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30센티 길이의 손잡이에 20센티의 완만하게 구부러진 칼날이 달린 새까만 낫.
김서준은 완전히 달라진 흉급의 무기를 내려다보며 실소를 흘렸다.
‘하…. 이게 괜히 사슬낫이 아니었구나.’
이 사슬낫은 내공으로만 작동하는 변신(?) 무기였다.
그런데 왜 많고 많은 무기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낫일까?
김서준은 적잖이 실망하고 말았다.
흉급 오파츠라고 해서 얼마나 대단한게 있을까 기대가 컸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따고보니 A급에 봉인 능력을 지닌 변신하는 사슬낫이다.
마력이 888이고 유니크라는 격을 지니긴 했어도 실질적인 능력과 무기의 형태가 생각보다 너무나도 별로였다.
‘검도 좋고, 칼도 좋고, 창이나 언월도 같은 무기도 상관없는데 왜 하필…. 어휴.’
한숨을 깊게 내쉰 김서준은 이건 이곳에 두고 그냥 나가기로 했다.
아무리 봉인 능력이 좋아도, 아무리 주인과 함께 성장하는 무기여도 이건 아니었다.
김서준은 내공을 회수해 다시 단봉 상태로 되돌린 뒤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팔을 칭칭 휘감고 있는 사슬을 풀어내려 했다. 그런데,
‘뭐야? 왜 안풀려?’
사슬은 아무리 힘을 잔뜩 주어도 풀어지지가 않았다.
마력을 써보고, 내공을 4할이나 끌어올려도 사슬은 꿈쩍도 안했다.
아니, 꿈쩍 하기는 했다.
내공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쇠사슬이 팔을 휘감는 힘이 점점 강해졌으니까.
이대로 5할, 6할까지 내공을 올린다면 팔이 아예 으스러질 것 같았다.
‘이런, 젠장!’
김서준은 다시 장갑을 낀 상태에서 단봉을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방의 한쪽 구석을 목표로 단봉을 힘껏 내던졌다.
촤르르르르르르
쇠사슬이 엄청난 속도로 풀어지더니,
퍼억!
단봉이 벽 깊숙히 박혀들었다.
‘지금이다!’
김서준은 곧바로 장갑을 벗어서 벽쪽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하지만,
촤락
길게 풀어졌던 쇠사슬이 순식간에 날아들어 팔을 다시 휘감아 버렸다. 피할고 말고할 틈조차 없었다.
벽에 박혀들었던 단봉도 어느틈엔가 손에 쥐어진 상태.
“하….”
김서준은 이제야 깨달았다.
이 사슬낫은 이제 자신의 팔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로부터 10분이 지났다.
김서준은 사슬낫을 몸에서 떼어낼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어떡하든 떼어내 보려고 소득없는 노력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공격하는 척 사슬낫을 내던진 후 최대한 멀리 도망쳐 봤지만 사슬낫은 귀신같이 다시 날아와 왼팔을 휘감아 버렸다.
아예 회피가 불가능한 속도.
심지어 오른 손에 장착한 초시공 건틀릿으로 아공간에 넣어보려고 했지만, 이놈의 사슬낫은 아공간에도 들어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김서준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야 말았다.
‘맘대로 해라, 맘대로.’
S급의 오파츠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괜한 호기심에 날려버린 김서준은 이 잔혹한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나마 검은색 사슬이 칭칭 휘감고 있는 왼손에 별다른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짧고 뭉툭한 단봉만 5킬로그람 정도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어우, 흉측해.’
검은 사슬 때문에 흉측해 보이는 팔은 토시 같은 걸로 잘 감싸면 별로 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디가서 이놈의 팔에 흑염룡이 날뛰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게 뭔 거지같은…. 에휴. 관두자.’
혼자 열을 내던 김서준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9번 오파츠의 방을 벗어나야 했다.
***
“허, 참….”
“기가막히군.”
장범수도 권윤성도 김서준의 설명을 듣고는 어처구니 없어 했다.
어둠의 자식인양 검은 광채를 뿌리는 사슬을 왼팔에 칭칭 감고 있는 김서준.
그의 얼굴에서는 워낙 깊은 빡침이 느껴지고 있어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두 분도 이거 떼어내는 방법 모르시겠죠?”
“사슬봉이 팔을 그런 식으로 휘감을 수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네.”
장범수는 이 상황이 웃기면서도 안타까웠다.
S급 오파츠 세 개가 자신들을 데려가 달라고 김서준을 향해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데, 엉뚱한 흉급 무기가 들러붙어 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할까.
“죄송한데…. 이 모방안을 다시 돌려드릴 테니까 다른 오파츠로 바꾸는건 안되겠습니까?”
김서준이 제발 좀 들어달라는 얼굴로 말해봤지만,
“자네 손에 달라붙은 무기도 어쨌든 오파츠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오파츠를 추가로 가져가는 건 불가하네. 다른 신입 넘버링 요원들한테도 공평한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김서준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빠르게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의외로군. 그 흉물스런…. 크흠. 아니, 그 대단한 흉급 오파츠가 12년 만에 주인을 선택할 줄이야….”
장범수는 정말 신기하다는 얼굴로 사슬낫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 놈이 12년이나 이곳에서 썩고 있었던 건가요? 그래서 더 지독하게 나한테 달라붙는 건가?”
“어쨌든 주인으로 간택되었으니 잘 사용해 보게. 혹시 아나?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무기일지도 모르지 않나?”
“행여나요….”
김서준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힘내게. 자네는 굳이 이런 오파츠가 아니어도 충분히 강하지 않은가? 진정한 강자에게 오파츠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네. 게다가 새로운 신비를 획득할 기회도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네? 새로운 신비요?”
장범수가 놀라운 말을 꺼냈다.
새로운 신비를 획득할 기회라니?
김서준은 이게 뭔 소린가 싶어 권윤성과 장범수를 번갈아 바라봤다.
“응? 권 팀장. 아직 넘버링 요원이 되면 받게되는 가장 큰 혜택에 대해 설명을 안 해준건가?”
“오늘 김서준이 국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때 설명해 주려 했습니다.”
“아, 그랬나? 그럼 지금이라도 알려주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권윤성은 어리둥절해 있는 김서준을 쇼파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서는 차 한잔을 권했다.
“일단 이것부터 마시면서 이야기를 들어라.”
“무슨 엄청난 말을 하려고 이리 뜸을 드려요? 사람 궁금하게시리.”
“김서준. 너도 신비를 각성한 헌터로서 신비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는 잘 알거라 생각한다. 그럼 하나 묻지. 헌터가 각성할 수 있는 신비가 정확히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지?”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답은 너무 뻔했다.
“당연히 하나죠.”
“그럼 왜 신비는 하나 밖에 각성할 수 없을까? 여기에 대해서 궁금해 한 적은?”
“아무리 제타파로 집중력이 강화된 상태라 해도 신비 하나를 각성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제대로 들었군. 맞다. 네 말대로지. 하지만, 만약에 그 제타파를 강제로 높여주고, 강력한 마력까지 거의 무한으로 지원해 주는 장치가 있다면 어떨까?”
눈을 빛내며 말하는 권윤성에게서는 강한 자부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에 김서준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예거에서 그런 장치를 개발한 겁니까?”
끄덕.
권윤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 위로 홀로그램 화면을 띄웠다. 그리고 비스듬하게 눕혀진 캡슐의 설계도를 보여주었다.
“이게 바로 각성 캡슐이다.”
“각성 캡슐이요?”
“말 그대로야. 이 캡슐에 들어가면 인간의 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제타파를 자극해 최대 10배까지 높일 수 있고, 지속적으로 100 이상의 마력에 노출시킴으로써 신비를 각성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에 놓이게 되지. 그럼 신비를 이미 각성한 헌터라 해도 새로운 신비를 하나 더 각성할 가능성이 생기는 거다.”
“그게 진짜로 가능하다고요?”
“물론이다. 그래서 모든 넘버링 요원들은 이 캡슐에 들어가서 신비를 추가로 획득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지.”
이건 김서준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김서준 자신이야 무공을 이용해 신비를 얼마든지 계속 추가로 획득하는게 가능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불가능한 걸로 생각했었다.
심지어 유호성을 통해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신비를 각성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내용까지 확인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런 기계장치를 이용해 신비를 강제로 각성하는 방법이 존재할 줄이야.
김서준은 이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채윤이 스크류 킥이라는 신비를 각성한 상태에서 또 다른 정신계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정답은 바로 각성 캡슐이었다.
“그럼 권 팀장님도 이미 이 캡슐에 들어갔었나요?”
끄덕.
권윤성은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넘버링 요원들도 다요?”
끄덕.
“저도 이제 이 캡슐에 들어갈 자격이 생긴 거고요?”
“그렇다. 보통은 수료식이 끝나고 5일 후, 정식 요원의 자격으로 예거에 출근하게되면 그때 캡슐에 들어가게 되지.”
“보통 그렇다는 거지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는 거죠?”
김서준의 질문에 권윤성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긴 하다만, 캡슐에서 거의 24시간을 갇혀 있어야 한다.”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시작하죠.”
김서준은 지금 당장 각성 캡슐을 체험해 보고 싶었다.
무공으로 신비를 각성하지 않고, 각성 캡슐로 각성하게 되면 어떤 신비가 생성될지 너무도 궁금했다.
“지금 하겠다고?”
“네, 지금요. 각성 캡슐 성공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흠…. 확률상으로 따지면 93%나 되긴 한다만.”
“오, 엄청 높네요?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표정이 영….”
“지금까지 총 15명이 각성 캡슐에 들어갔고, 그중 14명이 2차 각성에 성공했지. 그런데…. 각성에 실패한 딱 한명이 바로 윤현도였다.”
“네? 정말이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다 실패해도 윤현도만큼은 무조건 성공할 줄 알았는데 상당히 의외였다.
“제타파를 자극하고 마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힘들지. 넘버링 요원 정도 되는 능력자가 아니라면 각성 캡슐에 들어가도 몇 시간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나올거다.”
“설마 윤도현 요원이 도망쳐 나온 건 아니겠죠?”
“당연하지. 그는 그 누구보다도 오래 캡슐에서 버티고 버텼다. 하지만 끝내 각성에는 실패했다.”
“운이 따르지 않았나 보네요. 어쨌든, 저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바로 도전해 보겠습니다.”
“캡슐에 들어갈 기회는 오직 한 번 뿐이다. 두 번 이상 캡슐을 사용하면 몸에 심각한 부작용이 생긴다. 만약 각성에 실패한다해도 두 번째 기회는 없다 이말이야.”
“이해했습니다.”
김서준은 깔끔하게 각성 캡슐까지 다 끝내놓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5일 뒤, 소집이 있을 때 다른 신입 넘버링 요원들이 빤히 지켜보는 사앹에서 캡슐에 들어가는 건 그다지 내키지가 않았다.
그리고 각성 캡슐에 대한 궁금증을 풀지 않고 5일을 보내는 건 김서준에게 있어 고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원하는데로 해 주게, 권 팀장. 나도 궁금하군. 김서준 요원이 과연 어떤 신비를 새롭게 얻게 될지가 말이야.”
“네. 그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렇게 김서준의 2차 각성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약 1시간 여가 흘렀을 때, 김서준은 장범수, 권윤성과 함께 B6층의 깊숙한 어딘가로 이동했다.
예거 본부에는 또 한 곳, 어디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비밀 장소가 존재했는데, 그곳이 바로 ‘각성실’이었다.
각성실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각성 캡슐이 설치된 실험실 같은 분위기의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캡슐방과 유리벽을 사이에 둔 제어실이었다.
제어실에서 보이는 캡슐장치는 꽤나 거대했다.
캡슐 자체는 사람 한명이 들어갈 정도로 작았지만 그 주변에 따라붙는 장치들이 워낙 많다보니 무척이나 거대해 보였다.
제어실 안에는 소식을 듣고 온 것인지 이채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충분하게 설명은 해 준거죠?”
이채윤이 묻자 권윤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까지 해줬다. 고집이 보통 센게 아니라 한번 정한 일은 도통 되돌리려 하질 않는군.”
“제가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죠.”
김서준은 이채윤을 향해 방긋 웃어보였다.
“수료식 당일에 각성 캡슐에 들어가겠다는 사람은 현도 오빠 말고는 처음이네요.”
“아, 윤현도 요원도 수료식날 바로 캡슐에 들어갔나 보군요? 이래저래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괜한 말은 하지 않는게 좋아. 그러다 각성에 실패하는 것까지 똑같아 지면 어쩌려고?”
“에이, 설마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김서준은 속으로 뜨끔했다.
예거 역사상 최강의 요원이라고 평가받았던 윤현도조차 2차 각성에 실패했으니 김서준도 100% 성공할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단 말이지. 윤현도 요원이 정말 한 개의 신비만 가지고 최강이라고 불릴 수 있었을까?’
왠지 윤현도가 2차 각성에 실패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캡슐은 준비 됐으니 이제 들어가도 된다. 각성 중에 버티기 힘들겠다 싶으면 캡슐 안에 있는 중단 버튼을 눌러. 괜히 억지로 버티다가 잘못되면 너 뿐만이 아니라 우리 예거에도 큰 타격이니까.”
이채윤은 김서준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통유리로 된 두꺼운 벽 끝에는 실험실로 진입이 가능한 밀폐형 출입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김서준이 그곳에 들어서자 바닥이 저절로 움직여 실험실 쪽으로 움직여 갔고, 그 사이 다섯 번에 걸친 공기압 세척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실험실 안에 들어선 김서준.
그는 이미 열려있는 캡슐을 잠시 살펴보다가 조심 조심 그 안에 들어갔다.
편안하게 누워 위쪽을 바라보자,
푸슈욱
캡슐 밖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강화유리로 된 뚜껑이 자동으로 닫혔다.
-처음엔 약간 따끔할 거야. 별거 아니니까 신경쓸 거 없다.
캡슐 안으로 이채윤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졸리면 자도 되는 거죠?”
-잘 수 있으면 상관없어. 하지만 쉽진 않을 거야.
“네. 저는 준비 됐습니다.”
-그럼 시작한다.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부모님한테 잘 설명해 드릴 테니 아무 걱정말고. 아무튼, 건투를 빈다.
이채윤의 음성이 끝났을 때, 캡슐 안으로 하얀 연기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푹. 푸부북.
손가락 굵기의 기계팔이 네 개의 주사 바늘을 김서준의 몸 곳곳에 찔러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