖아?”
“말해줄 생각이 없구나.”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자카르의 표정에 싸늘함이 더해졌다.
전보다 더 진지한 얼굴.
봐주면서 싸울 상대가 아니라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감히 내게 도전한 너의 무지함을 저승에서 탓하거라.”
지팡이가 번뜩이더니 거대한 마력이 모였다.
‘단 한 방에 끝낸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
죽음은 언제나 삶 가까이에 있다는 게 자카르의 지론이다.
아주 사소한 실수 하나로 저승길을 건너기도 하며, 재수 없게도 천재지변에 휘말려 죽기도 하는 게 인간의 삶이니까.
지크라는 놈은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했다.
‘나를 만난 걸 지옥에서 후회하라, 마검사.’
운 좋으면 목숨을 구한다는 말이 있지만 지금 준비하는 마법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무조건 죽인다.’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살상 마법이니만큼, 통하지 않을 가능성은 상정도 하지 않았다.
“파워 워드 킬(Power word, Kill).”
지팡이 끝에 모였던 마력이 단숨에 지크에게 폭사 됐다.
지정된 대상의 뇌세포를 터트려 죽이는 극한의 살상 마법.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
같은 12인의 선구자라도 부담스러워하는 마법이니만큼 위력은 확실했다.
그럴진대…….
“끝났어?”
“!!!”
지크는 자카르를 번번이 경악하게 만들었다.
“어, 어찌 막은 것이냐? 정신 마법이라 공간 전이는 먹히지 않을 텐데 어찌……!”
“이거 좀 위험한 마법 같은데. 맞지? 너한테 쓰면 죽을 거야. 그렇지?”
“서, 설마 그것도 카피한 거냐……?”
공간 전이로 막아낸 걸로 모자라 카피까지?
믿을 수 없었지만, 상대는 정말로 똑같은 마법을 사용했다.
자신이 아닌, 아직도 환각을 보고 있는 말리고르에게.
“방출.”
지크의 지팡이가 말리고르를 향하자, 곧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끄, 으아으아아!”
간질 환자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눈코입으로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털썩―
“죽었어? 헐.”
어둠의 군주이자 그랜드 오러 마스터로 유명한 그 오망성이 마법 한 방에 즉사해버렸다.
지크에게 칼질 한 번 해보지도 못한 채로.
정말로 카피해낼 줄은 몰랐는지, 자카르의 눈이 부릅떠졌다.
“말도 안 돼…… 스승님에게 전수받은 내 최고의 마법을 한 번 보고 익혔다고……?”
“그 스승이란 사람이 누군데?”
지크의 물음에도 자카르는 부들거리며 말리고르의 시체만 바라볼 뿐이었다.
“또 무시하네. 뭐,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어.”
여전히 놀라고 있는 자카르의 모습에, 지크가 별안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더 말도 안 되는 거 보여줄까?”
지크의 지팡이가 말리고르의 시체를 가리켰다.
“Imr Imnaij Diénai Isisir(일어나라, 나의 종이여).”
악마의 술법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죽은 줄 알았던 말리고르가 기적처럼 몸을 일으켰다.
자카르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 커진 건 그때였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시체를 언데드로 만드는 자신의 사령술을 똑같이 재현하다니?
상대에겐 보여준 적도 없는 주문이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던 자카르였다.
그러나,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언데드로 되살아난 말리고르가 지크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으니까.
“어둠의 군주 말리고르 데스본이 주인님께 인사 올립니다.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언데드가…… 말을 할 줄 알아?”
평생을 찾아 헤매던 지성이 있는 언데드가 바로 눈앞에서 탄생하다니.
자카르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