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금요일 오전 수업을 마친 김서준.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그는 배낭 하나와 화구통을 어깨에 매고 교수전용 주차구역으로 이동했다.
김서준이 매고있는 배낭은 아티팩트였다.
공간확장이라는 단순한 효과가 담긴 배낭으로, 배낭의 크기보다 두 배나 큰 공간이 내부에 감춰져있어 생각보다 많은 물건을 담을 수가 있었다.
무게는 달라지지 않으며, 배낭보다 큰 물건을 넣을 수 없다는 제한이 있어서 가격은 크게 비싸지 않았다.
이런 류의 아티팩트는 이미 실생활에 널리 퍼져서 사용 중이기 때문에 구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김서준은 이 배낭을 세일가로 단돈 99만원에 구매했고, 그 안에 옷가지와 식료품, 그리고 압축침낭까지 잘 접어 담아 둔 상태였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바로 심재덕 교수와 만날 수 있었다.
“짐이…. 간편하구나?”
심재덕은 김서준이 배낭 하나와 화구통 하나만 달랑 들고 있자 의아해 했다.
보통 처음 균열 레이드에 참가하는 헌터들은 뭘 준비해야 될지 잘 몰라서 닥치는데로 짐을 챙기기 때문에 그 양이 상당하기 마련이었으니까.
“간편하진 않은데요? 배낭이 좀 특별한 거라…. 일단, 이거요.”
김서준이 대뜸 영수증을 건넸다.
그걸 본 심재덕의 인상이 구겨졌다.
<공간확장용 배낭(블랙): 990,000원>
“약속대로 100만원은 안 넘겼어요.”
“….알았다.”
심재덕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참아내며 지갑에서 5만원 권 20장을 꺼내 김서준에게 넘겼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런 아티팩트까지 얻었으니까요.”
김서준이 활짝 웃으며 차액 1만원을 꺼내들자, 심재덕은 손사레를 쳤다.
“잔돈은 됐다. 그보나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바로 출발해야 하니 어서 타거라.”
학생 앞에서 1만원을 거슬러 받는 쪼잔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심재덕.
그는 한시라도 빨리 김서준을 레이드 팀에 맡기고 싶을 뿐이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김서준은 심재덕의 차 조수석에 탔고, 차는 부드럽게 아카데미를 벗어나 용인으로 향했다.
***
용인 신갈오거리.
57번 균열은 바로 그곳에 위치했다.
지금은 군과 균열관리국에 의해 통제되고 있어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곳으로 변했지만, 과거엔 너무 많은 차량으로 인해 늘 교통체증이 발생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심재덕은 차를 주차한 뒤, 허공에서 오로라 같은 빛을 뿌려내고 있는 균열 쪽으로 다가섰다.
보통의 균열은 허공 100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발생하는데, 이곳의 균열은 27미터 밖에 되지 않아 진입이 어렵지 않았다.
몇 겹으로 둘러쳐진 삼엄한 경계를 지나 균열 바로 아래에 도착하니, 대형 고소작업차 주변으로 여러명의 헌터들이 모여있었다.
김서준은 상황판을 놓고 설명을 하고 있는 사내와 그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설명을 하는 헌터는 이번 레이드 팀의 공대장인 이형모였고, 상황판에 자료를 비추고 있는 자는 그의 동생인 이한수였다.
나머지 여섯 명의 얼굴도 이미 균열관리국의 인트라넷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어이쿠, 벌써 작전 브리핑 중이시네요? 저희가 늦은 겁니까?”
심재덕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서자 이형모가 무덤덤하게 심재덕을 바라봤다.
“어차피 작전은 우리가 수행하는 것이니 학생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지요.”
“아, 그건 그렇군요. 하하하. 여기, 이 학생이 바로 이번 레이드에서 여러분들께 신세를 지게될 김서준입니다.”
심재덕의 소개에 헌터들이 모두 김서준에게 시선을 모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쭉 훑는 날카로운 시선들에 김서준은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힘차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제3 헌터 아카데미의 1학년 김서준입니다!”
당차고 예의바른 모습에 헌터들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여러분들의 눈에는 이 녀석이 너무 어리고 부실해 보이겠지만, 이래뵈도 DB급 헌터 유망주를 때려눕힐만큼 강하답니다. 적어도 레이드에 폐를 끼칠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죠.”
심재덕은 칭찬인지 내려깎기인지 모를 소리를 했고, 그 말에 헌터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김서준은 누가 봐도 부실해 보이지 않았다.
185센티의 큰 키에, 군살도 없어보이는 다부진 체형, 거기에 보는 사람의 시선을 빼앗을 정도로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선천적인 신체적 약점 때문에 부실해 보인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일주일 사이에 김서준의 몸은 더할 나위없이 완벽한 형태로 거듭나고 있었다.
“난 이형모다. 이번 레이드 팀을 맡고 있지. 여기는 이한수고, 내 동생이다. 여기 이 독하게 생긴 친구는 신우진이고, 저 덩치는…..”
이형모가 친절하게 레이드 팀을 하나하나 소개해 줬다.
그러는 와중에 김서준은 이형모가 심재덕과 계속 알 수 없는 눈짓을 주고받는 걸 수차례나 목격했다.
‘날 위해 준비했을 함정에 적어도 팀 전원이 얽혀있는 건 아닌 모양인데?’
김서준이 보기에 이형모는 팀원들 앞이라 그런지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가 특히나 신경쓰는 사람은 신우진이라는 20대 후반의 단단해 보이는 체격의 사내였다.
이형모가 신우진의 눈치를 본다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 다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 그런데 김서준 학생. 아무리 참관이라고는 해도 위험한 균열 너머로 들어가는 작전인데, 맨손은 좀 아니지 않나?”
이형모는 김서준이 별 무기도 가져오지 않은걸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김서준은 싱긋 웃으며 화구통을 벗어 뚜껑을 열어보였다.
“제 무기는 이겁니다.”
아론다이트.
독특한 외형의 아론다이트가 모습을 드러내자, 두 사람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명은 공대장 이형모였고, 다른 한명은 신우진이었다.
그들의 반응으로 보아 아론다이트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이형모는 곧바로 심재덕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보냈다.
“이 학생…. 혹시 현무 길드 김주혁 헌터의 아들입니까?”
역시나 이형모는 아론다이트가 김주혁의 소유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말에 뜨끔해 한 심재덕이 조금 우물쭈물 거렸다.
“에, 그것이…. 네. 김주혁 헌터가 김서준 학생의 아버지시죠.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흐음. 심교수님이 말씀하시길, 평범한 아카데미 학생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조금 괜찮은 신비를 각성한 FA등급의 학생입니다만?”
“그 평범한 학생이 김주혁 헌터의 아들일 줄은 생각도 못했군요. 아무튼…. 현역에선 물러났다고 해도, 한때 이름을 날렸던 김주혁 헌터의 아들과 레이드에서 함께하게 되다니, 이것도 나름 영광이군요.”
이형모는 대충 얼버무리면서 팀에게 균열 진입을 준비시켰다.
그때, 김서준은 누군가의 마력이 크게 격동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건 태양신공을 상시로 운용하기 시작하면서 김서준이 얻게된 또 하나의 특별한 능력이었다.
태양신공의 막강한 기운은 몸안에 모두 가둬두는게 쉽지 않았고, 몸을 벗어난 기운들이 사방으로 줄기줄기 뻗어나가 김서준에게 주변 마력의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마력의 출렁임을 읽어내 누군가의 감정이 격해졌다는 것까지 알아내는게 가능해졌다.
김서준은 감정에 흔들림을 보이는 인물이 신우진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뭐지? 이형모도 그렇고, 저 신우진이라는 헌터도 아버지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지금으로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이형모와 그의 팀은 모두 고소작업차의 커다란 판넬 위에 올라갔다.
모두들 각자의 무기를 들고, 갑옷이며 방패 같은 보호구도 모두 착용한 상태.
이제 판넬이 위로 향하고, 27미터 상공에 위치한 균열 속으로 진입하면 레이드가 시작되는 것이다.
심재덕이 김서준에게 손을 흔들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할 때였다.
갑자기 김서준이 이상행동을 보였다.
“시, 심교수님!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습니다.”
심재덕 교수를 부르며 다리를 부들부들 떨어대는 김서준.
“김서준 학생.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금 헌터님들이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얼른 올라가거라. 너 하나 때문에 레이드가 지체되서야 내 어찌 면목이 서겠느냐?”
“저도 압니다. 하지만…. 하지만 심장이 너무 떨려서 그래요. 지구가 아닌 곳에 가는 것도 처음이고, 그런 곳을 이렇게 낯선 분들하고만 가려니까 마음이 안정되질 않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허, 이제와서 못하겠다니!”
심재덕이 어처구니 없어 하며 고개를 들자, 판넬 위에 올라서 있던 헌터들이 모두 인상을 찌푸리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신우진이 2미터 위의 판넬 위에서 허리를 숙여 김서준을 내려다 봤다.
“김서준 학생. 정 못하겠으면 빠져도 된다. 이런 건 강제로 해선 안되거든. 하지만 만약, 아직 균열에 들어갈 생각이 있다면 한번 꾹 참고 도전해 봐도 괜찮다. 내가 잘 돌봐줄 테니 너무 걱정 말고.”
부드럽고 친절한 말에 김서준이 겁먹은 표정을 안정시키더니 뭔가를 결심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심교수님이 함께라면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호? 그래?”
신우진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냐는 듯 이형모를 돌아봤다.
그러자 이형모도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명 정도는 더 참가해도 문제는 없겠지. 심교수님. 그 학생 데리고 올라오시죠.”
이형모의 말은 심재덕에게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이보시오들! 갑자기 난 왜 끌어들이는 거요? 그리고, 김서준 학생.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나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야? 난 레이드에 참가 신청도 하지 않아서 함께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
“내가 허락할 테니 함께 가자 이겁니다.”
이형모가 귀찮다는 얼굴로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고, 공대장님. 보시다시피 전 아무 준비도 안해서 제가 가면 여러분들께 짐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심재덕은 필사적으로 레이드에서 빠지려고 했다. 하지만 이형모는 모든게 귀찮기만 했다.
“그럼 저 학생 데리고 돌아가시죠. 학생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으니, 나중에 다른 팀과 조인해 보시든가.”
이형모는 곧장 고수작업차의 무선 조종장치를 조작했다.
지이이잉
판넬이 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에 심재덕은 시뻘게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했다.
김서준은 어느새 심재덕의 옆구리 옷을 붙잡고 있었다.
헌터들과 김서준을 수차례 번갈아 살피던 심재덕.
결국 그가 손을 들어 이형모를 불렀다.
“공대장님! 잠시만, 잠시만요!”
덜컹
이형모의 손짓에 다시 판넬이 멈춰섰다.
“가겠습니다. 저도 가겠다 이겁니다!”
“확실합니까? 균열 안에 들어가서, 또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곳에 버려두고 우리끼리 갈거요. 그래도 상관없으면….. 타시죠.”
“끄응.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국 심재덕까지 레이드에 참가하고 말았다.
김서준과 심재덕까지, 총 10명의 인원을 태운 판넬은 느릿느릿 27미터 높이의 균열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김서준은 여전히 심재덕의 옷을 잡아당긴 채 겁먹은 듯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두들 가까워지는 균열을 올려다보며 비장한 모습이었지만, 김서준만은 그렇지 않았다.
살짝 숙인 그의 입가엔 묘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연기라는거…. 생각보다 할만한데?’
그의 미소엔 자기가 해보인 연기에 만족해 하는 감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
가까이에서 본 균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빛이 굴절하면서 생긴 다양한 칼라가 균열 주변에서 반짝거렸고, 지그재그로 쭉 찢어진 허공의 공간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형모는 마지막으로 주의점을 강조하고는 가장 먼저 균열을 향해 손을 뻗어올렸다.
그의 손이 검은색 균열의 면에 닿는 순간, 이형모의 몸이 눈깜짝할 사이에 균열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다음은 이한수였다.
이형모의 동생인 이한수는 심재덕과 김서준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도 빠르게 사라졌고, 뒤이어 계속해서 헌터들이 균열 속으로 사라져갔다.
“겁먹지 말고 내 근처에만 있으면 된다.”
신우진 헌터는 김서준이 정말로 겁을 먹은 거라 생각하는지, 계속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랄 것 까지야…. 자, 심교수님부터 진입하시죠.”
“저….부터요?”
사실, 김서준까지 균열에 들어가면 몰래 도망칠까 생각하고 있던 심재덕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 신우진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심재덕은 울며겨자먹기로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었다.
퓩
심재덕이 사라지고, 다음은 김서준 차례였다.
김서준은 심재덕이 사라지자 움츠렸던 몸을 쭉 펴고는 신우진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그려주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김서준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균열을 향해 손을 뻗어냈다.
김서준마저 모습을 감추자, 신우진은 살짝 벙찐 표정을 지어보였다.
‘방금 그 표정은 뭐지?’
균열이 무섭다며 심재덕과 함께 가고 싶다고 벌벌 떨던 학생이 아니었다.
너무나 당당하고 자심감 가득한 얼굴.
‘설마…. 일부러 교수까지 끌고 가려고 연기를 했던건가?’
김서준의 180도 달라진 태도를 봐서는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 관계길래 저러는 거야?’
신우진은 공대장인 이형모가 심재덕 교수와 암묵적인 거래가 있었다는 걸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이런 경우, 열이면 열 교수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학생을 괴롭히기 위함이라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었고.
그래서 김서준이 등장했을 때, 속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레이드에 참가한 학생은 꽤나 고생을 하게 될 것이며 자칫 잘못하면 큰 부상을 입어 헌터로서의 미래마저 망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우진은 그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이형모가 이번 레이드에서 몰래 꾸미고 있는 계획이 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일단 조용히 지켜만 봐야했기에, 학생에겐 미안했지만 도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하필이면 김주혁의 아들이었다.
8년 전, 신우진이 막 헌터가 되어 균열관리국 소속으로 활동을 시작했을 때, 예고없이 닥친 위험에서 그를 구해준 적이 있는 은인 김주혁 헌터.
김서준이 김주혁의 아들이라는 걸 알게된 순간부터 모른척 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대놓고 뭔가 문제가 있으니 김서준보고 레이드에서 빠지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서준이 심재덕 교수와 함께 가길 원해서 들어주려고 신경을 써준 것 뿐인데, 그게 김서준의 의도된 연기일 수 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뭐가 됐든, 네가 큰 사고는 당하지 않게 내가 지켜봐 주마. 적어도 목숨 빚은 갚고 싶으니까.’
신우진은 그렇게 다짐하며 균열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