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109화
엘브로드 령 인근에는 황천의 계곡이 있다.
까딱하면 실족할 수 있는 위험한 지형인 데다 발을 들인 사람은 살아나온 적이 없다는 괴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름 덕에 뭔가를 숨기기 좋은 장소가 되기도 한다.
철컥!
“이걸로 준비는 끝났군.”
아크니움 장착을 마친 에스카는 자신이 만든 장치를 만족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봤다.
장장 5m는 될 법한 거대한 반지 모양의 장치는, 마나 건 다음으로 에스카가 자부심을 느끼는 작품이었다.
“완성도는 아직 80%에 미치지 않지만, 이 정도면 한 번 쓰기에 모자람이 없지.”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아즈라힐을 불러와 죽이기만 하면 그만.
곧 통신구를 두들겨 연락을 넣은 에스카가 장소를 알려줬다.
“아즈라힐 님. 황천의 계곡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엘브로드 령 옆에 있는 곳 말이냐?
“맞습니다.”
-좋아. 그리로 가지.
통신을 마친 에스카의 미소가 짙어졌다.
곧 있으면 놈이 온다.
함정이 있는 줄도 모른 채로.
“이곳에 장치가 있는지는 발루두크 님 말고는 아무도 몰라. 제아무리 12인의 선구자라도 걸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지.”
미소 지은 에스카는 컨트롤러를 품에 소중히 넣은 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출세를 이뤄줄 사냥감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예상보다 빨리 사냥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조용히 만나기에 참으로 좋은 장소군.”
아즈라힐이 다가오자 에스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곧 있으면 거사가 진행될 거라는 걸 알아서인지 긴장감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와 달리 아즈라힐은 꽤나 여유로운 투였다.
“에스카? 왜 그렇게 긴장했지?”
“아,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습니까?”
“너부터 말해봐라.”
“저는…….”
에스카가 별안간 품에서 컨트롤러를 꺼냈다.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버튼을 누르자.
즈와아아아아앙-
협곡 뒤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반지 모양의 장치가 가동되었다.
아즈라힐의 얼굴이 곧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와 반대로 에스카는 환희에 젖은 미소를 지었지만.
“하하하핫! 끝났다, 아즈라힐! 아무것도 못 하는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군!”
“……뭘 한 것이냐?”
“네가 있는 일대에 마력을 차단함과 동시에 중력을 증가시키는 장치를 가동했다. 네놈이 꼼짝도 못 하는 건 그런 이유다. 당연히 마법도 쓰지 못하겠지!”
아즈라힐은 미간을 찌푸리며 연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화된 중력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반면, 범위 바깥에 있던 에스카는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다.
“왜…… 왜 이런 짓을…….”
“왜냐니. 네놈이 반역을 꾸미는 걸 선구자들이 모를 줄 알았나?”
“너 설마…… 선구자들에게 말한 것이냐!”
“당연히 말했지. 일일이 다 일러바쳤지.”
“내가 뭘 꾸미는지는 말하지 말라고 했을 터인데!”
에스카가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네놈 말을 왜 들어?”
“너는 내 편이라고 하지 않았나!”
“허, 보기보다 순진하네. 입발림 소리를 그대로 믿다니.”
에스카는 꽤 여유로웠다.
끈끈이주걱에 붙잡힌 벌레를 보듯 이 상황을 즐겼다.
장치의 지속시간이 길다는 걸 알기에 나오는 여유로움이었다.
“12인의 선구자가 이렇게 간단히 붙잡힐 줄이야.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성능 한번 기똥차구만.”
“에스카! 이번 한 번만 봐줄 테니 당장 날 풀어줘라! 날 따르면 네가 원하던 12인의 선구자 자리도 보장해 줄 테니까!”
“크크큭, 그건 이미 보장받았거든? 네놈의 목을 가져오면 발루두크 님이 선구자 자리를 준다고 약속하셨지.”
“뭐?”
놀라던 아즈라힐의 눈빛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서, 설마 여기에 발루두크 님도 오신 건가?”
“발루두크 님이 오셨으면? 아깝게 장치를 쓸 필요나 있었겠어? 네놈 따윈 순식간에 처리하고도 남았지.”
“그럼…… 이곳에 너 혼자만 있다고?”
“당연한 걸 뭘 물어? 발루두크 님께서 네놈 따위를 상대할 시간은 없으시다. 나 혼자서도 충분하지. 설마 날 만만하게 보는 거냐?”
갑자기 자존심 상했는지 불쾌한 표정을 짓던 에스카가 바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 같은 말단은 모르겠지. 내가 비밀리에 녹스 베노마이어도 죽였다는걸.”
바위틈에서 꺼낸 것은 그의 인생 역작이라 할 수 있는 마나 건이었다.
척-
바주카포처럼 커다란 총을 어깨에 짊어진 그가 아즈라힐을 겨냥했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알려주지.”
투쾅-!
굉음이 한순간에 아즈라힐을 덮쳤다.
대처할 새라곤 없었다.
그저 멍하니 날아오는 마력 덩어리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번쩍-!
탄알에 내장된 소울 버스트가 적중하자 에스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최대 500m 밖에서도 저격할 수 있는 마나 건을 코앞에서 맞았다.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다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멀쩡한 아즈라힐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철커덕- 푸쉬이이이-
탄피가 떨어지며 연기가 흘러나왔지만, 에스카는 그런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녹스처럼 게거품을 물고 죽었어야 할 아즈라힐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제 연기는 그만해야겠네. 공격받았으니 어차피 곧 풀리겠지만.”
“어…… 뭐지? 제대로 맞은 걸 봤는데…….”
“적중은 제대로 했어. 다만.”
아즈라힐, 아니, 지크가 이내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꿀렁꿀렁-
“헉!”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 효과가 없었을 뿐이지.”
소울 버스트는 체내의 마나를 모두 태워버리는 9서클 마법.
마법사에겐 독이었지만 서클이 없는 지크에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저 눈부시기만 했을 뿐.
하지만 그보다도 에스카는 상대가 아즈라힐이 아니었다는 것에 더 놀란 모양이다.
“너, 넌 지크 맥러플린이잖아?”
“그동안 날 죽이려고 조사를 많이 해서 그런가, 역시 얼굴을 알아보네?”
“네놈이 어떻게 아즈라힐의 모습을……!”
“내가 능력이 좀 좋거든. 감쪽같았지?”
에스카는 당황을 넘어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그동안 자신이 상대한 게 진짜 아즈라힐이 아니라 그로 변장한 지크 맥러플린이었다니.
완전히 농락당했지만, 분노 따위를 느낄 겨를은 없었다.
중력장의 범위 내에서도 여유롭게 움직이는 지크의 모습 때문에.
“너……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거냐? 중력이 다섯 배는 늘어났을 텐데……?”
“아, 이거?”
팔다리를 움직여보던 지크는 다시 에스카를 바라봤다.
“중력이 강화됐다곤 해도 버틸 만한데?”
“뭐?”
지크의 말은 사실이었다.
몸이 무거워진 느낌은 들지만 그렇다고 움직이기 불편한 건 또 아니다.
힘 스탯이 4천 가까이 되면 다섯 배의 중력에도 저항할 수 있는 모양.
“지금 오러도 사용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아, 그 장치가 마력뿐만 아니라 오러도 차단하는 거였어? 그럼 오망성이어도 움직이긴 쉽지 않겠네? 그 무시무시한 괴력도 전부 오러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말은 지크가 순수한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숫제 괴물 보듯 하는 에스카였다.
“다, 다가오지 마! 오지 말라고!”
철컥!
다시 한번 마나 건을 겨누자 지크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뭐해. 그런 거 나한텐 안 통한다는 거 잘 알잖아?”
“네놈은 마법사일 텐데 어떻게…… 어떻게 이게 안 먹히는…….”
“미안하지만 난 서클이 없어도 마법을 쓸 수 있어. 봐.”
중력장의 범위에서도 지크가 손아귀에 불길을 일으켰다.
화르륵!
에스카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마력을 완전히 차단했다고 믿고 있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떻게…….”
“글쎄. 나도 어떻게 가능한지는 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시스템의 힘 덕분이라는걸.
“자, 그럼 우리 이야기 좀 마저 나눠봐야지?”
“이, 이 새끼가 내가 누군 줄 알고!”
순간 에스카의 옷자락이 마력으로 펄럭였다.
아홉 개의 마나 고리에서 순환된 마나가 거친 마력으로 탈바꿈한다.
에스카는 기술자이기 이전에 9서클 대마법사.
제야의 고수로 활동한 저력을 이참에 보여줄 셈이었나 보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지크의 의지에 따라 일대의 마력이 흡수된다.
그건 에스카가 모아놓은 마력도 마찬가지.
“어, 어?”
지크로선 상대가 매번 얼빠진 소리를 내는 것도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다.
“마나가 안 모이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대, 대체 무슨 짓을…….”
“너 X됐다는 뜻이야, 인마.”
지크의 주먹이 에스카의 안면을 때렸다.
* * *
사람은 위기의 순간 강해지곤 한다.
자신도 몰랐던 힘을 끌어내기도 하고, 그로 인해 역경에서 벗어나며 한층 성장하기도 한다.
에스카도 한때 자신의 재능을 말미암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역경 끝에 재능이 개화했다고.
부모도 버린 고아로 자란 그가 갑자기 마법에 눈을 떠 9서클의 대마법사로 성장한다는 건 재능이라는 말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더 출세하려고 발악했는지 모른다.
12인의 선구자를 동경하고 집착한 것도 이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뻑!
뻐억!
자신이 자랑하던 마법사의 재능도 이 남자 앞에서는 부질없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다.
위기의 순간 강해진다는 건 헛소리일 뿐이라는 걸 여실히 느꼈다.
처맞는 와중에 몇 번이고 시도했음에도 줄곧 마력이 안 모이는 걸 보면.
“아프지? 그러게 왜 12인의 선구자들을 도와서 이 지경이 된 거야. 응? 어떻게 보면 네가 다 자초한 일이라고. 자업자득. 인정하지?”
“끄으윽…….”
몇 번 맞았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저 에스카의 눈빛엔 지크에 대한 공포로 가득할 뿐.
“무, 물어볼 거 있으면 다 물어보세요. 마, 말로 합시다…… 말로.”
“이제야 좀 협조적이네? 진즉에 그렇게 나와야지.”
‘X발, 그럴 기회나 줬어?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은 놈이!’
순간 울컥해서 소리칠 뻔했지만 애써 참는 에스카였다.
당장 12인의 선구자가 나타나도 이 남자 앞에선 쪽도 못 쓰고 당해버릴 테니까.
“발루두크는 왜 안 왔어. 진짜 바빠서 안 온 거야?”
“예…… 일이 있으니 저 혼자 처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공손한 대답이었지만 지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현재 바라보는 대상이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발루두크가 오기를 바라던 지크였으니까.
“차라리 거짓이었으면 좋았겠는데…… 정말인가 보네. 아, 아쉽네. 발루두크까지 왔으면 둘 다 잡아버리는 건데…….”
“…….”
세상에, 어둠의 손이라 불리는 서열 2위의 발루두크를 저렇게 취급하는 남자가 또 있을까.
에스카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뭐하냐? 왜 고갤 흔들어?”
“예? 아, 아닙니다.”
지크가 무거운 표정으로 스윽 얼굴을 가까이 댔다.
“정신 차려.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예, 예.”
“이제부터 내가 질문을 할 거야. 묻는 말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섞여 있으면…… 알지?”
“그럼요, 그럼요.”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자 에스카가 바싹 쫄아버렸다.
그 모습에 내심 만족한 지크가 물었다.
“첫 번째 질문 들어간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