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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준은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반년이 넘도록 이 끔찍한 증세로 인해 마음껏 달려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걱정 없이 뛸 수가 있었다.
운동장 스탠드의 계단 네, 다섯개를 한번에 휙휙 건너 뛰고.
방향을 틀때는 한발로 나무를 딛고 날아올라 공중제비까지 돌았다.
지금 김서준의 기분은 최고였다.
죽음의 끝에서 얻게된 새로운 삶.
죽기 전보다 10년이나 젊어졌으며, 부모님까지 멀쩡히 살아계시다.
어쩌면 스승도, 친구도, 아끼던 동생들도 모두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예전의 그들은 아닐지라도,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이 살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갈가리 찢겨졌던 마음의 상처가 조금은 봉합될 수 있지 않을까?
김서준은 이것이 하늘이 자신에게 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이곳에서만큼은 모두를 지켜낼 테다.’
부모와 친구들의 생명 뿐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할 자신의 행복한 미래도 반드시 지켜내고 싶었다.
정신없이 달리다보니 어느새 전철역 앞이다.
김서준은 역 근처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사방에서 흘러드는 향긋한 음식 냄새를 즐기며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아카데미에서 집까지는 전철역으로 다섯 정거장.
꽤나 가까운 거리라서 집이 위치한 증산역까지 도착하는데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어느새 김서준은 증산역 밖으로 나와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이 녀석은 이 엄청난 신비를 그동안 대체 어떻게 굴려먹은 거야?’
김서준은 지금 고한석을 날려버릴 때 사용한 신비, 역발산기개세를 떠올리고 있었다.
역발산기개세는 정말 놀라운 신비였다.
신비를 발휘해 공격을 흡수할 수 있는 시간은 단 2초에 불과하지만, 그 2초 동안 주변의 시간을 한없이 느려지게 만든다.
실제로는 세상이 느려진게 아니라 자신의 동체시력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이동속도가 몇 배나 빨라진 것이지만 그것이 얼마다 대단한 것인지는 김서준이 가장 잘 느끼고 있었다.
2초의 시간 동안 상대의 공격에 담긴 파괴력을 손으로 빨아들이고, 그걸 두배의 힘으로 튕겨내는 신비가 바로 역발산기개세였다.
아무리 어린 김서준의 몸에 산소중독증이 발병해 있다 해도 이걸 제대로만 사용할 수 있었다면 아카데미에서 왕따가 되는 일 따윈 있을 수가 없다.
‘김서준, 이 바보 같은 놈은 훌륭한 신비를 갖고도 활용하는 방법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
자신이 자신을 욕하는 웃기는 상황.
어쨌든 어린 김서준의 머리속에는 역발산기개세를 방어적으로만 사용했던 기억이 가득했다.
역발산기개세는 방어용이 아니라 철저한 공격용 신비다.
소극적으로 쓰면 위력도 최소화될 수밖에 없는.
사용하는 사람이 대범할수록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신비인 것이다.
‘그나저나, 고한석…. 그 자식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텐데.’
고한석을 때려눕힌 건 단 1만큼도 후회되지 않는다.
다만, 뒷일이 살짝 걱정이 될 뿐.
녀석이 자신을 상대로 복수를 꾸민다면 아무 걱정이 없다.
언제나처럼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마주하는 족족 박살내버리면 그만인 문제니까.
김서준은 고한석이 이번 일을 아버지 직장으로까지 확대시킬까봐 그게 걱정이었다.
아버지 김주혁.
사실, 그 또한 헌터였다.
비록 DC급이긴 해도 김서준에겐 너무나도 자랑스런 아버지였다.
헌터 등급을 말할 때, 앞의 등급은 마력 수준을 의미하고, 뒤의 등급은 헌터가 각성한 신비의 등급을 의미한다.
즉, 김서준의 아버지인 김주혁은 D급 마력에 C급 신비를 지닌 그저그런 별볼일 없는 헌터라는 뜻이다.
하지만 김서준 본인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주혁의 신비인 ‘멀티플레이어’는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정신집중력을 높여주는 지원형 신비였다.
지금이야 이름있는 길드에서 행정처리를 담당하는 사무실장으로 일하고 있지만, 예전엔 이 신비를 이용해 동료 헌터가 펼치는 신비의 파괴력을 끌어올리는 서포터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김주혁의 신비 덕분에 D급짜리 신비가 C급의 위력을 내는게 가능했기에 서포터로서 이름 꽤나 날렸었다.
하지만 마력이 발목을 잡았다.
김주혁의 마력은 D급에서 전혀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마력을 높이려면 몬스터를 때려잡아야 하고, 때려잡은 몬스터의 심장에서 마석을 찾아 마력을 흡수해야 한다.
마력이 높아지면 신비의 파괴력을 높일 수 있으며, 때로는 신비의 유지시간을 길게 늘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주혁은 아무리 마력을 흡수해도 마력이 늘지 않았다.
그의 마력은 59라는 수치에서 멈춘 이후로 단 1도 늘지 않고 있었다.
마력수치는 본인만 볼 수 있지만, 이걸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만든 마력 스카우터라는 것이 존재했다.
마력 스카우터는 몬스터의 마석에 특별한 몬스터의 생체조직을 더해 만들어진 아티팩트였는데, 그 가격이 엄청나서 개인이 소유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김주혁은 현무길드가 보유한 마력 스카우터로 늘 마력을 측정해 왔고, 8년 전부터 마력이 59에 멈춰서 전혀 오르지 않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현무 길드에도 널리 퍼졌다.
김주혁의 마력이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알게된 길드의 수뇌부는 그가 현장에 투입되는 일을 조금씩 줄여갔다.
김주혁의 신비는 마력 부족으로 인해 등급이 높은 신비에는 위력증강의 효과를 부여할 수가 없었다.
또한 마력 파장이 김주혁과 제대로 연동되지 않는 헌터에게는 인식력을 확장시켜주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 전투헌터에서 사무헌터로 좌천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김주혁이 부길드장 고태환을 친구로 둔 덕분에 길드에서 축출되지 않고 지금껏 버틸 수 있었노라고.
하지만 김서준은 그것이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걸 안다.
부길드장 고태환은 아버지인 김주혁을 계륵처럼 여기고 있었다.
자신에겐 그다지 효용은 없으나 남이 데려다 활용하는 건 또 그냥 두고 보지못하는 못된 심보를 지닌 자가 바로 고태환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고태환은 길드 내에서 김주혁을 마치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아들 김서준의 미래라는 약점을 쥐고, 고액 연봉을 계속 받으며 지내려면 자신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끝없이 옥죄고 있었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고한석의 비꼼은 김서준이 아닌 고태환 부자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고한석의 비열하고, 속좁으며, 이기적인 성격은 아비인 고태환을 판박이처럼 빼다 박았다.
‘아버지가 마력만 제대로 쌓을 수만 있었어도….’
그랬다면 김주혁은 최강의 서포터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으리라.
‘마력이 왜 늘지 않는걸까?’
문뜩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니 지금 자신은 아버지의 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자신의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단번에 파악했듯이, 태양신공의 강대한 내공의 힘을 잘만 이용한다면 아버지의 몸에 생긴 이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
‘오늘 부모님한테 효도 좀 해야겠구나.’
김서준은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 태양신공을 이용해 추궁과혈을 해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태양신공으로 추궁과혈을 하게되면 몸에 쌓인 독기를 빼내고 병든 세포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가 있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효과를 볼 지도 모르는 일이고.
집으로 향하는 김서준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찼다.
***
1802호.
김서준은 집 문앞에 서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안에 엄마가 있는 거잖아?’
어린 김서준에겐 오늘 아침에도 봤던 얼굴이지만, 29살의 김서준에겐 20년 만에 처음 마주하게되는 어머니였다.
당연히 심장이 미칠듯이 쿵쾅거렸다.
얼굴을 마주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를 두고 계속해서 고민했다.
‘일단, 들어가자.’
김서준은 입술을 꽉 깨물고 도어락의 비번을 눌렀다.
삑삑삑… 삐리리.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김서준은 투꺼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서준이 왔니? 오늘은 좀 늦었구나? 불금이라 친구들이랑 놀다 오는 줄 알았는데, 그냥 온거야?”
중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마자 어머니, 백연지 여사가 반겨주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눈가에 살짝 잡힌 주름살.
160센티가 안되는 작은 키지만 비율이 좋아 작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 체형.
김서준이 기억하는 30대 초반의 모습보다 조금 더 나이든 모습이었지만, 그때와 한치도 다를게 없는 백연지 여사의 얼굴 그대로였다.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김서준은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20년.
김서준의 시간 속에서는 20년 전에 천강우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어 두번다시 볼 수 없었던 어머니였기에 감정이 북받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김서준은 백연지를 덥썩 껴안았다.
“어머, 얘봐? 징그럽게 왜 그래? 갑자기 어머닌 또 뭐고? 너 또 무슨 잘못했니? 아니면, 용돈이 필요한 거야?”
백연지가 슬쩍 몸을 빼려 했지만 김서준은 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런 아들이 사랑스러웠던 것인지 백연지도 김서준의 허리를 살포시 껴안으며 잠시 토닥여 주었다.
“어휴… 땀냄새! 얼른 씻고 밥부터 먹으렴.”
“잠깐만 이렇게 있어줘요. 아주 잠시만….”
김서준은 가슴팍까지밖에 오지 않는 엄마를 품에 안고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이제 됐니?”
“….”
백연지의 말에도 김서준이 꼼짝을 안하자, 결국 강력한 등짝스매싱을 한대 얻어맞아야 했다.
짜악
“꼬릿한 땀냄새 풍기지 말고 이제 얼른 씻어!”
김서준은 백연지 여사에게 떠밀리듯 욕실로 들어가야 했다.
18층에 위치한 25평의 아파트.
이곳이 김서준과 부모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행복의 보금자리였다.
크지도, 그렇다고 아주 작지도 않은 집이지만 서울에 위치한 아파트라 가격은 엄청 비쌌다.
반년 전, 김서준의 부모는 아들의 편안한 아카데미 생활을 위해 무리를 하여 이 집을 장만했다.
당시 김서준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 되니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부모의 입장에선 달랐다.
비록 아카데미 코앞도 아니고, 지하철역으로 다섯 정거장 떨어진 위치이긴 해도 아들이 집밥을 먹으며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김서준을 위한 부모의 헌신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헌터 아카데미를 제대로 다니기 위해서는 고액의 장비와 각종 아티팩트가 필요했고 그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김주혁은 밤낮없이 일해야 했다.
백연지 역시 새벽 시간에 아파트 청소부로 일하며 어떡하든 자식이 남부럽지 않은 아카데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보니 김주혁도, 백연지도 건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이제 40대 초반인 백연지는 벌써 허리가 구부정해지고 있었으며, 관절염까지 더해져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김주혁은 잦아진 마른 기침과 가슴통증을 호소하면서도 병원엔 발도 디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헌터가 잔병에 강한 신체를 지닌다고 해도 무적까진 아니었다.
과로와 면역력 약화, 그리고 비정상적인 고도비만증까지.
눈에 빤히 보이는 증세가 있음에도 김서준의 부모는 자신들보다 아들, 김서준을 챙기기만 했다.
‘부모가 살아계신다는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김서준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며 감격에 겨워했다.
20년을 부모의 복수를 위해 살아왔던만큼,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너무도 깊었다.
그런데 죽음의 끝에서 새롭게 눈을 뜬 이곳에서 생존해 있는 부모를 만나게 되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김서준은 머리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눈물까지 함께 흘려보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행복… 절대 놓칠 수 없어.’
그렇게 결심한 김서준은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엄마 백연지가 차려준 밥을 맛있게 먹었다.
오늘도 야근인 아버지 김주혁은 세 시간은 더 지나야 귀가할 예정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백연지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김서준은 방에 들어가 다시 태양신공을 운용했다.
이제 막 태양신공의 내공이 생성된 시점이라 수시로 단전을 자극해 주지 않으면 산소중독증이 다시 재발할 수 있었다.
김서준은 가부좌를 튼 채로 운기조식을 취했고, 대주천을 다섯 번이나 돌리고 나서야 심법 수련을 멈췄다.
‘확실히 태양신공의 효과는 엄청나구나.’
예전에는 태양신공이 지닌 위험때문에 내공을 마음껏 운용하지 못했었는데, 이젠 위험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시원시원하게 심법 수련을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태양신공의 효과를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좁쌀만했던 단전이 어느새 손톱 정도 크기로 커졌다.
일반적인 내공심법으로는 최소 1년 이상 고생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이 단 하루만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상태만 유지해도 1년 내로 일류 고수 수준엔 오를 수 있겠는데?’
전에 김서준이 살던 지구에서 일류 고수로 인정받으려면 최소 10년 내공은 갖춰야 했다.
즉, 태양신공은 1년 만에 10년 내공을 형성시킬 수 있을정도로 엄청난 내공심법인 것이다.
짧은 운기조식을 마친 김서준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아무리 어린 김서준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불명확한 내용들이 많아 직접 눈으로 살펴보면서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었다.
우선 이곳의 시간대는 29살의 김서준이 살던 세계와 동일했다.
2034년 5월 19일.
이 날은 김서준이 천강우와 마지막 일전을 벌인 날이기도 했다.
그런데, 죽음을 경험하고 정신을 되찾은 이곳의 시간은 모든 것이 10년 정도 느리게 흘렀다.
시간과 날짜만 같을 뿐,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은 10년 전의 모습 그대로 였으니까.
김서준은 무공에 대한 걸 검색해봤다.
그 결과, 이 세계에서는 무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한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여기선 영화나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 뿐, 무공은 실재하는게 아니야.’
그것이 김서준이 내린 판단이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김서준이 20년 동안 갈고 닦은 무공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악마의 심법인 태양신공을 비롯해, 검법, 권법, 도법, 신법 등등 한가지만 제대로 익혀도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무공을 수없이 알고 있었다.
태양신공을 익힐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다른 무공들도 익힐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실재로 무공을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된다는 말이었다.
‘나 혼자만 할 수 있는 뭔가를 갖고 있다는 건, 확실히 큰 이점이니까.’
김서준은 자신만이 가진 이점을 더욱 크게 확대시키기 위해 머리속에 든 무공들을 하나하나 꺼내가며 직접 익혀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 우리 백여사님 건강부터 체크해 볼까?’
김서준은 거실로 나갔다.
마침 주방 정리를 마치고 쇼파에 앉아 K드라마에 심취해 있던 백연지는 김서준의 등장에 시선도 안돌리고 한마디 했다.
“냉장고에 과일쥬스 만들어 놨으니 가져가서 먹어.”
“엄마는?”
한껏 격악되었던 감정이 가라앉은 덕분에 평소의 어린 김서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백연지도 ‘어머니’라고 부르는 징그러운 아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피식 웃고 말았다.
“엄만 과일 싫어하잖니. 그러니 네가 다 마셔도 된다. 아빠도 먹게 조금만 남겨 두고.”
“말만 그렇지, 몰래 과일 껍질 주워 먹으면서.”
“과일의 영양소는 죄다 껍질에 있는 거 몰라? 그리고 주워 먹는 거 아니다? 대놓고 먹는 거지.”
“아, 됐고. 할 거 없으면 쇼파에 엎드려봐.”
김서준은 어린 김서준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한참 어리광 부릴 9살의 나이에 부모를 잃었던 김서준.
때문에 정신은 스물 아홉살일 지언정, 마음만은 열 아홉의 김서준이 되어 엄마를 친구처럼 대하고 싶었다.
“엎드리면 뭐하게? 안그래도 요즘 허리가 아픈데, 마사지라도 해주려고?”
“촉은 또 귀신같네. 정말 마사지 해줄테니까 얼른 엎드리기나 하세요, 백여사님.”
“정말? 오늘 너 참 이상하다? 좀 전엔 몇 년간 집 나갔다 돌아온 가출아들 코스프레 하더니, 이젠 뭐 효도하는 아들 컨셉이니?”
백연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로 쇼파 위에 길게 엎드렸다.
그 상황에서도 K드라마를 향한 시선은 떠나지 않고 있는 백연지의 모습에 김서준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김서준이 하려는 건 단순한 마사지가 아니라 추궁과혈이다.
손가락에 내공의 힘을 실어 상대의 몸 곳곳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탁기를 몰아내고, 문제가 있는 곳을 찾아내 재생의 힘을 불어넣으려는 것이다.
이 추궁과혈을 제대로 받으면 가벼운 지병은 씻은듯이 사라지고, 중증이 있다 해도 빠른 회복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굉장히 효과가 좋았다.
김서준은 추궁과혈의 수법으로 백연지의 몸 곳곳을 훑으며 주요 혈도에 내공을 불어 넣었다.
예상대로 백연지의 몸은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특히 관절 부분에 탁기가 쌓여 생기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김서준은 조급해 하지 않고 천천히 하나하나 신경써서 처리해 나갔다.
막힌 혈을 풀고, 탁기를 내장으로 몰아넣은 다음 태양신공을 이용해 태워버렸다.
타는 느낌이 조금 따끔했는지, 백연지가 잠시 몸을 들썩였다.
“얘! 어디 뼈 부러뜨린건 아니지?”
김서준은 눈매를 좁히며 의심스럽게 묻는 엄마를 보며 속으로 큭큭 웃었다.
“좀 어때? 어디 결리는데 없어?”
김서준의 말에 백연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기지개를 쭉 켰다.
그리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머? 몸이…. 날아갈 것 같은데? 너무 가벼워!”
“무릎이랑 손목은?”
백연지는 무릎도 굽혔다 펴고 앉았다 일어섰다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팔도 휘휘 돌려보며 체조 비슷한 운동도 해 보였다.
설거지를 할 때만 해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뚜둑 소리를 내던 관절이 너무도 부드럽게 움직여지자 백연지는 그저 어머어머만 연발할 뿐이었다.
‘내공이 없는 분이라 효과는 이 정도 까지구나.’
백연지에게 내공이 있었다면 추궁과혈로 내공증진 효과까지 봤겠지만, 그렇지 못한게 살짝 아쉬웠다.
그래도 탱탱해진 피부와 생기를 되찾은 얼굴색을 보게되니 마음이 더할 나위없이 후련했다.
“엄청 시원하지? 앞으로도 종종 해 줄게.”
“오, 정말이니? 돈 많이 들어가는 아카데미라 좋긴 좋구나. 이런 마사지 기술도 가르치는 걸 보니 말이야.”
“어? 어…. 그렇지 뭐.”
백연지는 추궁과혈을 아카데미에서 가르친 마사지 기술이라 생각하는지 해맑게 미소를 그려주었다.
그때였다.
삐비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현관 앞 등불이 켜지며 퉁퉁한 체격의 중년사내가 부스럭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김서준은 불쑥 나타난 중년사내를 빤히 바라봤다.
흔해빠진 검정색 양복에 불룩 튀어나온 뱃살 아래로 감춰져 보이지 않는 혁대가 인상적이다.
턱에도 살집이 붙어 두개로 보였으며, 3대 7 가르마로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스타일은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만두라도 입에 넣은 건지 빵빵한 두 볼.
피곤에 절어보이는 두 눈 밑에는 다크서클까지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 왔소.”
“어머, 여보!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백연지가 남편 김주혁의 귀가를 반겨주었다.
“뭐, 그렇게 됐지. 그런데, 김서준. 넌 또 엄마랑 드라마 삼매경이냐?”
무심하게 툭 던지는 말에 김서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버지….’
아버지, 김주혁을 바라보는 김서준의 얼굴엔 반가움과 감격, 그리고 깊은 감사의 감정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