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김서준의 음성에 실린 기운은 무척이나 싸늘했다.
무림계에서도, 그리고 이곳 헌터계에서도 김서준이 가장 증오하는 것이 바로 배신이었다.
그동안 믿었던 자의 배신으로인해 희생된 벗이 어디 한둘이던가.
김서준은 한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순간,
츠아아아악
김서준의 그림자가 쭉 늘어지며 단숨에 조태석의 등 뒤를 따라잡았다.
기겁한 조태석은 황급히 뭔가를 꺼내 김서준을 향해 내던졌다.
그건 달걀만한 구슬이었다.
온통 검은빛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영 불길해 보이는 구슬.
김서준은 그 구슬을 손에 쥔 도로 가볍게 갈라버렸다.
퍼억
구슬이 갈라지며 검은 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건 강력한 부식 효과를 가진 치명적인 독, ‘사이톡신’이었다.
피부에 닿으면 단 몇 초만에 살을 문드러지게 만들고 조금이라도 삼키면 허파와 내장기관을 녹여버린다.
균열 너머의 이세계에서만 발견되며, 그 치명적인 독성으로 인해 지구로의 반입이 금지된 품목 중 하나인 사이톡신.
그걸 무기화한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질 정도로 조태석의 인성은 썩어 있었다.
김서준은 사방에 흩뿌려진 분말이 사이톡신임을 알아차리자 마자 오른 손에 들고 있던 도를 그대로 내던졌다.
쑤에에에엑
길쭉한 도가 검은 분말로 가득한 공간을 꿰뚫고 지나가자 강력한 회오리가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실로 엄청난 속도.
그 공간의 끝에서 내달리고 있던 조태석은 등 뒤로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고개를 확 돌렸다.
검은 안개 속에서 회오리를 일으키며 섬전처럼 날아드는 도 한자루.
그걸 본 조태석이 ‘어?’ 하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을 때,
퍼억
도는 이미 조태석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그걸로도 부족해 조태석을 꼬치처럼 꿰뚫어 버린 도는 동굴 벽까지 날아가 깊숙히 박혀버렸다.
“크헉!”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조태석의 눈에는 불신으로 가득했다.
그때 김서준이 눈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오른 손을 활짝 펼쳐 뻗어냈다.
쏴아아아아아
손바닥 안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던 사이톡신의 분말들이 일제히 빨려들어갔다.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궈진 손.
김서준은 그대로 날아가 조태석의 머리를 새빨게진 손으로 콱 움켜잡았다.
“사, 살려 줘…. 살려만 주면 모든 걸 말하겠….”
“필요 없어.”
김서준은 차갑게 말하며 손에 응축되어 있던 힘을 그대로 방출시켰다.
푸화아아아아악!
손에서 뿜어진 짙은 어둠.
어둠은 단숨에 조태석의 머리를 집어 삼켰고, 동굴 벽에도 커다란 구멍을 뚫어 버렸다.
머리가 사라진 조태석의 몸은 도에 가슴이 박힌 채로 축 늘어졌다.
김서준은 자신의 도를 뽑아들었다.
쿠웅
조태석의 시체가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머리가 사라진 목에서는 새빨간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조태석의 확실한 죽음을 확인한 김서준.
그는 고개를 돌렸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리나의 백색 기사들과 전투 중인 임희주를 가만히 응시했다.
임희주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조태석을 죽여버린 김서준의 시선을 마주치자 몸을 바르르 떨며 두려움에 빠졌다.
지금까지 그녀가 지켜본 김서준은 호구 소리를 들어도 반박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씨가 좋고, 행동과 사고 방식이 무척이나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조태석을 처리하는 김서준의 손속엔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즉결 처분.
첩자를 잡아 정보를 캐겠다는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 아예 없어보였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도망치는 건 이미 글렀다.
여기서 더 발버둥 쳐봐야 김서준이 갑자기 손속에 사정을 두어 자신을 살려줄 리가 없었다.
임희주는 공포에 질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김서준에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마음에 결정을 내렸다.
털썩
다짜고짜 무릎을 꿇은 임희주는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서는 김서준을 향해 억울한듯 소리쳤다.
“난, 난 아니야. 난 그저 아버지가 시킨데로 한 것 뿐이라고!”
저벅. 저벅.
김서준은 아무 대꾸도 없이 그저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서, 서준 오빠. 살려주면 모든지 다 할게! 평생을 바닥을 기며 살라고 해도 할 수 있다니까? 목숨만…. 그냥 목숨만 붙여달라고!”
임희주의 외침은 절절했다.
어느새 1미터 앞으로 다가선 김서준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고 있는 임희주의 모습은 너무도 처량해 보였다.
이리나는 그런 임희주를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김서준. 임희주는 교관님들한테 넘기자.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또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고 어디까지 이 일에 연루된 건지 알려면 증언도 필요….”
이리나가 임희주를 살려주라는 말을 꺼내는 그 순간, 갑자기 임희주가 고개를 바짝 쳐들더니 귀신들린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캬하하하하! 다 죽는 거다! 단 한놈도 여기서 살아나갈 수 없을 거라고!”
임희주의 손에는 그녀가 생존장비에서 찾아낸 마력 방패가 꼭 쥐어져 있었다.
방패는 새파랗게 빛을 내고 있었다.
사방으로 쫙쫙 금이 나 있는 상태로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는 방패.
이 징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임희주는 이 방패를 폭주시키기 위한 시간을 벌려고 목숨을 구걸하는 척 했던 것이다.
“위험해!”
“피해!”
“자폭이다!”
생도들 모두 경악하며 임희주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리나와 신태양만은 달랐다.
그 둘은 오히려 임희주 쪽으로 뛰어들며 방패를 온몸으로 감싸 안으려고 했다.
그때, 김서준이 내공을 일으켜 두 사람을 부드럽게 뒤로 밀쳐냈다. 그리고 왼손의 도를 가볍게 휘둘렀다.
서걱!
미친듯 웃어대던 임희주의 목이 그대로 날아갔다.
목을 베어내자마자 방패를 낚아챈 김서준.
그가 바닥을 힘차게 찍어차자,
꽈앙
땅이 움푹 파이며 대공동의 천장을 향해 끝없이 날아올랐다.
비뢰신보를 펼쳐내 이십미터가 넘는 높이까지 날아오른 김서준.
그가 천장 꼭대기를 향해 방패를 내던졌을 때, 마침내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끔찍할 정도의 강렬한 폭발음이 터지며 거센 충격파가 퍼져나가는 그 순간,
‘염동장막!’
지이이이이이잉
김서준이 폭발지점을 향해 반원형의 장막을 만들어 냈다.
투명한 형태의 반원은 위성 안테나처럼 오목한 형태가 되어 폭발의 충격을 모조리 받아냈다.
쩌어어어엉!
오목한 염동장막을 강타한 충격파.
그 충격으로 인해 염동장막이 아래쪽으로 크게 출렁였고, 아래에서 염동장막을 양손으로 받치고 있던 김서준 또한 바닥으로 튕겨나갔다.
하지만, 염동장막은 끝내 폭발의 충격을 모두 막아내고 말았다.
방패에 내장되어 있던 어마어마한 폭발력은 염동장막에 막혀 모든 파괴력을 대공동 천장 쪽으로 쏘아 보냈다.
꽈과과과과과과광
하늘로 치솟아 오른 새빨간 화염의 빛은 천장을 관통하고 또 관통했다. 그리고 마침내,
쿠아아아아앙!
대공동의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한 낯의 태양빛이 대공동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꽈앙!
김서준은 엄청난 폭발력에 튕겨져 바닥에 쑤셔박혔다.
바닥이 움푹 파일 정도의 강한 충격에 김서준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려야 했다.
그런 김서준을 향해 이리나가 가장 빨리 달려와 그를 낚아챘다.
우르르르릉
천장에 구멍이 뚫리며 커다란 바윗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김서준은 이리나 덕분에 간발의 차이로 바위에 깔리지 않을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모한 짓을 한거야?”
김서준을 안아든 채 따져 묻는 이리나의 표정엔 걱정의 감정이 한가득이었다.
“살았으면 됐지 뭐. 그보다…. 나 좀 내려주라. 내가 무슨 공주님도 아니고.”
김서준의 말에 이리나는 흠칫 놀랐다.
너무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지금 자신이 김서준을 공주님 안아들기로 꽉 받쳐들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160센티 정도 키의 작은 체구를 한 이리나가 185나 되는 큰 덩치의 김서준을 꼭 안아들고 있는 모습은 꽤나 재밌는 광경이었다.
이리나는 다급히 김서준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고맙다. 네 덕분에 생명줄 연장했네. 나도 참 질긴 놈이다. 안그래?”
“넌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니? 다른데 다친 곳은 없고?”
“보다시피.”
김서준은 다소 지쳐있을 뿐,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물론 크고 작은 상처를 입긴 했다.
하지만 김서준에겐 태양신공의 재생력이 있었기에 빠르게 상처들이 아물수 있었던 것.
“정말 괜찮아? 방금 너 수십미터 높이에서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고.”
“내 몸이 워낙 튼튼해서 말이지.”
김서준은 씨익 웃어보였고, 그 웃음을 보고나서야 이리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두 명의 배신자로 인해 큰 사고가 터질뻔 했지만, 결국 그 둘이 먼저 죽고 말았다.
김서준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건 조태석과 임희주였으리라.
생도들도 그 사실을 알기에 김서준에 대한 고마움은 무척이나 컸다.
“근데 너희들 너무한다. 철민 오빠야 리더니까 그렇다 쳐도 양휘랑 신태양, 거기다 이리나 너까지 모두 알고 있었으면서 우리만 쏙 빼놓다니. 솔직히 너무 서운한데?”
민소라가 배신자에 대한 정보를 몇몇 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서운함을 내비쳤다.
“미안하다.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적어야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할 것 같았거든.”
최철민이 머리를 긁으며 미안해 하자 민소라가 킥 하고 웃었다.
“난 또 우리도 첩자 명단에 올라 있어서 그런줄 알았네. 아니면 다행이고요.”
“의심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첩자가 둘 이상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셋일지, 아니면 넷이 될지는 우리도 장담을 못했으니까.”
이번엔 양휘의 말이었다.
참 정감없는 말투였지만, 그게 양휘였다.
있는 사실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말하는 성격.
대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없으니 가장 믿을 수 있는 생도이기도 했다.
그때 였다.
“야, 이 자식들아! 거기서 뭣들 하는 거야! 당장 안 튀어나와?”
어느새 대공동 출입구 앞에 박문호 교관이 나타나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 5단계가 시작되기 직전에 균열 입구에서 뛰기 시작해 이제야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도착과 동시에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생도 10명이 이곳에 들어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는 생도는 단 8명 뿐.
나머지 둘은 출입구 근처에서 머리 없는 시체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몬스터에게 뜯어먹힌 흔적은 조금도 없다.
조태석은 강한 독의 힘에 머리가 녹아버린 듯 보였고, 임희주는 검같은 날카로운 무기에 목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어떤 이유로 인해 생도들끼리 싸움이 벌어졌고, 그 결과 둘이 죽었다.
이건 박문호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
12년 동안 수많은 예거 생도들을 가르쳐온 그였지만 생도들끼리 다투는 건 봤어도 직접 살해하는 상황까지 벌어진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같은 생도를 죽이게 된 건지 이유도 캐묻지 않았다.
일단은 살아남은 생도들을 데리고 여길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모두 챙길 거 빨리 챙겨서 나와라. 더 늦으면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게된다.”
박문호는 그렇게 지시를 내린 뒤, 조태석과 임희주의 시체를 수습했다.
장갑을 낀 손을 활짝 펴서 시체에 가져다 대자,
슈욱
시체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박문호는 예거 교관들에게 주어지는 공간 글러브를 이용해 시체를 아공간 속에 넣어 버린 것.
그렇게 박문호와 생도들은 보스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약 20여분에 걸쳐 쉬지 않고 뛰었고, 결계가 폐쇄되기 10분 전, 균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최철민이 대표가 되어 이틀 동안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 모든 걸 박문호에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박문호의 얼굴은 심각했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다. 우선 귀환부터 하고, 명확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마.”
“이번 훈련에서 얻은 마석하고 아티팩트는 어떻게 합니가?”
최철민은 김서준에게 주기로 한 블루급 마석 2개를 뺀 나머지 마석들을 꺼내 박문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보스룸에서 얻은 아티팩트 7개도 함께 꺼내 놓았다.
마석은 총 19개였다.
보스에게서 나온 블루급 마석 1개에, 옐로우급 마석 4개, 그리고 오렌지급 마석 14개.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박문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건 내가 챙겨 놓도록 하지. 모든 게 확인 되면, 그때 다시 돌려주겠다.”
“네, 그렇게 하는게 맞을 거 같습니다.”
최철민과 생도들은 박문호의 조치에 아무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박문호는 김서준이 블루급 마석 한 개와 오렌지급 마석 한 개를 따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 김서준은 살아남은 7명의 생도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고, 만약 그 마석들마저 수거한다면 크게 반발할 것이 뻔했으니까.
또 다른 소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첩자들로부터 생도들을 지켜낸 김서준의 업적을 인정해 주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간섭은 하지 말아야 했다.
“이제 귀환한다.”
박문호가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생도들은 모두 김서준에게 눈으로 인사를 해 보이고는 하나씩 구름판을 밟아 균열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