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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준은 이 새로운 세계에서 정신을 차린 이후,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
지금까진 늘 가족과 동료들을 걱정하면서, 자신을 단련하는 것만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아침 9시까지 늦잠을 잤고, 일어난 후에도 침대를 내려가지 않았다.
머리에 생각을 비운 채 침대 위에서 그저 뒹굴거리기만 했다.
수련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세상에 이보다 게으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빈둥거리며 하루를 풀로 낭비했다.
졸리면 자고, 자다가 깨면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밤 12시가 되었을 때, 그제서야 게으름을 털고 일어나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어우. 아무것도 안 하는게 이렇게 힘든 거였나?’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련에 매진하는 것보다도 더욱 힘든 하루였다.
김서준이 이렇게 하루를 보낸 건, 복잡한 생각들을 깨끗하게 덜어내고 그동안 지쳐있을 몸에도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째 평소보다 몸이 더 찌뿌둥했다.
‘역시나 난 쉬는게 체질상 안 맞아.’
이전 세계에서 20년이 넘도록 몸을 혹독하게 굴려왔던 김서준에게 게으름과 나태함은 오히려 적응하기 힘든 사항이었다.
김서준은 12시를 기점으로 다시 본래의 생활로 되돌아 왔고, 새벽 늦은 시간 까지 태양신공으로 운기조식을 취했다.
육체에 긴 휴식을 주어서일까?
운기조식으로 내공을 움직이자 그 어느 때보다도 시원한 감각이 온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 감각에 모든 것을 맡긴 김서준은 차오르는 고양감을 마음 껏 느끼며 밤을 지새웠다.
***
다음날 아침.
단 두 시간 밖에 잠들지 못했음에도 상쾌함이 가득했던 김서준은 부모님께 아카데미 수련 프로그램에 다녀오겠다고 인사한 뒤, 가벼운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부모님은 김서준이 예거 후보생이 되어 특수 교육에 참가한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듯 보였다.
김서준은 안심한 채 지하철을 타고 목표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오전 9시 42분.
가평 터미널에 도착하자 때맞춰 특수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전달사항]
1)10번 생도 김서준의 최종 목적지는 ‘석룡산 계곡 유원지’입니다.
2)목적지까지는 자가운전을 제외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동이 가능합니다.
3)정해진 시간(12시 10분) 내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도착하세요.
4)최소한의 비용만을 사용하세요.
내용을 대충 살펴본 김서준은 터미널 안에서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다.
큼직하게 붙어있는 시간표에는 목적지인 석룡산 계곡 유원지까지만 가는 전용 버스노선이 존재했다.
‘꼭 이 버스를 타고 가라는 거 같잖아?’
근처에 수많은 유원지가 존재하는데, 오직 석룡산 계곡 유원지에만 직항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는 건, 뭔가 상당히 부자연 스러웠다.
‘이미 감시는 시작된 거겠지?’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 거려봤지만 딱히 수상한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김서준은 안다.
저 앞에 앉아 평범하게 신문을 보고 있는 아저씨도, 요금소에서 표를 파는 20대 아가씨도, 초라한 구멍가게에 앉아 달고나를 만들고 있는 뽀글머리 아줌마도 얼마든지 예거 소속의 요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김서준은 옷가지와 몇가지 개인물품이 든 배낭을 고쳐매고는 석룡산 계곡 유원지로 향하는 버스표를 구입했다.
버스 출발시간은 정확히 10시 5분.
잠시 대기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김서준은 10시 5분 전에 버스가 출발 준비 중이라는 디지털 안내문구를 확인하고 바로 탑승구로 향했다.
탑승구를 나서자 옛 향수를 물씬 풍기는 구형 버스 한대가 우두커니 멈춰서 있는게 보였다.
김서준은 버스 앞문에 서있는 기사에게 표를 내밀고 올라탔다.
좌석표대로 42번 창가자리를 찾아간 뒤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버스는 정확히 10시 5분에 출발했다.
버스에 탄 승객은 김서준을 포함해 총 14명.
김서준은 손으로 눈을 비비는 척 하며 심안을 사용해 봤다.
김서준을 중심으로 마력 파동이 퍼져나가자 버스에 탄 사람들의 정보가 한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 역시나 그럴 줄 알았어.’
운전기사까지 14명 모두가 마력을 지닌 헌터였다.
마력 수치는 11에서 19 사이.
버스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E급 이상의 헌터였으니 모두 예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요원들인게 분명했다.
이들 중 가장 마력이 높은 인물은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푸짐한 체격의 운전기사였다.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어 최소 10여년 기사일을 해온 사람같았다.
“승객 여러분께 알립니다. 이 버스는 석룡산 계곡 유원지로 향하는 직항이며, 휴식 없이 논스톱으로 약 40분 간 이동할 예정입니다. 용변이 급하신 분은 그냥 싸서 말리시길. 즐거운 여행되십시오.”
마이크를 이용해 입담 좋게 안내방송을 끝마친 기사는 신나는 뽕짝 음악을 틀어놓고 덩실 덩실 어깨춤까지 추며 운전했다.
손님들은 남아도는 좌석에 뿔뿔이 흩어진 채 창문 밖을 응시하거나 롤러블폰을 꺼내 영화를 감상하는 등, 각자 일에 열중했다.
김서준은 이들이 예거의 요원임을 알고 있기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 20여분이 흘렀을 때였다.
끼이이익-
버스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승객들 대부분이 앞으로 몸이 훅 쏠렸다.
자동 안전벨트가 있어서 튕겨나가거나 다친 사람은 없지만 다들 놀랐는지 웅성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서준은 별 반응 없이 의자에 앉은 채 창문 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쾅쾅!
누군가가 버스 출입문을 거칠게 두드린다.
“당장 문 열어!”
버스 앞쪽의 자동 출입문 앞에는 네 명의 사내들이 여러 무기들로 무장한 채 모여 있었다.
그리고 버스 앞 5미터 앞에는 대형 SUV 차량이 도로를 가로로 막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균열이라도 생겼답니까? 왜 도로를 막은 거요?”
운전기사는 자기 옆 쪽 창문을 아주 살짝만 열고 모두들 들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SUV 측면에 기대고 서서 담배를 빨아대고 있던 사내 하나가 온갖 폼을 잡으며 버스 운전석 쪽으로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사내가 기사에게 꺼내 보인 건 중앙경찰청의 헌터 형사들에게만 주어지는 ‘공인헌터증’이었다.
폰 화면엔 SWAT HUNTER라는 글자와 함께 사내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이를 본 운전기사가 흠칫했다.
“아니, 저…. 갑자기 스왓 헌터분들께서 여긴 무슨 일로…?”
“첩보가 있었습니다. 석룡산 계곡 유원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 극악한 빌런이 탑승했다는 첩보 말입니다.”
“네? 그럴리가요? 여기 이분들 다 평범한 승객들인데요? 탑승 전에 이미 신분확인을 모두 끝냈습니다.”
“알겠으니까, 일단 출입문부터 여시죠. 저희 대원들이 간단히 신분증 검사만 하겠습니다.”
“허…. 거 참, 이게 무슨 일인지.”
운전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동문을 열었다.
지이잉-
문이 열리자마자 두 명의 사내가 후다닥 뛰어 올라왔고, 긴장한 모습으로 좌석에 앉아 있는 손님들 얼굴을 하나 하나 쳐다보며 손에든 폰사진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버스의 가장 뒤쪽에 앉아있던 김서준.
그는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예거에서 연기는 안 가르치나? 다들 실력에 비해 연기력이 너무 떨어지는데?’
김서준이 보기에 이들이 지금 하는 행동이며 말은 모두 짜여진 각본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냥 보면 잘 모르겠지만, 김서준의 눈에는 너무도 어설퍼 보였다.
어쨌든, 이들이 이런 어설퍼 보이는 연기를 하면서까지 버스를 멈춰 세운 이유는 묻지 않아도 뻔히 보였다.
-정해진 시간(12시 10분) 내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도착하세요.
최경문 형사가 준 특수폰에 떴던 전달사항 중 하나.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감점이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굳이 이들의 장단에 맞춰줄 필요가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라는 문구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으니 김서준도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것이다.
김서준은 미끄러지듯 몸을 의자 아래쪽으로 낮췄다.
그리고 공간주머니에서 클로킹 마스크를 꺼냈다.
‘이들하고 시간 낭비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마스크를 얼굴에 쓰자 그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 어디에도 김서준이 그 자리에 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김서준은 클로킹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뒤,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누구도 김서준의 움직임을 알 수 없도록.
예상대로 버스에 올라탄 사내들은 누구도 김서준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반면, 김서준은 심안을 이용해 버스에 올라탄 스왓 헌터들 뿐만이 아니라 밖에 있는 헌터들의 마력 정보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었다.
[114/엘리트]
[108/노멀]
[126/노멀]
[115/엘리트]
[133/노멀]
스왓 헌터들 중 마력이 100이하인 헌터는 단 한명도 없다.
헌터 등급으로 최소 B급 이상.
과연 대한민국 최강의 특수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력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버스에 타고 있던 E급 헌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들.
‘다행히 심장에 마석을 가진 사람은 없구나.’
김서준도 사람인지라, 마석을 품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슬그머니 비어있는 다른 자리로 이동한 김서준.
그제서야 뒤쪽으로 시선을 던진 사내 하나가 눈쌀을 팍 찌푸렸다.
“이봐, 저 쪽에 원래 한명 더 있지 않았었나?”
조금 큰 목소리로 떠들었기에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젊은 학생 하나가 가장 뒷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텅빈 자리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뭐야? 한 명 어디갔어?”
“분명 있었지? 내가 착각한 거 아니지?”
스왓 헌터 두 명이 서로를 바라보며 황당해 했다.
그때, 처음 운전기사 옆 쪽 창문에서 자신을 소개했던 사내가 버스 옆으로 쭉 이동하며 창문을 두드렸다.
“니들 거기서 뭐해? 신분증 검사는 다 끝냈나?”
사내의 말에 버스 안에 올라타 있던 헌터 형사가 창문 하나를 열었다.
“팀장님. 뭔가 이상합니다. 분명 버스 안에 젊은 녀석이 타고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뭐?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벌건 대낮이고 우리 모두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떻게 기척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거지? 그놈이 빌런일 수 있으니 조심해서 다시 잘 찾아봐!”
그래도 팀장이라고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의 지시에 두 사내는 버스 안을 철저하게 살폈다.
빈 자리라고 해도 손이나 발로 허공을 휘저으며 혹시라도 신비를 써서 모습을 숨긴 것인지 계속해서 확인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신비를 써서 모습을 숨겼다 해도 존재 자체를 지울 수는 없으니 손에 걸리는 게 있어야 했다.
잠시 후 버스 안으로 다른 헌터 형사들도 뛰어 올라갔고, 버스 손님들까지 한쪽으로 몰아 놓고 모든 공간을 스캔하듯 훑었다.
그럼에도 김서준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김서준은 버스 앞쪽의 계기판 옆에 걸터앉아 있었으니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
시간이 흐르자 이젠 손님들까지 김서준을 찾기 시작했다.
이젠 더 숨길 생각도 없는 것인지, 서로 역할을 나누어 모든 의자와 빈 공간을 빈틈없이 조사했다.
그러길 10여분.
결국 김서준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하아. 이거야 원. 이 많은 헌터들이 있는 자리에서 감쪽같이 자취를 감춰버리다니. 녀석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본 사람이 단 하나도 없는 거냐?”
씁쓸하게 웃으며 한소리 하는 인물은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40대 사내였다.
그는 도로 옆으로 흐르는 작은 시냇가에서 낚시를 하던 사내였는데, 몸매가 퉁퉁하고, 인상도 옆집 아저씨 같아서 전혀 헌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김서준이 보고 있는 마력 정보에는 131이라는 높은 마력수치가 떠올라 있었다.
‘어리숙해 보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네.’
김서준은 순진해 보이는 낚시꾼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다 문뜩 떠오른 생각에 시간을 확인해 봤다.
[11:24]
12시 10분이 되기까지 거의 50분 가까이 남아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여유롭게 클로킹 마스크를 쓸 수 있겠네.’
클로킹 마스크는 분당 2의 마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김서준의 마력으로는 60분 이상 사용이 가능했다.
여기서 석룡산 계곡 유원지에 도착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30분.
곧 출발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만 포기하고 빨리 좀 가자고.’
김서준은 계기판 옆에 앉아서 돌아가는 상황을 조용히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