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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커밍 데이는 끝났다.
아니, 정상적으로 마무리가 된 게 아니라 김서준의 폭탄 발언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예거 역사 상, 단 한번도 없었던 생도의 자진퇴소.
실력이 미치지 못하거나, 훈련 중에 치명적인 실수를 해서 강제로 퇴소조치 되는 경우는 있었어도 제 입으로 퇴소하겠다며 넘버링 요원들 앞으로 기프트를 내던진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로 인해 홈커밍 데이는 잠정 중단됐고, 생도들은 모두 숙소로 돌려보내 졌다.
단 한명, 김서준 만이 임시 대기실에 남아 최종 조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김서준이 있는 곳은 커다란 방이었다.
휴게실처럼 음료용 자판기도 있었고, 쉴 수 있는 푹신한 쇼파도 비치되어 있었다.
김서준은 그중 가장 큰 쇼파에 드러누워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김서준을 여덟명의 넘버링 요원들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중이었다.
대기실 벽에는 커다란 거울이 달려 있었고, 그 거울은 반대쪽에서 안을 볼 수 있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던 것.
“….이건 예거 역사에 한번도 없었던 초유의 사태야. 이채윤. 넌 김서준이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는 걸 전혀 예상을 못했던 거냐?”
가장 연장자인 지학선이 이채윤을 탓하듯이 말하자 권윤성이 대신 나섰다.
“학선 형님. 이건 채윤이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이번 일에 동의 한 거잖습니까?”
“동의? 그래 했지. 하지만 넘버 투로서 고집을 부리니까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새 잊었나 보구나.”
“그게 그거지요. 그리고 이제와서 따져봐야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지금 중요한 건 김서준 생도의 자진 퇴소를 어떻게 처리하냐입니다.”
“뭘 어떻게 처리해? 절이 싫어 중이 떠나겠다는데 무슨 수로 붙잡을 수 있을까? 우린 지금 현도에 버금가는 역대급 예거 요원을 우리 손으로 내친 거나 마찬가지다. 내가 좀 더 뜯어 말렸어야 했는데…. 후….”
지학선은 김서준의 진짜 실력이 오늘 본 게 끝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김서준이 김유라를 상대할 때 사용한 건 신비가 아니었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무공과 조금도 다를게 없어 보였다.
세상에 무공이라는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김서준은 그 무공과 흡사한 기술로 S급 헌터인 김유라를 때려눕혔다.
설사 그 기술이 진짜 무공이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누구도 본적 없는 강력한 기술을 익히고 있다는 것이니 어찌 아깝지 않을까.
넘버링 요원들이 몰래 마력의 원류를 알아내려고 이번 일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김서준에게 알려진 이상, 그가 예거에 남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지학선은 숨겨진 보석을 놓치게 된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고, 이채윤의 고집을 꺾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문라이트의 힘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는데, 예거의 힘은 오히려 축소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나마 예거의 가장 강력한 구심점이었던 윤현도마저 사라진 지금 앞으로 문라이트를 어찌 상대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예거 넘버링 요원들도 그런 지학선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이채윤이 가장 마음이 무겁다는 사실을 알기에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더 할 일 없으면 난 이만 돌아가 보겠어요.”
내내 무거운 얼굴로 서 있던 김유라가 꺼낸 말이었다.
그녀는 오늘 김서준에게 패했던 장면을 끝없이 복기하며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를 스스로 분석하는 중이었다.
기프트에는 주변에 존재하는 CCTV 영상을 임의로 해킹해 카피본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기능이 있었는데, 김유라는 당장이라도 그 영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김유라. 너 정말 김서준이 지닌 마력의 원류가 무언지 확인 못한 거야?”
차준혁의 질문이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그것이었으니, 적어도 마력의 원류만큼은 속 시원하게 밝혀지길 바랐던 것.
“또 그 소리네. 오빠도 알잖아? 그거 확인하려면 5분 동안 마력 접촉이 쭉 이어져야 한다고. 그런데, 내가 몇 분만에 쓰러졌더라? 2분? 3분까지도 안됐던 것 같던데?”
“그놈의 5분 제한은 2년이 지나는 동안 조금도 줄지를 않냐? 숙련도 60%를 아직 못 넘긴 거야? 숙련도가 40% 때 7분이 5분으로 줄었으니 60%가 되면 3분으로 줄어들 수도 있지 않나?”
“그거야 오빠 생각이지! 숙련도 60%가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김유라는 몇몇 넘버링 요원들과는 꽤나 편하게 대화를 주고 받을만큼 가까웠다.
차주혁도 그중 하나였고.
“권예 신비 하나가지고 그렇게 쩔쩔 매고 있으면 다른 신비 숙련도는 언제 올릴래? 너 올해 안에 조기졸업 하겠다며? 그럼 6개월 안으로 정식 활동이 가능해 질텐데, 마음이 급하지도 않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셔. 아무튼, 난 오랜만에 본부에 온 김에 내 구역으로 가서 조용히 수련이나 할 겁니다. 괜히 방해할 생각 마세요, 다들.”
김유라는 옷을 툭툭 털더니 회의실을 벗어나려 했다. 그때, 이채윤이 김유라를 불러세웠다.
“유라. 이 언니가 하나만 묻자.”
이채윤의 음성엔 진심이 묻어나고 있었기에 김유라도 모른채 할 수가 없었다.
김유라가 고개를 반쯤 돌린 자세로 멈춰서 있자, 이채윤이 말을 이었다.
“네 생각에 김서준 생도가 지닌 마력의 원류는 뭐일것 같니?”
“백마력, 아니면 초마력. 내가 장담하는데 절대로 흑마력이나 악마력은 아니야. 내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그래….?”
“만약에…. 정말 만약에 김서준 그 자식이 흑마력이나 악마력이라고 해도 그건 문라이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김유라는 자신의 본능과 느낌을 믿었다.
김서준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기운은 김유라를 조금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으니까.
“알았어. 네 말 충분히 이해했다.”
“그럼 난 가볼게.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충고하는데, 김서준…. 절대 놓치지 마. 언니를 위해서도, 그리고 예거 전체를 위해서도.”
김유라는 그 말을 끝으로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그녀를 시작으로 넘버링 요원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나도 모든 책임을 떠넘길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일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이 채윤이, 너 뿐이라는 건 말하고 싶구나.”
지학선은 그 말을 남기고 회의실을 나섰고, 장훈과 차준혁 또한 비슷한 의미로 몇 마디 하고는 함께 빠져나갔다.
조미진은 이채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다가 나직이 한마디 했다.
“이제 언니도 현도 오빠의 그늘에서 벗어나야할 때가 된 것 같아. 이번 일이 좋은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
그렇게 이채윤을 다독여준 조미진도 회의실을 벗어났다.
남은 건 권윤성과 박대만 뿐.
“나도 김서준을 몇 차례 만나봤던 사람으로써 한마디만 하겠다. 그 녀석,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이채윤, 너 뿐이야. 녀석이 진짜 바라는 건 퇴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잘 생각해서 결정하기 바라마. 하지만, 네가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부담 가지지 말고 너만의 선택을 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박대만이 나름 길게 말을 하고는 그 또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넘버링 요원이 다 빠져나가고 남은 건 권윤성 뿐이었다.
그는 남았다기 보다는 넘버 원의 최고 결정자로서 이채윤의 선택을 행동에 옮기기 위해 이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우리 예거 전체의 뜻이다. 그러니 소신을 가지고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된다.”
권윤성의 말에 이채윤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평소엔 뉴스에서 그렇게 말을 잘 하는 녀석이 지금은 왜 그리 소심해 졌어? 저녁 시간대의 메인 아나운서가 왜 그리 맥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이채윤의 또 다른 직업은 케이블 방송사의 뉴스 아나운서였다.
순전히 본인의 실력으로 아나운서가 된 것이기에 방송사에서 이채윤이 지니는 무게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이채윤이 해당 방송사의 모든 프로그램들의 출연자 섭외에 최종 결정권까지 쥐고 있다는 소문이 있을까.
그만큼 이채윤의 사업적인 수완도 무척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그 능력 덕분에 예거의 모든 임무 또한 대부분 이채윤이 분배하고, 작전계획을 세운다.
넘버 원 권윤성은 그런 이채윤의 결정을 믿었고, 이채윤이 세운 계획에 자신의 의견을 더해 현장에서 함께 작전을 지휘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권윤성은 말없이 이채윤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채윤이 고개를 들어 벽 너머의 대기실에서 쉬고 있는 김서준을 빤히 바라봤다.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결정했어요.”
“듣고 있다.”
“이번 일은 확실히 제 실수였어요. 그러니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무슨 짓이든?”
“네. 김서준에게 사과하고 원하는 요구가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줘야죠.”
“그 정도로 김서준을 예거로 끌어들이고 싶은 거냐?”
권윤성은 이채윤이 윤현도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안다.
예거 넘버링 최강의 요원, 윤현도.
다른 넘버링 요원들을 포함해 예거를 책임지고 있는 비밀 첩보국 수뇌부들 조차도 윤현도의 강함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하지만 권윤성과 이채윤만은 윤현도의 강함이 얼마나 경악할만한 수준인지를 잘 안다.
권현도가 아는 윤현도의 마력은 최소 2천 이상이다.
또한 윤현도은 최소한 세 개의 신비를 지니고 있었고, 신비가 없이도 A급 헌터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신체능력을 지녔다.
이 사실을 제대로 아는 인물은 세상을 통틀어 단 세명 뿐.
권윤성과 이채윤, 그리고 예거의 최고 명령권자인 대통령이 전부였다.
이 셋에게 윤현도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핵심이었고, 문라이트를 궤멸시킬 최종병기였던 셈.
그렇기 때문에 이채윤은 윤현도의 넘버링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윤현도에 버금가는 강자가 아닌 이상은.
윤현도의 그 굽힐줄 모르는 마음과 비견될만한 정신력을 지닌 인물이 아닌 이상은 쉽게 넘버 포를 넘겨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채윤은 김서준을 향해 지극히 개인적인 잣대를 들이밀었던 것이었고.
“지금 당장은 현도 오빠에 비할 수 없지만, 윤성 오빠라면 김서준을 최강의 전사로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요.”
이채윤은 강렬한 눈빛으로 권윤성을 바라봤다.
그러자 권윤성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 알고 있었어?”
이건 대통령도, 이채윤도 모르는 일이어야 했다.
최강의 남자 윤현도.
그를 키워낸 인물이 바로 권윤성이라는 사실을.
“제가 알고자 하면 세상에서 제가 모를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물론, 이번 김서준 생도의 경우는 예외랍니다.”
이채윤이 생긋 웃으며 꺼낸 말에 권윤성은 ‘하’소리를 내며 기가막혀 했다.
권윤성과 윤현도 단 둘만이 아는 사실을 이채윤이 알고 있을 줄이야.
권윤성이 말한적은 없으니 윤현도가 이채윤에게 말했음이 분명했다.
‘이채윤…. 그 정도로 현도와 가까웠던 거냐?’
이채윤이 윤현도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최상위 비밀까지 공유하고 있을만큼 윤현도와 깊은 관계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윤현도를 최강의 사내로 만들어낸게 권윤성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상 이제와서 발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날 믿고 김서준을 끌어들이겠다?”
“그것과 더불어 김서준의 재능을 믿어요. 김서준은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혼자 수련한 힘으로 유라를 쓰러뜨렸어요. 그런 김서준의 재능과 오빠의 능력이 합쳐지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이 안 가네요.”
“김서준이 마음을 돌릴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그래서 오빠의 도움이 필요해요. 김서준을 설득하는 자리에 오빠도 함께 있어줬으면 해요.”
“나도?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아니요. 오빠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거에요.”
권윤성은 이채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채윤의 바람처럼 김서준을 설득해 넘버링 요원으로 남게 한 뒤, 그를 가르치고 다듬어 넘버 포의 자리에 앉히는게 최선이었다.
“알았다.”
“그럼 지금 바로 가죠.”
두 사람은 나란히 회의실을 나섰고, 옆의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로 향하기 전, 이채윤은 주변의 모든 감시카메라를 꺼버렸다.
오늘 이곳에서 오고가는 대화는 그 누구도 알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
지이잉-
자동 문이 열리고 권윤성과 이채윤이 들어섰다.
이채윤은 들어오자마자 대기실 문을 잠근 뒤, 벽에 설치된 대형 거울 쪽으로 다가가 작고 납작한 기기를 찰싹 붙였다.
기기는 거울에 붙어 아주 미세한 진동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채윤의 행동을 가만히 주시하던 김서준.
그는 쇼파에서 일어나 앉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나쁜짓을 하려고 소리와 시야 모두를 그리 철저하게 차단하는 거죠?”
탐탁지 않은 말투에도 이채윤은 아랑곳 하지 않고 김서준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그 옆엔 권윤성도 말없이 자리했다.
“김서준 생도의 퇴소 신청은 받아들일 수 없어.”
이채윤이 대뜸 퇴소할 수 없다는 말을 꺼냈음에도 김서준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예거의 의사는 저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전 지금이라도 여길 마음대로 나갈 수 있고요.”
“나도 알아. 그래서 너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제안요? 하…. 지금 뭔가 순서가 뒤집혔다는 생각은 안합니까? 제안을 하기 전에 저한테 해야할 일이 있을텐데요.”
김서준은 팔짱을 끼며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치 이채윤이 뭘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겠다는 것처럼.
그러자 이채윤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권윤성을 한차례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어보이고는 다시 김서준을 바라봤다.
“네가 원하는건….. 이거겠지?”
털썩.
이채윤이 김서준 앞에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