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보스의 레어는 엄청난 규모의 대공동이었다.
거대한 석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돔처럼 생긴 대공동 안에서 4미터를 훌쩍 넘는 중대형 몬스터 한마리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김새는 부르크와 흡사하다.
하지만 크기가 압도적으로 컸고, 어깨 위로는 두 개의 팔이 더 있어 총 4개의 팔을 지닌 괴물이었다.
게다가 눈은 세 개나 된다.
놈이 있는 자리 주변엔 번쩍거리는 황금도 보이고, 기이한 기운을 흘리는 아티팩트도 여기저기 잔뜩 흩어져 있었다.
명색이 보스라 그런지 전리품으로 온갖 것들을 모아 이곳에 보관하는 습성이라도 있는 모양.
이한수가 그런 보스를 응시하다가 눈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심장이 선명한 초록색인걸로 봐서 예상되는 최대 마력은 91정도. 마석은 당연히 있고. 그리고 저놈, 온몸이 파란색 마력으로 둘러싸였어.”
“마력이 파란색이면, 특수종 중에서도 스페셜급인가?”
이형도가 되묻자 이한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50%의 확률로 그게 나올 테고.”
“좋군. 바로 시작한다.”
김서준으로서는 놀랄수밖에 없는 대화였다.
‘투시안의 효과가 이정도였어? 그냥 눈으로 살펴보는 것만으로 다 파악하잖아?’
마력이 어느 정도고, 마석이 있는지, 그리고 특수종의 스페셜급이라는 것까지 죄다 구분하고 있었다.
‘그런데, 50%의 확률로 나온다는 건 뭘까?’
궁금했지만 물어본다고 알려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이형모를 비롯한 헌터들이 보스 쪽으로 다가서는 동안, 김서준은 그 자리에 그냥 머물렀다.
심재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김서준보다 더 뒤쪽으로 물러난 채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눈알을 굴리는 중이었다.
그런 심재덕을 스치듯 바라본 김서준은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신우진 헌터만 빼고 전부 한통속이야. 이형모의 신호에 맞춰 일부러 부르크를 내 쪽으로 계속 흘렸단 말이지. 하지만, 이상해. 심재덕이 사주한거면 서로 연계해서 날 더 궁지에 몰았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형모가 심재덕을 무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김서준은 이형모와 심재덕이 자신을 놓고 거래를 했다는 걸 진작에 파악했다.
그 거래로 얼마의 돈이 오고갔는지는 모르지만, 심재덕 뒤에 고태환이 있을 거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
다만, 억지로 여기까지 끌려온 심재덕의 행동으로 봐서는, 적어도 고태환이 자신을 죽이라고 지시하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날 건드린 놈들은 죄다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김서준은 잘 짜인 대형으로 대형 부르크를 상대하기 시작한 이형모의 레이드 팀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
B급 헌터 하나에 C급 헌터 둘이 있는 팀이어서일까?
대형 부르크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가벼운 부상자 두 명으로 보스 레이드가 끝나자 모두들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김서준은 보스 레이드에서 뭔가 자신을 노린 움직임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니 꽤나 의아했다.
-결계 구역 내의 보스가 쓰러졌습니다. 결계가 곧 닫힙니다. [00:59:56]
보스가 죽자마자 모두의 눈앞에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 메시지는 보스가 쓰러졌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1시간 내로 다시 균열을 통과해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였다.
그럼에도 헌터들은 꽤나 여유로웠다.
그 이유는 대공동의 한쪽 벽에 마법진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
이 마법진은 일종의 포탈이었고, 이 포탈을 지나면 단숨에 포지션 마커가 박혀있는 균열 입구로 순간이동이 가능했다.
때문에 헌터들은 균열까지 돌아갈 일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고, 이형모는 대형 부르크의 가슴을 갈라 초록빛 마석을 챙겼다.
그런데, 김서준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이형모가 심장에서 또 다른 마석 하나를 추가로 꺼내드는 모습.
매우 은밀하게 취한 행동이었지만, 김서준은 그걸 똑똑하게 목격했다.
‘검은색 마석? 마석 중에 검은색이 있었어?’
김서준이 알기로, 마석은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7가지 칼라가 전부다.
그럼 이형모가 추가로 꺼내든 검은색 마석은 뭐란 말인가?
깊은 의구심을 가지고 이형모를 주의깊게 살피고 있을 때였다.
유진오라는 이름을 가진 헌터가 국방색 가방에 아티팩트와 황금을 잔뜩 챙겨 이형모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보상이 쏠쏠하네요.”
“그렇군. 전리품도 한가득이고, 마석도 더 챙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헌터 유진오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이형모의 눈빛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김서준은 지금 뭔가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피해요!”
김서준이 달려가며 유진오를 향해 소리쳤다.
그때, 근처에 있던 이한수가 갑자기 권총을 꺼내더니 김서준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꽤 가까운 거리에서 쏘아진 탄환.
하지만, 탄환은 김서준이 귀신처럼 뽑아낸 아론다이트에 그대로 두쪽이 나고 말았다.
“이 새끼, 정말 실력을 숨기고 있었잖아!”
이한수는 이를 뿌드득 갈면서 김서준에게서 빠르게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계속 총을 발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이형모 쪽에서는 믿지 못할 상황이 일어났다.
‘위력증강’이라는 탱킹형 신비를 지닌 이형모가 엄청난 악력으로 유진오의 목을 콱 움켜쥐더니 오른손에 쥔 검은색 마석을 그의 이마에 푹 박아버렸다.
“끄아악!”
유진오는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마구 몸부림쳤다.
한발 늦게 상황을 파악한 헌터들은 크게 경악했다.
수년간 함께한 그들의 리더이자, 레이드 팀의 공대장인 이형모가 갑자기 동료를 기습하다니.
이형모는 아티팩트와 황금이 담긴 가방을 둘러매고는 이한수가 뛰어가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포탈 마법진이 있는 대공동의 서쪽 벽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가장 놀란 건 신우진이었다.
그는 이형모, 이한수가 뭔가 일을 벌이려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식으로 대놓고 동료를 죽이려 들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김서준이 이한수를 쫓고, 신우진과 나머지 헌터들이 이형모를 쫓으려는 그때였다.
“크아아아아악!”
검은 마석이 이마에 박힌 유진오가 커다란 괴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우드드득. 콰직.
그의 몸이 크게 부풀어 오르며 체구가 거의 두 배로 커졌다.
옷이 다 찢겨나가며 도마뱀의 피부가 돋아났고, 두 팔은 새의 날개로 변하며 활짝 펼쳐졌다.
얼굴은 앞뒤로 길게 튀어나왔으며, 입 대신 뾰족하고 새빨간 부리가 생겨났다. 그리고 모두의 눈앞으로 또 다시 메시지가 떠올랐다.
-결계 구역 내에 새로운 보스(곤도라)가 탄생합니다. 결계가 계속 유지됩니다.
“고, 곤도라?”
헌터들은 곤도라라는 이름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이런 형태의 몬스터가 균열에서 나온 적이 있었다.
인류가 붙여놓은 명칭은 곤도라.
C급 몬스터에 해당하지만, 비행 능력을 가졌고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놈이라 C급을 상회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헌터 유진오가 변한 곤도라는 평범한 곤도라가 아니었다.
머리 위에 뿔이 달린 놈으로 대형 부르크와 마찬가지인 특수종의 몬스터였다.
끼요오오오오오!
곤도라가 머리를 쳐들며 귀가 찢어질듯한 괴성을 질러댔다.
그리고 순식간에 날아오르더니 신우진과 헌터들에게 달려들었다.
퍼버버버벙
헌터들이 급히 맞대응을 시작했지만, 곤도라의 움직임은 놀랄만큼 빨랐다.
무기가 대충 스치는 정도로는 두꺼운 놈의 피부에 흠집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헌터들은 곤도라의 공격에 제대로 맞대응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튕겨지며 하나 둘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김서준은 모든 걸 무시하고 이한수를 향해 뛰었다.
자칫하면 놓칠 수 있다는 생각에 비뢰신보까지 사용하려는 찰나.
뀌오오옷!
눈앞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뾰족한 부리로 김서준의 머리를 와그작 씹으려 했다.
“꺼져!”
김서준은 아론다이트를 번개처럼 휘둘렀다.
파캉!
칼이 부리를 후려치자 곤도라의 머리가 한쪽으로 확 튕겨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힘을 이기지 못하고 3.5미터의 거구가 게걸음으로 쿵쿵대며 밀려났다.
김서준은 곤도라를 해치우는 것보다 이한수를 잡는게 더 급했기에 바로 비뢰신보를 발휘했다.
쾅
김서준이 서있던 땅이 움푹 파이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빠지직. 빠직.
김서준의 희뿌연 형체가 스쳐간 길목엔 10미터 간격으로 푸른 뇌전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김서준이 엄청난 속도로 뒤쫓았지만, 이형모와 이한수는 이미 포탈 마법진에 도착한 뒤였다.
그들은 펑펑 소리를 내며 무섭게 돌진하는 김서준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이한수가 묵직한 뭔가를 김서준이 날아드는 방향으로 툭 내던졌다.
“네 녀석의 마석은 훗날 다시 찾으러 오지.”
그 말을 남기고 두 형제는 마법진 속으로 몸을 던졌다.
쓔아아악
마법진이 환한 빛을 뿜어낸 순간, 두 형제의 모습은 씻은듯이 사라져버렸다.
그때, 김서준은 이한수가 던진 묵직한 물체가 무언지 알아봤다.
‘폭탄?’
그건 폭발까지 단 3초밖에 남지 않은 시한폭탄이었다.
김서준은 마법진을 코앞에 두고 짧게 고민했다.
이대로 폭탄을 무시하고 달려나가면 김서준 자신은 마법진을 통과해 균열로 순간이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되면 이 폭탄은 여기서 터지게 될 것이고 대공동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곳에 남은 헌터들이 몰살될 것이 뻔한 상황.
폭탄을 마법진으로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마력을 지닌 인간이 직접 들고 지나가지 않으면 통과가 불가능하다.
김서준은 뒤를 돌아봤다.
헌터들이 이곳까지 도착하려면 최소 10초 이상이 필요해 보인다.
게다가 자신의 바로 뒤쪽으로 곤도라가 괴성을 지르며 날아들고 있다.
혼자 살아남느냐, 아니면 이들 모두를 살리고 이곳에 함께 갇히느냐의 선택지.
예전이었다면 사람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을 김서준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젠 지켜야 할 것이 있었고, 누리고 싶은 행복이 있었다.
여기선 영웅으로서의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김서준의 마음은 아직 그렇게 까지 독하지 못했다.
“시발.”
김서준은 거칠게 욕을 내뱉고는 시한폭탄 바로 앞에서 비뢰신보를 거둬들였다.
츄와아아악
엄청난 속도에 의한 관성으로 바닥까지 파내며 미끄러진 김서준.
그는 폭탄을 향해 손을 뻗으며 신비를 일으켰다.
번쩍
김서준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든 순간, 김서준을 제외한 세상의 시간이 정지하듯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김서준은 혼자 살아남는 안전한 길을 포기하고, 이 폭탄과 곤도라를 함께 처리하는 위험한 길을 택했다.
때마침 타이머가 0을 가리키며 폭발을 일으켰다.
꽈아---------------앙!
눈부신 빛에 굉음이 뒤섞이며 뜨거운 열기가 김서준의 눈앞을 뒤덮었다.
하지만 김서준이 뻗어낸 손바닥으로 폭발의 파괴력이 모조리 빨려들었다.
포탈 마법진이 있는 벽쪽은 폭발에 고스란히 노출되었지만 그 반대쪽으로 뿜어진 파괴력은 김서준의 손으로 흡수된 것이다.
쑤아아아아아압
파괴력을 흡수한 왼손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역발산기개세가 발휘되는 2초의 시간이 그렇게 끝났을 때, 김서준을 쫓아 날아든 곤도라가 머리 위의 뿔을 진동시키며 강력한 파동 공력을 뿜어냈다.
하지만 김서준은 모든 걸 이미 계산에 넣고 있었다.
그대로 몸을 돌려 왼손을 곤도라 쪽으로 뻗어냈다. 그의 왼손 바닥엔 동그란 마법진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건 흡수한 힘을 더욱 강하게 응축시켜낸, 파괴력의 결정체.
“시바아아아아알-!”
김서준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받은 목소리로 응축된 힘을 힘껏 방출시켰다.
쮸아아앙!
손바닥에서 새빨간 빛의 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흡사 레이져포와 같은 빛은 곤도라가 뿜어낸 진동파를 삼키며 놈의 상체까지 단숨에 휘감았다.
그리고,
퍼억
빛의 충격파에 맞아 상체가 통째로 날아간 곤도라의 사체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