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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합은 비교적 빠르게 진행됐다.
아카데미 자체 토너먼트와는 다르게 승패가 날때까지 제한시간이 없는 시합이었지만, 두 개의 시합장으로 나뉘어져 동시 진행을 한 덕분이었다.
1시간을 조금 넘겨서야 26번째 시합까지 끝났고, 드디어 김서준의 차례였다.
김서준은 대기실의 대형 TV에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자 경기장 안으로 향했다.
약 50여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바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쪽문이 나타났다.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카데미 조교수들이 김서준의 학생증과 얼굴을 확인한 뒤, 몸까지 수색했다.
별다른 아티팩트는 없는지, 순간적으로 능력을 올려주는 물약이나 광역버프용 토템같은걸 지니진 않았는지 철저히 검사했다.
김서준은 오늘 집을 나설 때, 공간주머니를 방에 두고 왔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김서준 학생. 경기장에 들어서면 벽쪽에 세워진 무기들 중 원하는 걸 고르면 된다. 둘 중 한명이 항복하면 바로 경기는 종료되는 거고.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기술은 최대한 자제해라.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교수님들이 직접 뛰어들겠지만, 그렇게되면 반칙패로 탈락하게 될 거야. 전부 이해했지?”
“네.”
김서준이 짧게 대답하자 드디어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쪽문이 열렸다.
쪽문 바로 앞에는 온갖 무기들이 보기좋게 진열되어 있었는데, 죄다 시합용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만들지 못하게 특수처리된 무기들이었다.
김서준은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띈 장검 하나를 꺼내 쥐었다.
“우와아아아아!”
“제3 아카데미의 자랑 김서준이다!”
“김서준 파이팅!”
관람석에 앉아있던 A반 학생들이 무기를 고르는 김서준의 모습이 전광판에 보이자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29번째 시합으로 예정된 주광식까지 그 환호성에 합류했다.
“1분 컷에 성공하면 내가 형이라고 불러줄께!”
목청이 워낙 좋아서 이 커다란 헌터돔에서도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창피하게 뭔 응원이야?’
김서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경기장 중심으로 걸어갔다.
맞은 편에서도 한 학생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김서준의 상대인 조태수.
그도 주광식의 목소리를 들은 걸까?
표정이 완전 썪어 있었다.
오히려 주광식의 외침이 상대의 투지만 불태우고 만듯 했다.
“두 사람 모두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도록.”
심판으로 나선 30대 교수가 김서준과 조태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뒤로 한참을 물러섰다. 그리고, 손에 쥔 버튼을 꾹 눌렀다.
삐잉-
돔의 천장에 매달린 등이 붉은색에서 녹색으로 바뀌었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에 조태수가 먼저 움직였다.
“어디 1분 컷 해볼 테면 해봐라, 제3 따라지 녀석아.”
김서준을 비웃으며 한마디 한 조태수가 거리를 훌쩍 벌리더니 눈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두 손바닥을 가슴 앞에서 딱 마주쳤다.
순간, 그의 2미터 앞 공간에 가로, 세로 2미터 크기의 커다란 얼음벽 세 개가 쿵쿵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조태수의 신비가 얼음과 관련된 능력임을 알아본 김서준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최대한 평범하게…’
김서준은 괜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내공을 최소한으로 운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서준의 움직임은 무섭게 빨랐다.
김서준이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들이닥치자 조태수가 맞부딪친 손바닥을 비틀며 땅바닥을 노려봤다. 순간,
콰드드드득
조태수의 전면 바닥이 순식간에 얼음판으로 변해버렸다.
그것도 단순한 얼음이 아니라 슬라이드 효과가 가미된 상태라 그 위를 디디면 중심을 잡을 수가 없게된다.
그런데.
파박. 팍팍.
김서준은 발바닥에 무슨 스파이크라도 달렸는지 아무렇지 않게 빙판 위를 달렸다.
조태수로서는 김서준이 염동장막을 이용해 신발 아래에 정말 스파이크와 같은 막을 씌웠다는 걸 알리가 없었다.
“이 자식이!”
조태수가 이를 콱 깨물며 양 손바닥을 앞쪽으로 확 뻗어냈다. 그러자, 그의 앞을 막고 있던 얼음방패에서 엄청난 숫자의 얼음가시가 비처럼 뿜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서준은 매우 가벼운 동작으로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얼음가시를 모조리 갈라냈다.
베기 한번에 수십개의 얼음가시를 쪼개며 코앞까지 달려들자, 조태수는 마음이 급해져 두 팔을 뒤로 젖혔다가 있는 힘껏 앞으로 밀어냈다.
“흐아압!”
퍼어어어엉
폭음성과 함께 세 개의 얼음방패가 통째로 김서준을 향해 튕겨졌다.
김서준을 짜부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세 방향으로 밀어닥치는 커다란 얼음방패의 위용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허나, 그건 상대가 김서준이 아니었을 때나 적용되는 일이었다.
번쩍
김서준의 눈에서도 황금빛이 뿌려졌고, 그 순간 그의 주변 세상이 정지한 것처럼 느려졌다.
김서준은 좌우에서 날아드는 얼음방패를 향해 양손을 뻗어냈다.
콰우우우우우
조태수의 신비로 만들어진 얼음방패는 단숨에 김서준의 손으로 게눈감추듯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다.
강력한 신비의 힘을 흡수한 두 손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때, 김서준은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덥썩 움켜잡았다. 그리고 오른 손바닥을 활짝 펴며 힘차게 뻗어냈다.
콰앙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김서준의 앞에 5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얼음방패가 나타났고, 정면으로 날아오던 조태수의 마지막 얼음방패까지 그대로 박살내 버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마치 해일처럼 앞을 밀고나간 거대한 방패.
조태수는 그 방패를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아무 대처도 못한 채로 얻어맞아 버렸다.
빠아아악
피하지도, 막지도 못한 조태수.
그는 방패에 얼굴이 찌그러진 채로 훨훨 날았다가 바닥을 거칠게 나뒹굴었다.
조태수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심판이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양팔로 X자를 표시했다.
삐잉-
[제 27시합 종료]
[김서준 승]
시합 시작 후, 1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대형 전광판에 김서준의 승리를 알리는 글자가 뜨자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아! 저 학생 뭐야? 멋지잖아?”
“상대와 똑 같은 기술로 맞받아 쳤는데?”
“어디 학생이라고?”
“도대체 저 학생 신비가 뭐길래?”
김서준을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들 크게 놀라워 했지만, 그를 익히 아는 A반 학생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역쉬, 우리 반의 자랑이다!”
“김서준 최고다!”
“사!랑!해!요! 김!서!쭌!”
그들은 김서준의 승리가 마치 자신들의 승리인 것처럼 무척이나 기뻐했다.
***
김서준의 시합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차전은 모두 종료되었다.
2차전에 진출하게된 총 32명의 학생들.
그 안에는 특별 참가자 4인을 비롯해, 제1 아카데미의 김유라, 최동현은 물론, 주광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2차전 출전자들 명단을 쭉 훑어보던 김서준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32강에 오른 이름들을 보니, 그중 60%가 제1 아카데미 학생이었다.
즉, 제1 아카데미 학생 스무명 중, 단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32강에 진출했다는 것.
‘아카데미 간의 실력 차가 이렇게나 컸나?’
제2, 제3 아카데미 학생들을 통틀어 32강에 오른 건 단 9명 뿐.
김서준은 너무도 큰 차이가 왠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확률적으로 따져도 같은 제1 아카데미 학생끼리 1차전에서 맞붙을 가능성이 30%는 되는데, 19명이나 32강에 진출했다는 건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김서준은 1차전 대진표를 다시 봤고, 제1 아카데미 학생이 같은 아카데미 학생과 맞붙은 경우가 단 한 번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게 가능해?’
게다가 특별 참가자들과는 단 한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수상한데.’
김서준은 대기실 TV 속의 진행자가 32강 대진표를 추첨하는 걸 좀 더 자세히 살피기로 했다.
그래서 TV를 내버려 두고, 베란다로 나갔고 약 4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추첨중인 단상을 눈으로 직접 살폈다.
김서준은 지금 단상 주변에서 움직이고 있는 마력의 흐름을 눈으로 읽는 중이었다.
얼마 전, 능력치에 제어력이 생긴 이후로 헌터들이 뿜어내는 마력의 파동이 희미하게 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신비를 사용하지 않으면 잔잔한 물결처럼 마력이 흐르지만, 누군가 신비를 사용한다면 파도가 격랑치듯 심하게 출렁거린다.
그리고, 지금. 김서준의 눈에는 격한 출렁임이 빤히 보이고 있었다.
‘누군가 신비를 쓰고 있어!’
단상 주변의 누군가가 신비를 쓰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단상 주변의 그 누구에게서도 황금빛으로 물든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 인물들을 하나하나 체크하던 김서준은,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단상 왼쪽 구석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한 여자 경호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상 주변의 경호원은 총 여섯 명.
모두 C급 이상의 준수한 마력을 지닌 헌터들이었는데, 까만 썬글래스를 끼고 있어 눈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서준이 눈여겨 보는 여자 경호원의 마력 수치만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77/노멀]
[76/노멀]
[75/노멀]
…
점점 내려가는 수치.
공교롭게도 수치가 내려가는 시점은 진행자가 추첨하는 시점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홍팀에는 제1 아카데미 3학년 김유라 학생이고, 청팀에는 제3 아카데미 4학년 문창희 학생이군요. 제1 아카데미의 맹룡여제와 제3 아카데미의 스팀보이의 대결이라.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추첨에 김서준의 이름도 나왔다.
“오! 이번엔 오늘 1차전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시합을 보여주었던, 김서준 학생이로군요. 그를 상대하게 될 청팀은…. 제1 아카데미 4학년 권혁수 학생입니다! 권혁수 학생은 방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하죠? 이 경기도 꽤나 흥미로울 것 같군요. 하하하!”
역시나 김서준의 상대로는 제1 아카데미 학생이 뽑혔다.
그렇게 32강 대진표가 완성 되었을 때, 김서준은 이번에도 아주 교묘하게 대진표가 짜졌다는 걸 알게되었다.
19명이나 되는 제1 아카데미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3명만 제외하고는 모조리 다른 아카데미 학생과 대진표가 잡혔다.
‘저 경호원이 추첨을 조작하고 있던 거였나.’
그녀를 계속 눈여겨 보고 있다보니, 그녀가 누군가를 힐끔거리며 주시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낼 수 있었다.
그자는 단상 근처의 특별석에 앉아 있는 30대 사내였는데, 옷깃에는 제1 아카데미 교수임을 나타내는 휘장이 달려 있었다.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제1 아카데미 교수가 경호원을 매수하여 몰래 대진표를 유리하게 조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김서준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대진표 조작 때문에 32강 시합에서 김유라나 최동현을 시합에서 직접 마주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만날 때까지 무리해서 승승장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
‘16강에 올라서 지원금을 얻을 자격만 획득하면, 적당히 빠지자.’
김서준은 딱 16강 까지만 오르고 시합을 관둘 생각이었다.
괜히 그 이상으로 나섰다가 사람들의 눈에 너무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건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
김서준의 2차전은 14번째 순서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여유롭게 다른 학생들의 시합을 관전할 수 있었다.
그가 눈여겨 보는 시합은 김유라와 최동현이었다.
특별 참가자들의 시합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아무래도 옛 동료였던 김유라와 최동현보다는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신비는 아카데미에서도 꽤나 유명했다.
김유라의 신비, ‘권예’는 말 그대로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신기한 권법술이었다.
이 권예가 발휘되는 동안, 김유라의 신체는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되고, 공격에 담긴 파괴력도 강력해진다.
그 외에도 다른 효과가 있다고는 하는데, 거기까지는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모양.
이전 세계에서의 김유라가 소수백염공을 사용하는 엄청난 수준의 장법고수였다는 걸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최동현의 신비도 독특했다.
그의 신비는 마샬아트.
이 신비는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자유자재로 보일 수 있으며, 입식타격, 그라운드 기술, 복싱, 유도, 절권도 등의 모든 무술 분야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말 그대로 다재다능.
최동현과 마주한 상대는 뭐를 해보기도 전에 그의 다양하면서도 정통에 가까운 무술의 향연에 맥을 못추고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시합은 관중들의 놀라움 속에서 치러졌다.
특히, 김유라의 경우 제3 아카데미 학생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4학년 문창희와 붙었음에도 채 2분이 되지 않아 승리를 따내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스팀보이라고 불리는 문창희는, 뜨거운 열기를 이용해 강력한 기술을 펼쳐내고도 간단히 패하고 말았다.
이를 본 제2 아카데미 학생들은 야유와 조롱을 해댔다.
제3 아카데미 최강의 학생이 32강에서 탈락했다며 즐거워하기까지 했다.
교수들의 지적으로 바로 조용해지긴 했지만, 이미 내뱉어진 비웃음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당연히 제3 아카데미 학생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14번째 시합에 나선 김서준을 향해 더욱 큰 기대를 걸었다.
“김서준! 제1 아카데미고, 제2 아카데미고 상관없이 다 바닥에 쳐 박아 버려!”
“특별 참가자들도 만나면 죽탱이를 날려버리는 거다!”
“시바, 오늘 경기장에 끝까지 남아있는 학생이 어디 학생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자고!”
“믿는다, 김서준!”
부담감을 한 백배쯤 끌어올려주는 응원이었지만, 김서준에겐 아무 감흥도 없었다.
어차피 다음 시합에선 대충 싸우다 항복을 선언할 생각이었으니까.
김서준은 이번에도 시합용 장검을 쥐고 경기장에 나섰다.
상대인 권혁수는 ‘철금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방어력이 대단한 학생이었는데, 덩치도 좋아서 주광식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관중석에서 하는 말은 신경쓰지 말고, 각자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심판이 조언 한마디를 해 주고는 뒤로 물러나 시합 시작 버튼을 꾹 눌렀다.
삥-
녹색불이 켜지자 권혁수가 태권도의 겨루기 자세를 취하더니 피식 웃음을 그렸다.
“얼마든지 와라. 내가 이 자리에서 1미터 이상 밀려난다면 네가 이긴 것으로 하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
원래는 적당히 상대하다가 역발산기개세를 써서 간단히 끝내려고 했는데, 권혁수의 시건방진 태도를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대진표까지 조작하는 제1 아카데미 교수의 모습까지 권혁수 위로 겹쳐지며 김서준을 자극했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김서준도 권혁수를 향해 차갑게 마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