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파박
두 번의 발돋움 만으로 거리를 제로로 만들어 버린 김주혁.
그의 검이 김서준의 목 근처를 베어내는 순간이었다.
취잇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소리를 내며 김서준이 어깨를 미세하게 들썩였다.
파캉!
김주혁의 팔이 묵직한 충격에 위로 확 들렸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공격이 날아온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그런데 검을 쥔 손이 하늘로 튕겼다.
저릿한 충격을 억누르며 김주혁이 몸을 핑그르르 휘돌렸다.
과연 역전의 노장답게 판단이 빨랐고, 반응도 기가막혔다.
김주혁이 검을 포기한 채 그대로 뒤돌려차기를 날리자 김서준은 피하지 않고 되려 발이 날아드는 방향으로 어깨를 들이밀었다.
퍼억
소리만 클 뿐, 아무런 충격이 없었다.
회전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어깨로 차단한 거라 김주혁의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우뚱 해졌다. 그때, 김서준의 손이 다시 흔들했다.
취잇
머리 위로 호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목검.
김주혁도 이번만큼은 검의 궤적을 보았고, 막아내기 위해 목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김주혁의 목검은 허공을 치고 말았다.
탁
김서준의 목검이 어느새 김주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끝났는데요?”
‘내 발도술 죽이죠?’라는 표정으로 히죽 웃는 김서준의 얼굴이 오늘따라 얄밉다.
김주혁은 아들의 목검을 슬쩍 밀어내며 뒷걸음질 쳤다.
“다시.”
“아, 뭐에요? 승부 났잖아요?”
“그러니까, 1대 0.”
“….네?”
“3판 2승제다.”
김주혁의 억지에 김서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3판 2승으로 끝이죠? 지고나서 5판 3승, 이런 말 하기 없기에요?”
“그건 상황 봐서.”
김주혁은 아들에게 친구대하듯 억지를 부렸다.
그는 지금 너무도 즐거웠다.
자신의 아들이 어느새 이렇게나 성장해 있었단 말인가.
그저 소심하고, 붙임성 떨어지는 열아홉 살의 소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보니 가르쳐 준 적도 없는 발도술을 신비에 가깝게 사용하는 검술 실력도 갖췄다.
신비를 사용하지 않는 근접전에서는 B급 헌터들과도 맞상대가 가능했었던 김주혁이기에, 아들의 이런 성장이 자신의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아 기쁠 수밖에 없었다.
“아들한테까지 억지 쓸 셈이에요?”
“억지 아니고 애비로서의 권위다.”
“와….”
김서준이 짐짓 어처구니 없다며 감탄성을 흘렸지만, 김서준도 아버지와의 대련에 너무나 행복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마주섰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김서준은 더 이상 발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수라극섬의 다양한 검로를 마음껏 펼쳐내기 시작했다.
종베기와 찌르기의 조합에 횡베기와 휘돌려 올려치는 연속기술까지.
원래대로라면 벼락처럼 뿜어져야 할 검로였지만 아버지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최대한 흐름을 늦췄다.
빠악. 빠가각.
목검과 목검이 부딪치며 타격음이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아파트 옥상 위에서 벌어지는 두 부자의 검술대련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판 2승이니, 5판 3승이니 하는 제약은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마치 검으로 대화를 나누듯, 두 사람은 공격과 방어를 번갈아 가며 자연스럽게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대련을 시작한지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났다.
김서준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체력이 계속 용솟음쳤지만, 김주혁은 금방 지치고 말았다.
추궁과혈의 효과가 아무리 좋다지만, 오랜 세월 환마충의 체액으로인해 몸이 안에서부터 갉아먹힌 탓에 정상적인 체력을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김서준은 그런 아버지의 상태를 알아보고 대결을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김주혁의 정면으로 파고든 김서준은 힘차게 뻗어나오는 검을 자신의 목검으로 쳐내며 빙글 원을 그려냈다.
검막이에 걸려 크게 회전한 김주혁의 검은 김서준이 검끝으로 손등을 탁 치는 순간 하늘로 날아올랐다.
휘리리리릭
멀리 튕겨져 날아가는 목검.
김주혁은 그 검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고 그때 김서준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자신의 목검을 끼워 천궁시로 날렸버렸다.
파앙
화살처럼 쏘아진 목검은, 옥상 바깥쪽으로 날아가던 목검을 향해 날아갔다.
지금 사용한 초식은 천궁시 요격.
김서준이 손가락을 꺾자 목검이 방향을 틀어 반대방향으로 김주혁의 검을 쳐냈다.
그 힘에 다시 튕겨진 목검은 부메랑처럼 김주혁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김서준이 내던진 목검 또한 반원을 그리며 곧바로 회수된 상태.
김주혁은 아들이 보인 신묘한 능력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방금 그거…. 뭐냐?”
“천궁시요.”
“그러니까 그 천궁시라는게 뭐냐고? 새로운 신비라도 되는 건가? 아니지…. 이미 신비를 각성했는데 또 다른 신비가 생길 리가 없잖아?”
김주혁은 혼란스러운지 혼잣말까지 중얼거렸다.
“무공이라는 거에요. 몇 년 전에 우연히 은거 중인 고인을 만났는데, 그분한테 배웠어요.”
“은거 고인? 지금 무슨 무협영화 찍냐? 뭔, 말도 안되는 소릴 해?”
김주혁이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김서준은 그냥 이 거짓말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다른 지구에서 이쪽 지구로 넘어온 29살의 김서준이라는 건 말할 수 없었으니까.
김서준이 끝까지 은거 고인에게 배웠다고 고집을 부리자, 김주혁은 그 거짓말 같은 거짓말을 그냥 믿어주기로 했다.
은거 고인이니 뭐니 하는 말은 둘 째치고, 눈앞에서 아들이 보여준 실력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까.
허공으로 튕겨나간 목검을 다른 목검으로 쳐서 되돌리는 광경은 흡사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기어검을 보는 듯 했다.
목검에 무선 조정 장치라도 설치된게 아닌 이상은 누구도 펼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능력.
“아버지한테도 무공, 가르쳐 드릴게요. 원하신다면요.”
김서준은 아버지가 무공의 위력을 목격했으니 분명 배우겠다고 말할 거라 확신했다.
“이 나이에 무슨 무공이냐? 애비가 무슨, 검술가문 막내아들도 아니고. 이제 시작해서 어느 세월에 고수가 되겠어?”
“아버지라면 몇 년 내로 고수 소리 들을 수 있을걸요?”
“흐음. 그 거짓말 진짜냐?”
“네. 거짓말 같은 진짜에요.”
“그럼 거, 뭐냐. 단전에 막 내공 같은 거도 쌓을 수 있는 거고?”
김주혁은 자신이 아는 한도에서의 무공에 대한 지식을 총 동원했다.
이 세계엔 무공이 실제하진 않지만, 무공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같은 건 차고 넘쳤으니까.
“아버지한테 딱 맞는 심법도 있어요.”
김서준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심법 중에서 아버지에게 가장 어울리는 내공심법 하나를 떠올렸다.
혼원진기공(混源眞氣功).
내공 수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어렵고, 나이가 좀 있는 자가 빠르게 익힐 수 있는 독특한 심법이었다.
이 심법은 어떤 자세, 어떤 순간에도 정신만 제대로 집중할 수 있다면 내공수련이 가능하기에 멀티플레이어 신비를 지닌 아버지가 익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주화입마에 걸릴 위험이 크게 높아진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김주혁이기에 오히려 아무 위험이 되지 않는다.
김주혁은 진심이 담긴 아들의 눈빛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입맛을 살짝 다셨다.
“설마 이 애비가 널 스승으로 모셔야 하는 건 아니지?”
김주혁의 엉뚱한 상상에 김서준은 피식 웃었다.
“큭.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냥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선물?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 그럼 정말 다행이구나.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아들.”
김주혁은 만면에 웃음을 그리며 목검을 화구통에 넣었다.
김서준도 목검을 그 안에 넣었고, 그러다 화구통 안에 또 다른 무기가 들어있는 걸 봤다.
“어? 이건….?”
“참 빨리도 알아본다.”
김주혁이 화구통 안에 들어있던 또 다른 무기를 꺼내들었다.
1.2미터 길이의, 한쪽 날이 살짝 휜, 푸른빛의 단단해 보이는 곡도(曲刀)였다.
도신의 폭은 손가락 세 마디정도.
도첨(칼끝)은 사선으로 잘린듯 비스듬한 형태였고, 손잡이에는 손가락을 끼워넣을 수 있게 구멍 네개가 뚫려 있었다.
그리고 손잡이 끝부분엔 호랑이가 포효하는 얼굴이 멋드러지게 조각되어 있었다.
“네가 대련에서 이기면 주려고 준비한 선물이다.”
“이건 아버지가 아끼던 무기잖아요?”
이 곡도의 이름은 ‘아론다이트’.
전설 속에 회자되는 성검이자 마검이기도 한 아론다이트와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선과 악은 늘 함께 한다는 의미로서 김주혁은 곡도에 아론다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곡도는 김주혁이 한창이던 시절, ‘주조’의 신비를 지닌 헌터와 ‘인챈트’ 신비를 지닌 헌터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평범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마력이 깃들어 있어 철을 뛰어넘는 엄청난 강도를 지닌다.
또한 초전도 효과까지 가지고 있어서 어떤 속성의 신비라도 이 무기를 통한다면 쉽고, 강력하게 펼쳐낼 수가 있었다.
이 아론다이트의 무기등급은 무려 B등급.
시중에 내다 팔아도 5억을 호가하는 엄청난 무기였다.
“선물은 원래 아끼는 걸 주는 법이지. 그리고 너라면 이걸 가질 자격이 있다.”
“아버지…”
김주혁이 아론다이트를 김서준에게 건넸다.
잠시 멈칫했던 김서준은 이어지는 김주혁의 말에 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아론다이트의 주인은 너다.”
*
이날 오전은 오롯이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김서준은 아버지에게 혼원진기공의 구결도 알려줬다.
내공수련은 꽉 막힌 방안에서 하는 것보다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하는게 조금 더 효과적이라 최적의 기회였다.
혼원진기공의 내공구결을 알기 쉽게 설명한 김서준은 아버지가 단전을 이룰 수 있도록 등에 손바닥을 대고 운기를 도왔다.
그렇게 얼마의 흘렀을 때, 김주혁은 아주 묘한 느낌을 받았다.
단전 부근에서 시작된 희미한 간질거림.
하지만 긁고 싶거나 불편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않는다.
오히려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
그 느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김서준이 알려준 방법대로 기운을 조절해 보자 그 기운이 뜻대로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기운은 가슴을 지나 팔과 머리, 다시 몸통을 지나 다리를 휘돌더니 단전으로 되돌아 왔다.
몇 번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자 단전에서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좁쌀만큼도 안되는,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작은 알갱이였다.
김주혁은 그 알갱이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걸 좀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신비를 사용했다.
번쩍.
김주혁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가 눈을 감자 빛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으로 뒤덮였다.
주변에 떠다니는 먼지 한올의 움직임까지 김주혁의 인지능력에 감지되기 시작했다.
김서준 또한, 그런 김주혁의 등에 손을 대고 있다가 놀라운 경험을 하게됐다.
자신은 이곳에 그대로 있는데, 정신만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묘한 기분.
아버지의 등이 보이고, 주변의 상태가 파노라마처럼 드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김서준의 정신은 분신술을 펼치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옥상 난간에 가서 도심의 정경을 감상하기도 했고, 환풍기 위에 쪼그려 앉아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눈을 감고 운기에 집중하고 있는 김주혁을 코앞에서 바라보기도 했으며, 아버지가 준 아론다이트를 들고 검무를 추는 자신도 있었다.
‘이게…. 아버지의 신비?’
김서준은 김주혁이 지금 신비를 사용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신비의 힘이 자신에게까지 적용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
김서준이 알기로 김주혁의 신비는 자기 자신에게 사용하거나, 상대에게 사용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김주혁 본인도 신비의 효과를 봄과 동시에, 김서준에게까지 그 힘을 전하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신비’한 현상이었다.
김서준이 김주혁의 신비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있던 그때,
“하아….”
김주혁이 긴 숨을 토해내자 김서준이 느끼던 기이한 현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김서준은 아버지가 운기행공을 끝냈음을 느끼고 등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가만히 아버지의 반응을 기다렸다.
김주혁은 눈을 뜬 직후 자신의 두 손을 들어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뭔가 엄청난 걸 본 것처럼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야? 왜 60이야?”
“….네? 60이라니요?”
뜬금없는 소리에 김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주혁은 놀란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김서준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짧게 한마디 했다.
“서준아. 방금 마력 59의 벽이 깨졌다.”
“벽이…. 깨졌다고요?”
마력 59의 벽.
김주혁에게 그 벽은 영원히 넘지못할 정도로 높기만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벽이 깨졌다니?
“네 도움대로 운기를 했더니 단전에서 알갱이 같은게 느껴져서 신비를 써서 그게 뭔지 집중적으로 분석해 봤다. 그게 네가 말한 내공의 응집체라는 걸 알아내는데는 성공했는데, 갑자기 몸이 경직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을 안하더라고. 내기도 움직이지 않고 말이야. 그래서 내 몸을 옥죄는 힘을 이를 악물고 때려부쉈다. 그걸 부수고 났더니…. 마력이 60으로 올라있구나.”
“진짜요? 마력이 60이 된 거 확실해요?”
“그럼 진짜지. 애비가 자식한테 거짓말이라도 할까봐? 너한테 내 마력수치를 보여줄 수 없는게 너무 안타깝구나.”
김서준은 아버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너무도 기쁜 표정으로 아버질 끌어안았다.
“잘됐습니다. 정말 정말 잘됐다고요!”
“아이구, 우리 철들었다던 아들이 다시 어린애가 되셨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주혁의 손은 김서준의 등을 토닥여 주고 있었다.
이게 다 아들 덕분이었다.
김서준이 이 거짓말 같은 내공심법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는 크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절대 평범하지 않은 그 굉장한 마사지를 어디서 배운 건지 또한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아들 덕분에 모든게 달라졌다.
인생의 내리막길을 터벅 터벅 걷고 있다가, 마치 새로운 인생을 향한 재도약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고맙다, 아들. 이제 이 애비는 네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주마.”
“뭐에요, 그럼 전까지는 안믿었다는 말이네요?”
“그, 그럴리가 있겠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하. 하하하!”
김주혁은 호탕하게 웃었고, 김서준도 함께 한참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