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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준은 역발산기개세를 사용했지만, 상대의 공격을 흡수만 했을 뿐, 밖으로 뿜어내진 않았기에 여인은 죽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인은 공포에 휩싸여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의뢰자는?”
김서준이 조용히 물었다.
“모, 모른다.”
“고태환인가?”
김서준이 혹시나 싶어 던진 질문에 여인이 움찔한다.
“모른다니까!”
모른다고 말하지만, 이번 일에 고태환도 조금은 관련되어 있는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나왔다.
“고한수로군.”
고태환이 아니면 고한수다.
하긴, 고태환이 직접 손을 썼다면 이렇게 한심한 자들을 부리진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십대 길드 중 4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현무 길드의 부길드장이라면 더욱 치밀하고, 확실한 자들을 이용했으리라.
병신같은 고한수가 복수랍시고 허접한 자들을 고용해 자신을 괴롭히려고 한 것이 분명했다.
김서준의 예측이 맞았는지 여인은 더욱 불안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그때,
화악
갑자기 주차장에 불이 탁 켜졌다.
갑작스런 불빛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김서준.
바로 앞에 주저앉아 있던 여인은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몸을 빼냈다.
다른 사내들도 기절한 동료를 어깨에 둘러매고는 황급히 도망쳤다.
김서준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들을 쫓아가 붙잡은 뒤 경찰에 넘겨봐야 그 뒤에서 이들을 조종한 고한수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니까.
‘한꺼번에 때려잡아 주지.’
김서준은 벌써 저 멀리 도망가버린 습격자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근처 바닥에 박혀든 단검을 주워들었다.
단검은 어디서든 흔히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검의 날은 평범해 보이지가 않았다.
‘뭐가 묻어있는데?’
단검의 날에 노르스름한 빛을 내는 액체가 발라져 있었다.
그게 뭘까 싶어 손으로 만져보려는 순간,
부르릉
지하 주차장 출입구 쪽에서 차량 한대가 들어섰다.
아버지, 김주혁의 차였다.
암습했던 여자가 떨어뜨린 모자를 주워 단검을 감싼 김서준은 그걸 주머니에 잘 집어 넣었다.
잠시 후, 빈 자리에 차를 주차시킨 김주혁이 김서준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뭐해? 혹시 나 기다린 거냐?”
김주혁은 아들이 자신을 마중 나온 것이 기분좋은지 만면에 웃음을 띄고 있었다.
“엄마가 걱정해서요. 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새지 못하게 감시 잘 하라고 하시던데요?”
“크흐흠. 내가 한 두살 먹은 애도 아니고. 늦었다, 얼른 들어가자.”
김주혁이 찔끔해 하는 걸로 봐서는 차에 문제가 없었으면 정말로 균열이 발생한 현장에 달려갔을 것 같았다.
“아버지 설마….”
“얼른 가자니까 그러는구나. 너, 옷은 또 왜 이렇게 지저분해? 여기서 체조라도 했냐?”
김주혁은 바로 말을 돌렸다.
이에 김서준도 더는 캐묻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집으로 돌아온 김서준.
아버지가 늦은 식사를 하는 동안, 김서준은 간단히 샤워를 한 뒤 방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다.
‘고한수. 이 자식을 어떻게 요리한다?’
사람까지 고용해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한 녀석이니 절대로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겐 아무 영향이 없도록 최대한 조용하고 비밀스럽게 해결해야 했다.
김서준은 고한석을 처리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계획했다.
어차피 상대는 19살의 철부지다.
깊게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계획이 세워졌다.
‘기대해라 고한석.’
김서준은 내일을 D-day로 잡았다.
생각을 정하고 나니 한결 시원해진 마음으로 습격자가 흘리고 간 단검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옅은 황색을 띄는 액체가 잔뜩 발라진 단검.
이전 세계에서는 무기에 뭔가가 발라져 있다면, 십중팔구 독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죽을 수 있는 극독이거나,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산공독, 혹은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는 신경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김서준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노란 빛을 흘리는 액체에 대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거 설마…. 귀화?’
균열 너머의 세상에서만 서식하는 검은색 꽃, 귀화.
귀화를 갈아 즙으로 만들면 노란 빛을 띈다는 내용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귀화의 즙이 혈관에 침투하게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기억해 냈다.
김서준은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귀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 자세히 살폈다.
‘중독 증상이 마약과 비슷하다라….’
귀화의 즙엔 지독한 환각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즙이 혈관에 조금만 스며들어도 무서운 환영을 보게 되어 미친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
‘귀화의 즙에 피가 닿게 되면 색이 변한다고?’
김서준은 새롭게 알게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손에 살짝 상처를 내어 단검의 날 위에 떨어뜨렸다.
치이익-
살짝 탄내가 나더니 핏방울이 닿은 부분이 보라빛으로 변해버렸다.
인터넷에 나온 정보 그대로였다.
‘그놈들이 귀화의 즙을 어디서 구한 거지?’
귀화의 즙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일단, 균열 너머의 세상에서만 서식하는데다가 귀화 근처엔 늘 환마충이 득실거려서 보통 실력으로는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귀화와 환마충.
뗄래에 뗄 수 없는 이 둘의 관계를 생각하니 뭔가 번쩍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아버지 김주혁의 몸을 망가뜨린 주범인 환마충의 체액.
그리고 오늘 자신을 해코지 하려고 나타난 자들이 사용한 단검에 발라진 귀화의 즙과 그들을 고용한 고한석.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이름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고태환!’
아버지의 몸에 환마충의 체액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주입할 수 있는 인물로 고태환은 매우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귀화의 즙도 습격자들이 가지고 있던게 아니라 고한석이 구해서 준거라면 모든게 이해된다.
‘고태환이 균열 너머에서 귀화와 환마충을 가져와 비밀의 장소에서 몰래 함께 키우고 있었던 거라면?’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그게 사실일 경우, 고태환은 오래 전부터 아버지를 병들게 하여 조금씩 죽어가게 만들 생각이었다는 말이다.
단순히, 친구가 잘되는 걸 방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일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니 정말 악독한 자였다.
멍청한 고한석이 복수의 일념으로 고태환의 비밀 장소를 몰래 숨어들어 거기서 귀화를 훔쳐 그 즙으로 김서준을 해칠 계획을 세운거라면 앞 뒤가 딱딱 맞는다.
참 어처구니 없는 아비와 아들이다.
아직까진 예측이긴 했지만, 느낌 상으로는 확실했다.
‘둘 다 절대 그냥 두지 않는다!’
김서준은 고태환과 고한석의 악독한 심보를 떠올리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심호흡을 하며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김서준.
급할 것 없이 우선 내일, 고한석부터 응당한 대가를 치러주기로 마음 먹었다.
‘목이 타네.’
몇 차례 흥분했더니 목이 말랐다.
김서준은 컴퓨터를 끄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선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고 편안한 모습으로 어머니와 함께 뉴스를 시청 중이었다.
백연지 여사는 균열이 폐쇄되었다는 속보를 보다가 김서준이 방에서 나오자 이리 와서 보라며 손짓했다.
뉴스는 잠실에서 열린 균열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리포터 뒤로 보이는 건물들이 모두 새까맣게 탔다.
가로등은 전부 깨져서 빛을 잃었고, 수많은 건물의 창문들은 모조리 박살이 나 있었다.
-….정말 참혹한 현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균열이 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행해진 일이긴 하나 이것이 과연 옳은 방법이었는지 깊은 의문이 듭니다.
리포터가 심각한 표정으로 현장의 분위기를 설명해 주었다.
-균열은 닫혔습니까? 방금 전의 그 충격은 이찬우 헌터의 A급 신비였는데, 결과는 어떻게 된 거죠?
아나운서의 질문에 화면이 잠실의 하늘을 향했다.
-보시다시피 균열은 닫혔습니다. 무려 96마리의 E급 ‘코모라’를 쏟아냈던 균열은 이찬우 헌터의 ‘폭렬지옥’에 끝내 닫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피해가 너무 큽니다. 반경 500미터 내의 모든 전기가 끊겼고, 많은 건물이 박살났습니다. 어쩌면…. 추가적인 사망자가 더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균열이 닫혔으니 다행이군요. 마지막 코모라 다섯 마리를 놓쳤으면 5분 뒤에는 균열이 D급으로 진화했을테니 말입니다.
아나운서는 다소 안심한 표정이었는데, 리포터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균열에서 몬스터가 쏟아진 시점부터 2시간을 코앞에 둔 지금, 마지막 코모라까지 모두 해치운 건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5분이 더 지났다면 균열이 진화를 시작했을 겁니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큰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찬우 헌터가 신비를 사용해야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오늘 균열 발생으로 인해 현재까지 집계된 사망자만 86명입니다. 그중 헌터 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반 시민이고요. 과연 폭렬지옥의 신비 속에서 얼마나 더 희생자가 나왔을지…. 이를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저로서는 가슴이 먹먹할 뿐입니다.
뉴스는 균열이 언제 어떻게 발생되었고, 헌터들은 어떻게 대응했으며, 결과적으로 어떤 희생을 냈는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더 이상 새로운 소식이 없자 김주혁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헌터 45명에 특수무력부대까지 동원했는데도 민간인 희생자가 82명이라니…. 고작 E급 균열인데 이런 희생자가 나오는게 말이 되나?”
“그래도 균열이 진화하는 건 막았다잖아요. E급이 D급으로 진화하면 7일 만에 더 강한 몬스터들을 5배나 쏟아낸다면서요?”
백연지는 일반인이지만 헌터인 남편과, 각성한 아들 덕분에 균열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당신도 아까 봤지 않소? E급 몬스터인 코모라 대부분을 해치운 건 죄다 C, D급 헌터들이라고. 애초에 B급 이상의 상급헌터들은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는 거지. 그러다 상황이 안좋으니 이찬우가 나서서 그 지랄맞은 신비를 사용한 거고.”
김주혁 또한 과거엔 현장 헌터로 활동했기에 현장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말은 거의가 사실이기도 했다.
상급헌터들은 엉덩이가 무거운 건지, 아니면 E급 균열이라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시민들이 죽어나가고 있는데도 현장에 출동하지 않았다.
운 나쁘게도 현장 근처에 있던 C, D급 헌터들이 가장 먼저 도착해 코모라들을 상대했는데, 숫자가 너무 많다보니 방어선이 뚫리고 만것.
그로 인해 시민의 희생이 커졌다.
게다가 2시간이라는 제한 시간 내에 균열에서 쏟아진 몬스터를 전멸시키지 못하면, 한단계 높은 등급으로 균열이 진화하기 때문에 시간마저 촉박했다.
결국, 2시간이 채워지기 5분 전에서야 A급 헌터인 이찬우가 부랴부랴 현장에 나타나 해결사처럼 신비를 사용해 숨어있던 마지막 코모라를 해치운 것이다.
문제는 이찬우의 신비인 폭렬지옥이 특정 범위 내의 생명체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찬우가 마력을 좀 더 사용하고 집중해서 신비를 컨트롤 한다면 몬스터만 집중적으로 타격하는게 가능하다.
하지만 이찬우는 절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마력을 낭비하는걸 싫어하고, 골아프게 집중하는 것도 싫어하는 작자였기에 대충 범위만 넓게 지정해서 무작정 신비를 사용했을 터.
김주혁은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이번 일로 추가적인 희생자가 더 나올 것임을 직감했다.
“아버지, 화 내봐야 달라지는 건 없어요.”
김서준이 김주혁의 화를 달랬다.
“달라지는 건 없겠지.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구나. 이게 다 균열관리국의 지휘능력이 바닥까지 곤두박질 쳐서 생긴 문제다.”
균열관리국.
국가 소속의 정부기관으로 많은 헌터를 보유하고 있고,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곳이었다.
하지만 균열관리국이 현재 추구하는 바는 애초의 설립 목적에서 벗어난지 오래였다.
정부기관이 사설 길드처럼 이익만을 쫒기 시작하면서 균열관리국은 기업화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같이 서울 한복판에서 균열이 열렸는데도 사설 길드의 도움을 전혀 요청하지 않는 무지함을 보였다.
이런 생각은 김주혁 혼자만 하는게 아니었다.
뉴스에서는 오늘 발생한 균열 사건을 두고 과연 대를 위한 소의 희생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균열관리국의 능력부족으로 발생한 막을 수 있었던 참상인지를 놓고 토론까지 벌이고 있었다.
더불어 폭렬지옥이라는 신비로 인해 자연재해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잠실 시민들의 억울함을 인터뷰로 내보내기도 했다.
새까만 재로 뒤덮힌 도로 위에서 불길에 구워져 부서지고, 박살난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시민들.
그들 주변에선 1.2미터 크기의 귀엽게 생긴 로봇들이 바쁘게 오가며, 시민들에게 생필품들을 나눠주고 있었다.
어떤 로봇은 강아지의 모습이었고, 어떤 로봇은 원숭이를 닮았다.
그 로봇들을 스치듯 바라본 김서준은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뜨고 말았다.
‘GX마크?’
로봇들의 이마에 한결같이 새겨진 작은 이니셜, ‘GX’가 유난히도 김서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봉사로봇이라고 불리는 이 기계들은 5전 전쯤 세상에 첫 선을 보였는데, 벌써 실생활 깊숙한 곳까지 활용되고 있었던 모양.
문제는 로봇들에 새겨진 이니셜이 김서준에겐 너무 섬뜩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GX.
이 마크는 이전 세계에서 모든 인류에게 공포를 선사했던 마신병들의 어깨에도 똑같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