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균열 너머의 세상은 무척이나 화창했다.
발목까지 오는 잔디가 끝없이 펼쳐진 들판.
곳곳엔 낮은 구릉들이 가득했고, 앞뒤로 크고 작은 숲이 드문드문 위치해 있었다.
김서준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뉴질랜드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덥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춥지도 않은,
대한민국의 봄 날씨가 딱 이곳과 같았다.
“바닥에 포지션 마커 심고 구름판 박아놔. 바로 내 뒤를 따라 이동한다. 간격은 5미터 유지. 대형은 2-2-4다.”
이형모의 지시에 헌터 둘이 방금 빠져나온 균열 아래에 안테나가 달린 박스를 파묻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는 특수제작된 발구름판을 설치했다.
지구에서의 균열은 27미터 높이에 생성되었지만, 여기선 2.7미터 높이다.
정확히 10분의 1.
발구름판은 나중에 귀환할 때 점프에 도움을 주기 위한 장비였다.
오래전, 처음으로 폐쇄되지 않은 균열 너머의 세상에 발을 디뎠던 헌터들이 있었다.
그들은 균열이 생기면서 발생하는 몬스터 웨이브가 어떤 원리로 이루어지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연구와 탐사를 거듭했었다.
그리고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균열 너머의 세상에 존재하는 초거대 몬스터가 중소형 몬스터들을 손으로 잡아 균열에 던져넣는 것이라고.
다행히 균열의 크기가 작아서 중형까지만 통과가 될뿐, 대형이나 초대형 몬스터는 통과할 수 없다는게 그들의 이론이었다.
하지만 이 이론은 많은 반대여론에 부딪쳤다.
지능이 부족한 몬스터가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균열 너머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그곳에 몬스터들을 던져넣느냐는 것이다.
결국, 균열을 통해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는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못한 상태였다.
이형모는 공대장답게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벌써 정확하게 파악하고 팀을 이끌기 시작했다.
목표는 저 멀리 보이는 높다란 산맥이었다.
눈앞에 보인다고 가깝다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30킬로미터나 되는 먼곳에 위치해 있었다.
평균적으로 걷는 속도를 시간당 4킬로미터라 봤을 때, 8시간은 걸어야 닿을 거리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각성한 헌터라 해도 몇 시간 동안 내내 뛸 수도 없고, 중간 중간 마주치게 되는 몬스터들 때문에 빠른 이동은 불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이 균열에서의 보스 레이드 일정을 2박 3일로 잡아놓은 것이기도 했다.
이동 대형의 선두엔 이형모와 이한수가 섰고, 중간에 서포트형 신비를 지닌 헌터 둘과 김서준, 그리고 심재덕 교수가 자리했다.
후방에 4명의 헌터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이 균열에서 등장하는 몬스터인 부르크 때문이었다.
1.5미터 크기에 양의 외형을 한 이족보행의 몬스터 부르크.
북실북실한 털로 뒤덮혀 있는데다가 생김새도 순한 양과 같아서 전투력이 낮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온몸에 가득한 하얀 털 안쪽엔 헬창 저리가라 할 정도의 근육이 가득하며, 말처럼 튼튼한 다리를 가진 덕에 점프력과 이동 속도가 엄청나다.
게다가 전투에 돌입하면 툭 튀어나온 입이 쫙 찢어지면서 성인 몸통을 한번에 뜯어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벌어지기도 한다.
몬스터의 등급은 E급.
하지만 최소 15마리 이상이 몰려다니는 놈들이고, 툭하면 후방에서 기습을 하기 때문에 우습게 봤다간 되려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시간은 지구와 거의 똑같이 흐른다.
하루 길이는 똑같이 24시간 정도이며, 해가 떨어져 있는 시간만 약간 달라서 약 8시간에 불과했다.
그래서 레이드 팀은 지구 시간으로 밤 8시가 넘어서야 이동을 멈추고 야영을 준비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부르크 무리를 총 3번이나 마주쳤다.
처음엔 18마리였고, 두 번째는 23마리, 방금 전에 마주한 세 번째 무리는 무려 28마리나 됐다.
다들 노련한 헌터라 그런지 사상자는 전무.
김서준은 정말 작정하고 참관만 할 생각인지 전투가 발생해도 대형의 중앙에서 꿈쩍을 안했다.
첫날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조용히 지나가는 듯 했다.
5시간을 줄기차게 이동했기 때문에 목표인 산맥은 벌써 코앞이었다.
주변 경계가 쉽도록, 사방이 탁 트여 있지만 바위가 듬성듬성 있어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장소를 야영지로 잡았다.
식사를 하고, 2명씩 불침번을 서기로 한 뒤 각자 편한 자세로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사위는 깊은 어둠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때,
샤샤샥.
김서준의 감각으로 많은 숫자의 몬스터들이 빠르게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몰라 잠들기 직전까지 태양신공을 운용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헌터들은 다가오는 존재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상황.
김서준은 눈을 번쩍 뜨고 조용히 아론다이트를 거머쥐었다.
“오늘따라 달밤에 체조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드네요.”
“김서준 학생. 그럴 여유가 있거든 헌터 님들 덜 피곤하시라고 대신 불침번이라도 서 주던가.”
심재덕이 침낭에 몸을 집어 넣은 채 한쪽 눈만 뜨고 잔소리를 했다.
김서준 때문에 억지로 끌려왔으니 김서준을 대하는 태도가 좋을 리 없었다.
“그것도 좋죠. 그럼 교수님. 저랑 사이좋게 불침번 서실래요?”
“크흠. 난 너처럼 여유가 없어서 잠이나 자련다.”
심재덕이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이형모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는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몬스터다!”
그 말에 헌터들이 빠르게 일어나 전투대형을 갖췄다.
불침번이 있었지만 그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몬스터들의 접근이 은밀했다.
“부르크놈들…. 또 잔뜩 끌고 왔구만.”
이형모는 10여미터 거리를 두고 어둠 속에서 새빨간 눈을 번뜩이고 있는 부르크들을 노려봤다.
그때 이한수가 거리를 가늠하는 듯 하더니 어느 한 위치에 서서 눈을 번쩍하고 부릅떴다.
황금빛으로 변한 이한수의 눈.
그를 중심으로 반투명한 파장이 뻗어나오며 반경 15미터를 쫙 훑었다.
그는 신비를 발휘하고는 곧장 이형모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총 27마리. 모두 E급. 특수 몬스터는 없고. 어디보자…. 음? 한 녀석이 마석을 지녔는데?”
이한수는 같은 방법으로 앞선 세 번의 전투에서도 훌륭하게 정보를 추려 빠르게 알려주었다.
어떤 신비인지 궁금해 하던 김서준에게 신우진은 이한수의 신비가 ‘투시안’이라고 알려줬었다.
반경 15미터 범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위치와 마력 수준, 그리고 몬스터가 특수종인지 그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는 놀라운 신비였다.
이번에도 이한수의 신비는 정보를 훌륭하게 캐치해냈다.
“난 마석을 지닌 놈부터 잡는다. 한수 너는 내 뒤에서 놈이 보이면 나한테 알려주고. 나머진 야영지를 중심으로 원형 대형을 취해서 방어에 집중해.”
빠른 지시에 헌터들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형모는 자리를 뜨기 직전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이한 행동을 취했다.
“가자, 한수야.”
따악
이한수와 뛰쳐나가면서 갑자기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부딪친 것.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그냥 습관처럼 한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소리가 난 직후, 헌터들의 움직임이 묘하게 달라졌다.
중앙에 김서준과 심재덕이 있는 상황에서 여섯 명이 둥그렇게 원형을 이뤄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신우진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이 원형을 지나치게 크게 만들었다.
당연히 헌터와 헌터 사이의 간격이 넓어질 수밖에.
그리고 처음부터 간격을 크게 벌리지 않았던 신우진 쪽이 안쪽으로 훅 들어간 꼴이 되어 그쪽으로 몬스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우진조차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 부르크들이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무에에에에
모에에에힉
귀를 긁는 괴이한 소리를 질러대는 부르크들.
놈들은 헌터 한명 당 세 마리씩 달라붙었다.
하지만 신우진 쪽으로는 무려 7마리가 달려들었다.
신우진은 CB급의 헌터였지만 아무리 E급 몬스터라 해도 7마리가 한꺼번에 덤벼들자 금새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그 결과, 두 마리 부르크가 방어선을 뚫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놈들이 다가오자 김서준은 공포에 질린 듯 심재덕의 팔을 붙잡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손 좀 놔라, 이 녀석아! 너 때문에 나도 못움직이잖아!”
심재덕이 김서준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팔을 잡은 힘이 어찌나 좋은지 좀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는 사이 부르크 두 마리가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부르크는 벌벌 떨고 있는 김서준이 가장 약하다고 판단했는지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무서운 근육의 탄력을 이용해 껑충껑충 뛰며 날카로운 손톱으로 할퀴고 쭉 찢어진 입으로는 덥썩 물어버리려고 안달했다.
그때마다 김서준은 심재덕을 끌어당겼다.
“어엇!”
생각 밖의 강한 힘에 휘청한 심재덕이 손발을 크게 허우적 거렸고, 우연히도 막 달려들던 부르크가 심재덕의 발에 턱을 세차게 얻어맞았다.
케헤엑
부르크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찌었다. 그순간, 김서준이 심재덕의 옆구리 사이로 아론다이트를 쭉 뻗어냈다.
푹
곡도는 정확히 부르크의 미간을 꿰뚫었다.
곧장 두 번째 부르크가 높게 점프하여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김서준은 심재덕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 팔 좀 놓으라니까!”
심재덕이 소리쳤지만 소용 없었다.
그가 아무리 C급의 마력을 가졌다 한들, 태양신공을 일으키고 있는 김서준의 손아귀 힘은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부르크가 심재덕의 머리를 덥썩 잡아 물려는 순간이었다.
김서준이 심재덕을 마치 마네킹처럼 휘둘렀다.
부르크의 입이 채 닿기도 전에 심재덕의 머리가 부르크의 가슴을 그대로 받아버렸다.
꾸휘이익
부르크는 뒤로 튕겨져 날았다.
때마침 김서준이 심재덕과 한몸이 되어 힘차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데구르르 구른 김서준은 ‘어이쿠’ 소리를 내며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바닥에 찍어 더 이상 굴러가지 않게 힘을 줬다.
그때, 튕겨올랐던 부르크가 하필 아론다이트가 꼿꼿하게 세워진 위치로 곤두박질 쳤다.
푸욱
창처럼 세워진 아론다이트에 부르크의 몸통이 꿰뚫렸다.
“놔라, 좀 놔!”
심재덕은 거칠게 몸을 흔들며 김서준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어느새 죽어 나자빠진 두 마리 부르크를 보며 ‘어?’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한마리 또 빠졌다!”
저 앞에서 신우진이 긴급하게 소리쳤다.
이번엔 신우진이 막고 있던 부르크가 아니라 다른 헌터 쪽에서 방어가 뚫렸다. 마치 일부러 부르크를 흘린 듯한 황당한 상황.
“저 놈은 내가 막….”
심재덕이 그래도 교수라고 호기롭게 외치며 달려 나가려는데, 김서준이 아론다이트를 힘차게 휘둘렀다.
꼬치처럼 꿰여있던 부르크 사체가 날아갔고, 심재덕의 등을 떠밀어 바닥에 곤두박질 치게 했다.
그로인해 이제 막 바닥에 착지하려던 또 다른 부르크가 사체를 밟고 비틀했다.
그때 김서준이 고개를 숙인채 눈까지 꾹 감고 아론다이트를 세로로 그어냈다.
“으아아!”
촤악
칼은 부르크의 머리를 가르고 쭉 찢어진 입까지 잘라버렸다.
“해, 해냈다!”
김서준이 부르크를 벤 것에 과하게 흥분하며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상황은 종료됐다.
이들을 기습했던 부르크 27마리는 모조리 도륙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형모는 마석을 지닌 부르크를 해치우고 돌아왔는데, 김서준이 신이 나서 막 자신이 어떻게 부르크를 해치웠는지 떠드는 모습이 보이자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한 헌터가 옆으로 다가와 상황을 설명했다.
헌터들의 방어를 뚫고 부르크 세 마리가 김서준을 덮쳤는데, 심재덕이 눈부신 활약을 해서 두 마리를 죽였고, 마지막 한마리는 김서준의 눈먼 베기에 머리가 갈라졌다고.
이형모는 동생 이한수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거 참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다시 심재덕을 바라보니 그는 뭔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쪽 구석에서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
날이 밝을 때까지 또 다른 부르크들의 공격은 없었다.
레이드 팀은 여명이 들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보스가 있는 계곡 깊숙한 곳에 도착하기까지 세 번의 전투를 더 치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우연인지, 실수인지 모를 상황이 계속 벌어지며 부르크들이 헌터들의 방어를 뚫고 김서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김서준은 기가막힌 운빨로 어디하나 다치지 않은 채 부르크를 처치했다.
때로는 심재덕의 손에, 때로는 눈먼 김서준의 칼에.
그 모습을 지켜본 이형모는 결국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저 새끼, 우릴 가지고 놀고 있어.’
처음 한 두번이나 우연이지 그게 세 번, 네 번을 넘어가면 더 이상 우연일 수가 없었다.
헌터 아카데미 1학년생 김서준.
열 아홉살 짜리의 이 어린 청년은 지금 이형모와 그의 레이드 팀을 상대로 철저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이형모는 동생 이한수와도 김서준에 대한 이야기를 몰래 나누었고, 전보다 훨씬 큰 관심을 갖고 김서준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심재덕 만이 아직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어떻게 김서준이 조금도 다치지 않고 위기를 벗어나고 있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레이드 팀은 그렇게 보스의 레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좌우 폭이 5미터밖에 되지 않는 좁은 계곡.
그 끝에 악마성의 입구처럼 자리한 동굴 입구에서는 귀곡성 같은 바람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모두들 긴장해라. 이곳의 보스는 C급이지만 중대형에 속하는 놈이라 처리가 쉽지 않을 거다. 나랑 박재홍이 어그로를 끌면서 탱킹을 하는 동안 원거리 공격으로 놈의 힘을 빼고, 나머진 치고 빠지기로 계속 놈의 마력을 깎아내야 한다. 모두 이해했지?”
이형모의 말에 헌터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바로 들어간다!”
이형모를 선두로 레이드 팀이 하나 둘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가장 후미에 있던 김서준도 담담한 표정으로 뒤따라 가려는 그때, 신우진이 슬쩍 다가오며 조용히 한마디를 남겼다.
“너도 지금쯤은 눈치 챘겠지? 이유는 모르겠다만, 이형모 공대장의 목표엔 너도 포함되어 있어. 그러니 레이드가 시작되면 괜한 호기심으로 근처에 다가올 생각은 하지도 마라. 네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신우진은 김서준이 약하지 않다는 걸 알아봤지만, 보스 레이드는 부르크같은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과 질적으로 달랐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언급하면서까지 강하게 경고한 것.
그 말에 김서준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가요? 하지만 아버지를 위한 행동으로 뭐가 옳을지는 제 스스로 판단하고 싶네요.”
김서준의 똑부러지는 말에 신우진은 괜히 민망해져서 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