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107화
철혈의 군주로 더 잘 알려진 크리오스는 요새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적대 파벌인 라이더몬드 백작이 자신의 파벌인 라키오 백작에게 전쟁을 선언했기 때문.
어차피 말리고르와는 척질 생각이었고 원체 호전적인 크리오스였기에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진 않았다.
‘오히려 잘 됐지. 말리고르도 전장에 나선다고 하니 이참에 악연을 끊는 수밖에.’
시작부터 나서서 대장전을 벌이면 애꿎은 병사들 피해 없이 영지전을 끝낼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내일 있을 영지전을 준비하던 크리오스는 뜻밖의 소식을 들어야 했다.
“뭐라? 말리고르가 전쟁을 취소해?”
“예. 분명 그렇게 말했다 합니다.”
라이더몬드 영주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건 보고를 통해 들었다.
전쟁 준비에 한창이기에 이상할 것 없는 움직임.
그러나 이렇게 갑자기 돌연 취소한다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다.
“방심을 유도한 뒤 기습하려는 작전인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정찰병에 의하면 라이더몬드 백작이 고용한 용병들이 줄줄이 철수하는 걸 목격했습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 공급도 중단한 듯하고요.”
“대체 무슨…….”
직접 목격했다고도 하니 부하의 보고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의아하군. 내 직접 라이더몬드 백작과 이야기해 보겠다.”
“저희도 의아하여 이미 시도해 봤지만, 백작과는 연락이 되질 않습니다.”
“그렇담 말리고르와 이야기해 보지.”
그 뒤로 열흘이 지났지만 크리오스는 말리고르와 대화는커녕 그의 그림자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건 라이더몬드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물어봐도 그 누구도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마치 두 사람이 한순간에 실종된 것처럼.
참으로 미스테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12인의 선구자들이 모인 비밀의 공간.
언제나 그렇듯 회의에 참석한 선구자는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조직을 이루고 있음에도 부족한 결속력.
그러나 오늘만큼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뜻을 모았다.
노인 한 명을 제외하고는.
“발루두크. 그대가 짠 계획에 구멍이 많더군.”
“그럴 수밖에. 영감이 쥐어 짜낸 계획이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회의하느라 뺏긴 시간만 얼만지 알아요?”
이때라는 듯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발루두크를 비난했다.
아무리 같은 선구자라 해도 서열 2위를 물어뜯는 형국이라니.
발루두크로선 어이가 없었지만, 성질을 죽이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계획이 계속해서 실패한 건 철두철미한 자신의 탓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발루두크도 할 말이 없진 않았다.
“계획에 구멍이 있었다는 부분은 인정하지. 그동안 자신만만했었는데 나도 나이가 들다 보니 머리가 굳은 모양이야.”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노망난 늙은이는 이제 빠지라고.”
발루두크가 청년을 노려봤다.
“네놈의 주둥이는 도통 고쳐지질 않는군. 노인공경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버릇없는 애새끼 같으니.”
“아, 됐고! 빨리 계획이나 털어놔 봐요. 저 시간 없다고요.”
“발루두크. 앞으로의 계획이 뭐지?”
여성과 무표정한 사내가 재촉하자, 발루두크가 화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계획을 말하기에 앞서 문제점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지. 어쩌다 이렇게 됐는가 말이야.”
이러니저러니 비난해도 선구자들은 발루두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 중 계획을 짜고 조정할 수 있는 자는 발루두크가 유일하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기에.
“전에 회의 때도 말했지만, 아즈라힐 존스턴이 반역을 꾸미는 건 거의 확실시된 상황이야. 에스카에게 선구자를 제압하는 물건을 만들어달라고 한데다 헤밀톤 광산을 확보했는데도 아크니움에 대한 보고를 빠트린 걸 보면.”
“그건 알고 있다. 그래서 놈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다가 죽이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그런데 현재 새롭게 떠오른 문제 있느니라. 바로 바이소 왕국의 영지전 건이지.”
“백작은 물론 그 누구와도 연락이 안 된다지?”
“그래. 5군주를 집어삼키려던 우리의 계획을 앞당겨서, 철혈의 군주 먼저 치기 위해 영지전을 열었건만, 어찌 된 일인지 라이더몬드 백작과 불사의 선구자, 어둠의 군주까지 전부 연락이 끊어졌느니라. 이 때문에 계획이 전체적으로 늦춰지고 말았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내 짐작으론 죽은 게 아닌가 싶다.”
“죽어……?”
선구자들의 얼굴에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어둠의 군주는 물론 12인의 선구자 중 한 명이 죽었다?
쉬이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봐, 영감. 자카르가 죽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놈은 불사의 선구자란 말이야. 언데드라고, 언데드.”
“알고 있느니라. 내가 전쟁터에서 놈을 찾아 부활시켰는데 그걸 모를까?”
“그럼 어떻게 된 거냐고.”
“언데드라도 죽지 않는 건 아니다. 목이 베이거나 영혼에 심대한 타격을 입으면 제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도 일어설 수 없지.”
“아니, 선구자를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
“에탄의 말이 맞다. 발루두크. 그대의 생각엔 철혈의 군주를 의심하는 모양인데, 제아무리 오망성이라도 불사의 선구자를 죽였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
“나는 오망성을 범인으로 의심하는 게 아니야.”
“그럼?”
“범인은 오히려 선구자 중에 있을 확률이 높지.”
“뭐?”
발루두크의 말에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 크흘흘 웃음을 흘린 발루두크가 이어서 말했다.
“클리포드의 말대로 오망성은 선구자를 이길 수 없어. 누군가 자카르를 죽였다면 같은 선구자일 가능성이 크지. 나는 그 범인이 아즈라힐이거나 에스카, 둘 중 하나라고 의심하고 있고.”
“둘 중 하나라고?”
선구자 모두가 놀라긴 했으나 이내 대부분이 수긍하는 눈치였다.
“하긴…… 발루두크의 말대로 불사의 선구자를 상대하려면 그에 준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지. 오망성이야 가능성은 작을 테니.”
“그럼 아즈라힐이랑 에스카, 그 두 녀석을 조져보면 답 나오겠네.”
청년의 말에 발루두크도 동감하는지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야지. 안 그래도 나한테 방법이 있느니라.”
“이번엔 성공해야 할 거야, 발루두크.”
“그러지. 클클.”
미소 지은 발루두크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 * *
선구자 회의가 끝난 시각.
에스카는 여전히 개인적인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마나 건을 더 축소해 실용성을 높이고 싶은데…… 몇 달째 진전이 없으니 원.’
해결되지 않는 장애물 앞에서 탁 막혀버리니 더는 진전이 없었다.
마음속에 답답함과 응어리만 가득 찰 뿐.
진전이 없는 건 발루두크가 만들라던 기계 장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 만들라는 말이 없으셔서 내버려 두곤 있지만…… 그것도 빨리 완성해야 하긴 할 텐데…….’
아즈라힐의 반역이 확인되면 자신을 선구자의 자리에 올려준다고 약속받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선구자가 되는 건 기정사실.
그렇기에 발루두크에게 밉보이지 않으려면 맡겨둔 일을 확실히 처리해 실력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다른 선구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출세의 발판이 된다.
자신은 아즈라힐처럼 줄곧 말단으로 머무를 생각은 없으니까.
‘내 목표는 적어도 선구자 서열 7위다. 극독의 선구자로 유명한 녹스 베노마이어도 내가 죽였잖아?’
비록 저격이긴 했으나, 어찌 됐든 자신이 개발한 마나 건 한 방에 골로 보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자체적인 서열을 매기자면 7위급은 된다 해도 무방하리라.
맞대결했었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그나저나 자카르 님은 잘 처리하셨으려나?’
지크 맥러플린에 대한 암살을 맡은 걸로 아는데, 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왔을 거다.
‘서열 10위이시니 어련히 잘하셨겠지.’
그때, 책상 위에 있던 통신구의 빛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발루두크의 연락이다.
“예, 발루두크 님.”
-에스카. 내가 만들라던 물건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아, 그게…….”
설마 했는데 물건의 진척도를 물으시다니.
에스카가 뜨끔한 기분으로 말끝을 흐렸다.
“골조는 거의 완성했으나, 가장 중요한 부품인 아크니움이 없어서요…….”
-아크니움만 있으면 가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냐?
“가능은 하죠. 아직 80%만 완성된 거라 한두 번밖에 가동할 수 없겠지만…….”
-그거면 됐다. 아크니움을 마련해 줄 테니 가동할 준비를 해라.
“예? 벌써 가동하신다고요? 아직 미완성인데…….”
-한두 번은 쓸 수 있다 하지 않았느냐. 그거라도 당장 써야겠다. 내가 아니라 네가.
“네? 제가요?”
뜬금없는 소리에 에스카가 놀랐다.
“그건 훗날 대의에 쓰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걸 저더러 가동하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불사의 선구자가 죽었다.
“……자카르 님이요?”
재차 놀란 에스카가 눈동자를 키웠다.
“대체 어떻게요?”
-확실하진 않다. 하지만 열흘이 지난 지금까지 연락이 안 되는 걸 보면 죽었다고 봐야지. 그건 어둠의 군주도 마찬가지고.
“……믿기지 않는 소식이네요.”
-내 심정도 그렇다.
“범인은 누구입니까?”
-아즈라힐로 추정하고 있다. 알다시피 놈이 반역을 꾸미고 있으니.
“아…….”
확실히, 자신에게 만들어 달라고 한 그 마력에 간섭하는 장치를 이용한다면 자카르를 암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아즈라힐에게 연락이 오면 네가 놈을 유인해 죽이도록 해라.
“설마 장치를 가동하라는 것도…….”
-그래. 너 혼자서 이기긴 힘드니 장치가 있는 곳으로 유인해 가동하라는 것이다. 한 번쯤 가동한다고 파괴되진 않을 거 아니냐?
“그야 물론이죠. 미완성인 상태에서 가동하는 거라 만드는 기간이 몇 달 더 늘어나긴 하겠지만요.”
-상관없다. 어차피 너도 만드는 게 막혀서 방치하지 않았더냐?
“아, 알고 계셨군요…….”
-아니까 굳이 재촉하지 않았지.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네가 잘 구슬려서 놈을 처리해라. 그렇게만 하면 그 자리는 바로 네 차지가 될 테니.
“저, 정말입니까? 바로 선구자로 인정해 주신다고요?”
-그래. 아즈라힐을 죽이고 목을 가져온다는 조건 하에다.
에스카가 뛸 듯이 기뻐했다.
평생의 염원을 이룰 기회가 눈앞에 왔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놈은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장치를 이용한다면 어려울 것 없죠.”
-그럼 아즈라힐에게서 연락이 오면 약속을 잡고 나한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통신을 끊은 에스카의 입꼬리에선 한동안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 * *
‘흐음. 에스카가 범인이 아니었던 건가?’
조금 전, 에스카와의 통신을 마친 발루두크는 솔직히 말해 그 역시 의심하고 있었다.
서열 7위인 극독의 선구자도 저격한 녀석이 자카르를 못 죽일 리는 없었으니까.
한데 방금의 통신으로는 자카르가 죽은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연기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에스카와 아즈라힐. 둘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 건 확실하다. 그러니 둘을 싸우게 만들어 공멸시키는 게 최고의 선택이지.’
당장은 아즈라힐보다 기술자인 에스카가 더 필요한 실정이기에 그에게 암살 지시를 내렸다.
물론 에스카 말고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지만, 인원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마음 같아선 바이소 왕국에 있는 테리온, 그놈에게 일을 맡기고 싶지만 몇 년째 연락도 안 되니…….’
풍신의 리타는 데칸에서 맡을 일이 있고,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에스카에게 지령을 내린 것.
그 과정에서 아즈라힐이 살아남을 수도 있지만, 상관은 없다.
‘뭐가 됐든 두 놈 다 쓰다 버릴 체스 말일 뿐이다.’
그로선 이용할 대로 이용한 뒤 버리면 그뿐이었다.
그 시기가 계획과 달리 앞당겨진 게 불편했지만.
‘일단은 아즈라힐을 범인으로 알고 있어야겠군.’
그리 생각하던 차에, 별안간 통신구에서 빛이 들어왔다.
발루두크의 주름진 눈매가 펴진 것은 그때였다.
통신구와 연결되는 사람은 그동안 죽은 줄 알았던 자카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