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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각자 상대를 찾아 1대 1로 마주섰다.
그런 그들 옆에는 교관들이 한명씩 붙어 선 상태.
그때, 박문호 교관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깜빡하고 말을 안했군. 이번 대련에도 마력은 쓸 수 없다. 대신 원하는 무기가 있으면 담당 교관에게 말하도록. 모두들 건투를 빈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박문호가 손목에 차고 있던 기프트의 버튼을 꾹 눌렀다.
피이이이이잉-
사방으로 뻗어나간 마력의 파장은 반경 10미터 범위를 순식간에 훑고 지나갔다.
생도들은 그 파장에 닿자마자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며 어깨가 축 쳐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교관들은 멀쩡했다.
똑같이 MPSP에 노출되었는데, 그들에게선 마력을 상실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다른 생도들은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김서준은 교관들에게서 뭔가를 발견했다.
MPSP의 마력 파장이 교관들을 스쳐지나갈 때, 그들의 몸 주변으로 투명한 막이 형성되어 파장을 튕겨냈던 것.
이는 MPSP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김서준이었기에 발견할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차이였다.
‘역시 내 생각대로구나. MPSP가 있는데, 이걸 막는 기능이 없을 리가 없지.’
김서준은 안티 MPSP에 대한 것도 꼭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리나를 향해 한발 다가섰다.
그러자 그들의 담당 교관이 한마디 했다.
“무기부터 고르도록.”
“네? 아…. 그래야죠.”
이리나는 이제야 마력 상실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났다.
“전 레이피어로 할게요.”
이리나는 여성에게 가장 어울린다는 검, 레이피어를 무기로 택했다.
그러자 교관이 은색과 회색이 뒤섞인 반손가락 장갑을 낀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가슴 앞의 빈 공간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손바닥만한 마법진이 새겨졌다.
교관은 마법진 안으로 손을 쑥 집어 넣더니 곧바로 노멀한 형태의 레이피어 하나를 끄집어 냈다.
“받아라. 김서준 생도는 어떤 무기를 바라나?”
마법으로 아공간을 열어 물건을 꺼내는 모습에 김서준은 살짝 놀랐지만 그 또한 특별한 장치에 의한 기능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다른 교관들도 모두 똑 같은 아공간 능력을 써서 생도들이 원하는 무기를 꺼내주는 모습에서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전 따로 무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김서준은 무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잘난척을 하려고 괜한 자만심을 부리는게 아니다.
어제 새벽, 부동심의 수련을 마치고 추가로 수련을 시작한 ‘팔극철산고’라는 무공을 시험해 보려면 무기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팔극철산고.
이건 이전 세계에서 친형처럼 지냈던 동료, 박대만의 독문무공이었다.
신체의 모든 부위를 쇠처럼 만들어 무기처럼 사용해 상대를 타격하는 전신타격술, 그것이 바로 팔극철산고였다.
부동심이 한없이 정적인 마음의 공부라면, 팔극철산고는 지극히 동적인 신체의 무기화였다.
이 두 무공은 극과 극이면서도 함께 어우러지면 오히려 극대화된 효과를 보인다.
그래서 부동심을 익히며 팔극철산고를 떠올렸고, 그 또한 함께 수련을 시작했던 것.
김서준은 궁금했다.
과연 날카롭고 가벼운 무기인 레이피어를 든 이리나를 상대로 팔극철산고가 어디까지 통할 수 있을지가.
“뭐? 맨손으로 레이피어를 상대하겠다고?”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마력을 쓸 수 있으면 모를까, 마력이 제한된 상황에서 무기를 든 상대와 맨손으로 싸우겠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교관은 다시 한번 무기를 고를 것을 지시했다.
“예거의 훈련은 장난이 아니다. 이리나 생도에게 준 무기는 연습용이 아니라 실전용이란 말이다! 그러니 무기를 선택해라.”
“저도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확고한 어조.
교관은 살짝 난감해졌다.
본인이 거부하는데 강제로 아무 무기나 쥐어줄 수도 없는 일.
교관의 시선이 한쪽에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박문호를 향했다.
박문호도 김서준이 무기가 필요없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그는 혼잣말로 건방진 놈이라고 뇌까리며 한쪽 입술을 말아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 원하는데로 해주라는 뜻을 비췄다.
교관은 박문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뒤로 물러섰다.
“위험한 순간엔 내가 끼어들겠다. 그러니 아무 걱정말고 전력을 다해도 된다. 시작!”
교관은 김서준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이리나의 검에 상처를 입게 될 거라 생각했다.
어제의 테스트에선 3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냈지만, 그건 체력적으로 어느 정도 단련되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대련이기 때문에 힘보다 기술이, 그리고 날렵한 몸놀림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교관이 그런 생각을 하며 대련 시작을 알리자 이리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김서준을 노려봤다.
이리나는 김서준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괜히 화가 났다.
이리나는 어려서부터 서양 검술을 익혀왔기에 레이피어를 다루는 실력이 굉장히 훌륭했다.
마력이 없다고 해도 이 검술만으로 D급 이하의 헌터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 자신을 맨손으로 상대하겠다니.
이리나는 김서준의 건방진 태도에 일벌백계를 내려주기로 마음 먹었다.
“타앗!”
이리나가 빠르게 접근하며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위험한 순간엔 교관이 끼어든다고 했으니 부상 걱정 없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
새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속담처럼 눈부시게 빠른 공방이 가능한 이리나의 검술.
아무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김서준이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이를 지켜보는 교관도 언제든 끼어들 준비를 하며 바짝 긴장해 있는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김서준의 가슴팍을 깊숙히 찔러가는 이리나.
김서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오히려 그녀의 검쪽으로 달려들었다.
이대로는 얼굴이 검에 관통될 위험천만한 상황.
순간, 김서준이 잔상을 새기며 미끄러졌다.
마치 짜놓은 각본처럼 자연스럽게 검을 어깨 위로 흘려보낸 김서준은 이리나의 정면으로 바짝 접근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이리나의 팔과 어깨를 빠르게 낚아채며 확 잡아 끌었다.
이에 이리나 또한 당황하지 않고 검을 휘돌려 김서준을 베어내려 했다. 하지만,
츄악
이리나는 자신의 몸이 한순간 크게 요동치는 걸 느꼈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찰나적으로 시각과 공간감각, 그리고 평형감각 모두를 잃고 말았다.
자신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누워있는지 서있는지 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순간, 이리나는 온몸에 강렬한 충격을 느껴야 했다.
퍼엉
오른쪽 몸통으로 전해지는 섬뜩한 고통.
그와 함께 이리나는 5미터나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본 박문호와 교관이 모두 입을 떡 벌렸다.
그들로서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김서준이 이리나의 검을 어깨 위로 흘리며 바람처럼 접근하더니 팔과 어깨를 잡는 순간, 두 사람의 자리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는 것만 알아봤을 뿐.
그 즉시 강렬한 타격음이 터져나오며 이리나가 튕겨졌다.
놀랍게도 김서준은 그 짧은 순간에 이리나의 뒤로 돌아가 있었고 등과 어깨로 이리나를 강타해 버린 것이다.
김서준은 찰나의 순간에 무려 세 번의 변화를 보였다.
팔과 어깨를 잡아 자리를 바꾸고, 순식간에 뒤로 돌아가, 등으로 타격하는 눈부신 기술.
그들로서는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기술이었기에 대체 어떻게 이런게 가능할 수 있는지 이해가 불가능했다.
그건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이리나도 마찬가지.
검을 지르고, 그 틈을 무섭게 파고든 김서준을 보며 손목을 비틀어 베려고 했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 직후, 자신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으니까.
‘대체 뭐지?’
다행히 약간의 타박상 외에는 부상이 없었던 이리나.
하지만 이미 승부는 끝난 상태였다.
이리나는 흙먼지를 뒤집어 쓴 상태로 일어나며 김서준을 바라봤다.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신을 날려버린 김서준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자존심에 상처가 났다.
하지만 김서준에 대한 분노 대신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컸다.
‘내 실력이 고작 이 정도였나?’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어머니의 나라 대한민국을 찾아왔는데, 동갑내기 생도에게 말도 안될 정도로 무참히 패배했다.
예거라는 조직이 제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 능력자들의 비밀 집단이라고는 해도 자신을 이렇게나 창피하게 만들 정도의 강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더군다나 상대는 예거 요원도, 교관도 아닌 같은 생도에 불과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자만했구나.’
이리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너무 관대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한편, 김서준은 지금 이 상황이 꽤나 못마땅했다.
방금 그가 펼친 무공은 팔극철산고의 ‘반위’와 ‘철산고’ 초식이었다.
반위(反位).
말 그대로 자신과 상대의 위치를 순식간에 바꿔버리는 기술로, 이 기술에 당하는 상대는 1초 정도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신비 능력으로 치자면 일종의 스턴을 걸어 1초간 기절 상태에 빠뜨리는 건데, 이는 강력한 초식을 펼쳐내기 위한 사전 작업일 뿐이었다.
김서준은 반위에 당한 이리나에게 철산고(鉄山靠)를 펼쳐냈다.
상대의 뒤로 돌아가 등과 어깨로 강력한 타격을 가하는 초식인 철산고.
반위와 철산고는 하나의 연계기였다.
반위를 써서 상대의 뒤로 돌아가게 되면 본인도 등을 돌린 상태가 되기 때문에 철산고로 타격하기에 딱 알맞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솔직히 기술 자체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먹혔다.
문제는 팔극철산고의 위력을 본인이 제대로 제어해 내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김서준]
-마력: 139 / 내공: 137 / 제어: 121
-신비: 역발산기개세(22%) / 태양신공(25%) / 염동장막(7%) / 수라극섬(5%) / 심안(6%)
김서준은 눈살을 찌푸린채 자신의 정보를 살폈다.
분명 ‘제어’라는 항목이 있고, 수치는 121이나 된다.
그런데도 방금 그가 펼친 철산고의 위력이 본인의 생각보다 무려 두 배나 강력했다.
그저 이리나로 하여금 균형을 잃게 만들어 2미터 정도 튕겨내 쓰러지게 만들 생각이었던 김서준.
하지만 실제로는 5미터나 튕겨나갔다.
‘지금의 제어력 수준으로는 팔극철산고를 제대로 컨트롤 하기 힘들다는 건가?’
그 말은 즉, 팔극철산고의 무공 수준이 생각 이상으로 높다는 의미였다.
‘앞으로 팔극철산고는 조심해서 사용해야 겠구나.’
김서준은 이 팔극철산고를 자칫 잘못사용했다가 불필요한 문젯거리가 생길까봐 걱정이었다.
반위와 철산고는 팔극철산고의 기본 초식이다.
그 외에도 여섯 가지 초식이 더 있고, 최종오의까지 있는만큼 팔극철산고의 사용에는 더욱 큰 주의가 필요해 보였다.
“흐음…. 일단, 너희 둘은 저쪽에 가서 쉬고 있도록.”
담당 교관이 김서준과 이리나를 한쪽으로 물렸다.
두 사람의 대련이 너무 빨리 끝나버린 탓에 다른 생도들의 대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잠시 후, 다섯 개 조의 대련이 모두 끝났다.
양휘와 최철민의 대결은 양휘의 승리였다.
양휘는 보기와는 다르게 실전무술의 대가였는데, 강력한 근접전투기술을 지닌 최철민과 용호쌍박의 대련을 보여줬다.
두 사람 다 짧은 단검을 무기로 들고 싸웠는데, MPSP에 마력이 잠기는 5분이 거의 끝날 때가 되어서야 양휘가 최철민의 팔을 뒤로 꺾으면서 승리를 차지했다.
조태석과 안지운의 대결은 안지운의 압승이었다.
조태석은 커넥트라는 신비에 너무 의지하고 있었던 탓에 근접전투에는 아무 재능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배틀모드라는 전투관련 신비로 다져진 안지운의 무기술을 제대로 막아낼 수조차 없었다.
민소라와 임희주는 완전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18세의 고등학생 임희주가 승리했던 것.
민소라는 유체화라는 신비를 가진 능력자였고, 주로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원거리 공격을 가하는 스타일이라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투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임희주는 전투기술은 없지만 악착 같이 달려드는 뚝심을 가지고 있어 민소라를 주구장창 괴롭혔다.
그러다 결국 민소라가 임희주의 검에 어깨를 베이면서 간단히 승부가 났다.
아주 살짝 베인 것 뿐인데도 민소라는 곧바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 버린 것.
마지막은 박해성과 신태양이었다.
이 둘의 대결 역시 무척이나 싱겁게 끝나버렸다.
신태양을 하위 그룹으로 빼야 한자며 당당히 나섰던 박해성.
하지만 그의 전투기술은 마력이 없는 상태에선 너무도 보잘 것이 없었다.
그에 비해 신태양의 전투기술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그가 익힌 건 절권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흔해빠진 절권도가 아니라 고대 절권도로서 뿌리가 깊고 긴 유서를 지니고 있었다.
김서준은 신태양의 절권도를 정확하게 알아봤다.
고대 절권도는 김서준도 직접 익혀보진 않았지만, 그가 익힌 팔극철산고와 더불어 초근접 전투무예의 양대 산맥으로 불려졌기에 그 파괴력이나 기술에 대해서는 꽤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고대 절권도는 천마군장 천강우의 휘하에 있는 8대신장 중 한명의 성명절기였다.
‘껍데기만 익혔군.’
김서준이 본 신태양의 절권도는 진짜가 아니었다.
겉보기만 번드르 할 뿐, 실속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박해성은 수박 겉핥기 식의 절권도에 멀리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박해성이 선택한 무기는 창이었는데, 그건 그저 멋부리기 용이었는지 신태양과의 전투에서는 평범한 몽둥이의 역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신태양이 선택한 무기는 너클.
만약 신태양이 손에 착용한 너클이 뾰족한 형태였다면 박해성의 복부엔 커다란 구멍이 나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잘만 가르치면 쓸만하겠는데…?’
김서준은 신태양이 무공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봤다.
껍데기에 불과한 고대 절권도를 저 정도로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진짜를 가르칠 경우 더욱 대단한 위력을 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서준에겐 혹시 모를 미래의 위험에 대비해 자신과 함께 싸워줄 강자들이 필요했다.
최우선 순위는 7명의 동료였지만, 그들 말고도 기회만 된다면 얼마든지 더 동료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서준은 이리나와 신태양을 유심히 지켜보기로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