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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준은 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푹 꽂아버렸다.
그리고 제 주먹을 슥슥 쓰다듬다가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순간,
쾅
바닥이 터져나갈 듯한 충격파가 일더니 김서준이 어느새 권혁수의 코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화들짝 놀란 권혁수가 곧바로 눈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신비를 발휘했다.
[부동강]
권혁수의 신비, 부동강이었다.
자세를 갖추고 그냥 서있기만 해도 그의 몸 주변에 몇겹의 방어막이 생겨나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강력한 신비.
부동강이 발휘된 이상, 마력이 실린 창검은 물론이요, 총알이나 RPG의 포격 조차도 그에게 충격을 입히기 힘들었다.
그 부동강의 방어막 위로 김서준의 주먹이 작렬했다.
꽝!
김서준의 강한 일격에도 권혁수는 꼼짝을 안했다.
그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리며 김서준을 비웃었다.
“이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꽝!
두 번째 주먹이 날아들어 권혁수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그런데, 이번엔 권혁수가 표정을 찌푸렸다.
방금 전의 일격과 지금의 일격이 위력적으로 너무 크게 차이가 났기 때문.
“너, 지금 무슨 짓을…!”
꽈앙!
세 번째 주먹.
놀랍게도 이번 주먹엔 더욱 강력한 힘이 실렸고, 권혁수는 자기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의 표정은 훨씬 더 일그러졌다.
‘뭐가 이렇게 세?’
그로서는 예상 못한 상황이었다.
그가 알기로, 김서준의 신비는 상대의 공격을 받아낸 뒤, 더 강력한 힘으로 카운터 공격을 날리는 기술이다.
때문에 자신이 방어에 전념하면 김서준의 신비는 제대로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을 터.
부동강으로 버티다보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상황이 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뭔가 불길하다.
첫 번째 일격은 우습기만 했다. 미미한 흔들림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두 번째 주먹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약간의 충격이 느껴지는 것 같더니 세 번째에는 더 견디지 못하고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김서준의 네 번째 주먹이 날아들었다.
꽈아앙!
또 다시 가슴팍에 꽂히는 주먹.
버텨보려고 했지만 가슴이 너무 답답했고, 통증까지 훅 하고 밀어닥쳤다.
“크윽!”
권혁수는 신음을 흘리며 다시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가 자신의 패배로 삼은 거리까진 불과 30센티 밖에 안 남았다.
김서준은 극도의 불안함에 빠진 권혁수를 향해 다섯 번째 주먹을 거침없이 꽂아버렸다.
꽈아아앙!
더욱 커진 폭음성과 함께 권혁수가 두발이나 뒤로 밀려났다.
그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졌고, 입에선 거친 숨이 뿜어졌다.
이미 약속했던 1미터보다 훨씬 뒤로 밀려난 상태.
부동강을 펼친 이래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권혁수의 얼굴엔 당혹감이 가득했다.
김서준이 여섯 번째 주먹을 날리려고 하자, 권혁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자, 잠깐!”
하지만 김서준은 그 말을 씹어버렸다.
꽝!
주먹이 정확히 권혁수의 얼굴을 강타했고,
“컥!”
권혁수는 실 끊어진 연처럼 튕겨져 10여미터나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 김서준.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딱 3할 5푼이군.”
김서준은 방금 전의 일격에 내공의 3할 5푼의 힘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첫 일격에 일할, 그 다음부터는 5푼씩 내공을 높였다.
그래도 부동강이 꽤 강력하긴 한지, 3할까지는 밀려나는 정도로 버텨냈다.
하지만 거기서 다시 5푼의 내공을 올린 힘에는 부동강도 별 수 없었다.
권혁수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삐잉-
[32강 제 14시합 종료]
[김서준 승]
이번에도 상대를 기절로 끝내버린 김서준의 승리로 시합은 빠르게 마무리 되었다.
***
대기실로 돌아온 김서준은 크게 후회했다.
‘나도 모르게 또 나댔네.’
시합 전, 대진표를 조작하는 모습을 목격하지만 않았어도.
권혁수가 건방진 말로 자극하지만 않았어도 평범하게 승부가 났을 터였다.
하지만, 결국 모두가 보는 앞에서 눈에 크게 띄는 짓을 벌이고 말았다.
김서준의 박력 쩌는 시합은 지금도 계속 대형 화면으로 반복 재생 중이었다.
부동강을 펼쳐 막강한 방어막을 얻은 권혁수를 힘으로, 오직 주먹 하나 만으로 찍어누르는 광경은 많은 관중들을 김서준의 팬으로 만들었다.
“제3 아카데미에도 좀 하는 녀석이 있는데?”
“와, 씨! 권혁수의 부동강이 힘으로 박살나는 건 처음 봤어!”
“쟤, 뭐야? 제3 아카데미 슈퍼 루키라도 되는 건가?”
“저런 엄청난 녀석이 왜 제1 아카데미로 안가고 제3으로 빠졌다냐?”
사방에서 난리였다.
그 덕에 신이 난 건 김서준과 같은 반 학생들이었다.
“여윽시, 김서준이야!”
“아우, 짜릿해!”
“1년 묵은 변비가 한방에 내려가는 느낌이라고!”
“이게 바로 유쾌, 상쾌, 통쾌지!”
그런 학생들의 반응은 실시간으로 TV에 중계되고 있었다.
카메라맨이 열일을 하고 있는 건지, 관중석으로 앵글을 바짝 들이대고 있었다.
그걸 TV로 보게된 김서준은 대기실에서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젠장…. 젠장!”
김서준이 그렇게 자책하고 있을 때, 32강 시합이 모두 끝났고 어느새 16강 대진표까지 추첨으로 만들어졌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아까 그 여경호원이 대진표를 조작했다.
16강에 오른 학생들 중, 특별 참가자 넷을 제외하면 제1 아카데미 학생이 7명, 제2 아카데미 학생은 3명, 제3 아카데미 학생은 김서준과 주광식 단 둘 뿐이었다.
그런데 대진표가 참 교묘하게 짜졌다.
제1 아카데미 학생 7명 중 6명은 같은 아카데미끼리 붙어 누가 이기든 제1 아카데미 출신 3명이 8강에 오르게 됐다.
또한 특별 참가자 넷의 상대는 죄다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이었다.
그 대상에 김서준과 주광식도 끼어있었고.
이 대진표는 완벽하게 제1 아카데미 학생과 특별 참가자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16강에서 위협이 될만한 학생들을 죄다 탈락시키겠다는 뻔한 의도가 엿보였다.
하지만 김서준은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16강 상대를 보고는 헛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악운청?’
알고서 한 짓은 아니겠지만, 하필이면 김서준의 상대로 악운청이 정해졌다.
이미 16강에 올랐으니 지원금 2억은 따 놓은 당상.
그러니 이쯤에서 항복을 선언하고 빠지면 그나마 튀었던 행동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런데 3차전 상대가 악운청이라니.
‘나보고 저 자식을 상대로 항복을 선언하라고?’
그건 안될 말이었다.
악운청과의 시합은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다.
뿌드득
김서준이 이를 갈았다.
유호성의 가슴에 창을 꽂은 놈과 저 악운청은 다른 사람이지만, 그를 향한 이 감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추스릴 수가 없었다.
‘후…. 딱 저 자식만 때려눕히고 빠지자.’
김서준은 16강에서도 계획을 또 바꿔야 했다.
***
드디어 16강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김서준의 차례가 2번째로 배정됐다.
16강부터는 경기의 집중을 위해 경기장 한곳에서만 시합이 진행되기에 3만이 넘는 관중의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쏠리고 있었다.
첫 번째 시합으로 나선 최동현은 같은 아카데미 출신의 상대를 가볍게 제압했다.
김서준도 베란다에서 최동현의 시합을 관전했다.
[241/스페셜]
심안으로 본 최동현의 능력치였다.
마력만 봐도 17살의 최동현이 얼마나 대단한 천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신비도 엄청나고.’
최동현의 마샬아트는 김서준이 보기에도 상당히 변칙적이어서 직접 상대한다면 꽤나 골치아플 것 같았다.
이전 세계에서의 최동현은 ‘용호풍뢰도’라는 강직한 도법을 독문무공으로 사용했었는데, 여기선 반대로 변화무쌍한 마샬아트를 각성했다.
‘그래도 성격은 그대로인 것 같아 다행이네.’
최동현은 고집불통에 자기 의견을 절대 굽히지 않기로 유명했지만, 평소 성격은 반대로 굉장히 친절하며 부드러웠다.
잘생긴 외모에, 훌륭한 매너가 더해져 여자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지금도 고스란히 비쳐보였다.
가장 먼저 8강행을 확정지은 최동현이 경기장에서 나가고, 김서준의 차례가 돌아왔다.
경기장 입구에서 무기로 장검을 거머쥔 김서준은 저 앞에서 마주 다가서고 있는 악운청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하는 짓거리가 어째 거기서나 여기서나 비슷하네.’
고고한 학처럼 거만한 눈으로 사람을 깔아보는 듯한 표정.
앞선 두 번의 시합에서도 저 표정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손쉽게 상대를 이겨버렸다.
중국인이지만, 한국어를 제대로 배웠는지 상대를 비하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고.
그건 지금도 똑같았다.
“이봐, 내가 지금 살짝 지루하거든? 그러니까, 간 볼 생각은 하지 말고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라. 네 실력이 그럭저럭 쓸만하다면, 내 신비를 감상할 영광을 주도록 하지.”
김서준을 완전히 깔아뭉게는 말.
시선은 아예 김서준을 보고있지도 않았다.
수많은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며 쇼맨쉽을 보이는 악운청.
김서준은 그런 악운청을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둘 다 멋진 승부 기대하마.”
고의인지 심판이 김서준을 향해서만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한마디 남겼다.
그가 물러나고 시합시작을 알리는 녹색불이 켜졌을 때,
“그러고보니, 너희 나라 여자들이 한 인물 한다지? 대국의 무인이 소국에 행차한 기념으로 특별히 어여삐 여겨줘야겠어. 데리고 놀더라도 예뻐야 제맛이거든. 특히, 저 여학생은 아주 마음에 든단 말이야.”
악운청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김유라의 대기실이었다.
그녀는 베란다 난간에 턱을 걸치고 지금 시합엔 관심이 없는지 뻥 뚫린 헌터돔 중앙의 하늘을 올려다 보는 중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악운청의 눈에는 음흉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김서준이 이를 그냥 두고볼 리가 없었다.
“대국의 훌륭한 무인께서 어쩌자고 한국어를 그리 열심히 배우셨나? 고작 한국 여자 꼬셔보려고? 그런데, 어쩌지? 네 근처에만 가도 짱깨냄새가 풀풀 나서 한국 여자가 죄다 도망갈 거 같은데.”
김서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확한 중국어였다.
이전 세계에서 워낙 많은 중국 무인들을 적으로 돌렸던 탓에, 자연적으로 중국어를 습득하게된 김서준이었다.
당연히 악운청의 낯빛이 확 변했다.
“건방진 한국놈이 감히!”
“건방은 네 놈이 떨고 있는 거고.”
김서준의 맞대응에 악운청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손가락 하나를 펼쳐보이며 싸늘하게 웃는다.
“1분 안에 끝내주마. 네 놈한텐 신비를 보여줄 필요도 없을 거 같군.”
악운청이 시합용 창을 거머쥐며 자세를 취하자, 김서준은 들고 있던 검을 또 다시 바닥에 푹 꽂아버렸다.
그리고 손을 까딱거리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들어와.”
무기조차 버려두고 도발하는 행위에 악운청은 더 참지못하고 폭발했다.
“타핫!”
악운청은 마치 보법 같은 발걸음을 보이며 김서준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머리 위에선 창을 핑그르르 회전시켰고, 김서준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창대 끝을 잡아 강력한 일격을 내리꽂았다.
터엉
창이 떨어진 바닥이 폭발하듯 터졌다.
하지만 김서준은 그곳에 없었다.
빠르게 악운청의 옆으로 돌아 그의 손목을 움켜쥐려 했다.
“어딜!”
악운청은 김서준의 손을 창으로 쳐내며 화려한 창술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리
후웅. 후우웅.
휘돌리고, 내리치고, 찌르고, 좌우로 헤치는 일련의 동작은 눈이 부실만큼 화려하고 강력해 보였다.
하지만 김서준에게는 너무 조잡한 창술이었다.
악운청의 창술은 수박 겉핥기 식이었다.
화려함만을 추구해 알맹이가 하나도 없는 빈깡통과 같은 창술.
200이 훌쩍 넘는 마력을 지닌 덕에 한방 한방에 담긴 위력은 확실히 강력했지만, 조금만 무도를 알아도 쉽게 피할 수 있을만큼 단순하고, 뻔한 공격이었다.
‘한심하군.’
김서준은 이런 녀석이 그 유명한 베이징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학생이라는 사실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이런 놈을 상대로 시간을 길게 끌 이유도 없었다.
김서준은 이미 악운청이 펼쳐내는 창술의 움직임과 마력의 흐름을 모두 파악했고, 단숨에 빈틈을 파고들었다.
이제 막 창을 휘돌려 벼락 같은 빠르기로 내리치려던 악운청.
그는 김서준이 알아서 달려들자 옳다구나 싶어 한방에 날려버릴 생각으로 온힘을 다해 창을 휘둘렀다. 그런데,
휘잉
두 팔을 힘껏 휘둘렀는데 허공을 친 듯, 아무런 충격이 느껴지지 않는다.
손을 보니 창까지 사라졌다.
“…?”
무슨 상황인지를 몰라 당황해 있을 때, 등허리로 강한 충격이 날아들었다.
뻐억
“헉!”
김서준이 어느새 자신의 창을 빼앗아 들고 등을 후려친 것이다.
충격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등을 시작으로 옆구리, 어깨, 허벅지, 팔뚝 등으로 끊임없이 창이 날아들었다.
매타작.
김서준은 화려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짧고 간결한 움직임으로 악운청의 온몸을 창으로 두드려 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김서준이 창을 바닥에 푹 꽂아버리고는 훌쩍 물러섰다.
마치 다시 창을 잡고 덤벼보라는 듯한 행동.
악운청은 이를 악물고 다시 창을 잡아쥐었다.
김서준은 그런 악운청을 가만히 응시했다.
‘뭔가 숨겨놓은 한 수가 있긴 있나본데?’
그렇게 두드려 맞는 동안에도 악운청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마치 뭔가 때를 기다리는 듯, 눈빛을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었던 것.
그래서 악운청이 뭘 노리는지 직접 보고자 기회를 준 것이다.
과연 김서준의 예상대로였다.
악운청은 창을 쥐자마자 눈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하. 고작 신비를 쓰는 거였어?’
이런 상황에서 악운청이 신비를 써봤자, 그건 제 발목을 잡는 꼴이었다.
실망한 표정을 짓는 김서준을 향해 악운청이 창을 머리 위에서 두 번 휘돌리고는 하얗게 빛나는 창을 힘껏 내리쳤다.
창두에서 푸른 빛이 폭발하듯 뿜어지더니 커다란 청룡이 입을 쩍 벌리며 튀어나갔다.
크허어어엉
청룡은 커다란 몸통을 미끄러뜨리며 순식간에 김서준을 집어삼키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