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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 알았다니까 그러시네. 내일 점심 전까지는 꼭 집에 도착할 테니까 걱정 말고. 그럼 잘 주무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김서준은 백연지 여사와 통화를 마치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내일 집에 들어가면 잔소리 또 엄청 듣겠네.”
원래대로라면 어제 집에 돌아갔어야 하는데, 각성 캡슐에 들어가 있느라고 하루를 그냥 날려버렸다.
당연히 백연지 여사는 아들이 연락도 없이 귀가하지 않자 난리가 났고, 여기 저기 수소문하여 아카데미 여름 캠프의 프로그램 담당자까지 찾았다.
다행히 예거에선 이런 경우를 대비해 가짜 담당자를 세워 놨고, 그를 통해 일정이 하루 늦어졌다고 설명했다.
그 덕분에 김서준과 통화할 때, 그나마 큰 소란이 없었던 것이다.
김서준은 어머니에게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오전 중에 꼭 귀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바꿔줄 테니 한번 더 설명해 드리라고 했다. 김서준은 그런 어머니를 억지로 뜯어 말린 뒤 서둘러 통화를 끊어야 했다.
‘내일은 내일이고, 일단 밥부터 좀 먹자.’
김서준은 너무나 배가 고팠다.
무려 32시간.
그 긴 시간을 아무 것도 먹지 않았더니 뱃가죽이 등에 찰싹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벌써 저녁 8시가 넘었기 때문에 공용식당은 문을 닫은 상태.
하지만 김서준은 걱정이 없었다.
넘버링 요원에게만 주어지는 전용 숙소에서는 식당에 직접 가지 않고서도 원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김서준은 여전히 예거 캠프에 머물고 있었다.
정확히는 생도들을 위한 숙소가 아니라 B4층에 마련된 넘버링 요원들만의 개인 숙소였다.
김서준에게 배정된 숙소는 익스퍼트 요원을 위해 준비된 것으로 문앞에는 이름 대신 [EX]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김서준은 우선 주방으로 가서 대형 냉장고 옆에 설치되어 있는 주문대 앞에 섰다.
그곳엔 터치형 화면이 있었고, 그걸 이용해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면 10분 내로 룸서비스처럼 방으로 직접 음식이 배달된다.
‘갑자기 과식하면 안되니까 가볍게 치맥으로 시작해 볼까나?’
수많은 메뉴 중에서 반반 치킨에 맥주 500cc를 골라 주문한 뒤 물 한컵을 마시고 거실로 돌아온 김서준.
그는 생각보다 훨씬 큰 숙소를 쭉 둘러봤다.
커다란 침실 한 개에 업무를 볼 수 있는 개인 서재가 딸려있고, 욕실, 주방, 거실 모두 큼직 큼직했다.
가볍게 운동을 할 수 있는 트레이닝룸도 있으며, 영화 관람실도 존재했다.
‘확실히 대우 하나는 끝내주는구만.’
예거는 사실상 대한민국이 지닌 최강의 무력조직이었다.
세계 각국이 서로 자랑질 하느라 바쁜 ‘유령’이라는 조직보다 훨씬 강력한 정예 요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런 걸 선물로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김서준은 오른 손목에 채워진 새로운 기프트를 가만히 살펴봤다.
이건 좀 전에 장범수 국장과 헤어지면서 은밀하게 전달받은 물건이었다.
생긴건 이전의 기프트와 비슷했지만, 기능은 크게 달랐다.
정식 명칭은 기프트-R0.
이는 예거 연구진이 개발한 최신형 기프트로서, 기존의 12가지 능력 외에 ‘위기감지’라는 새로운 능력이 추가되어 있다고 했다.
게다가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이 5가지나 되어서 예거 임무에 훨씬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 ‘기프트-R0’에는 기본적으로 위치추적 방해 장치와 1급보안 기능까지 있었고, 위성 시스템과 연계되어 있어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원하는 곳으로 통화가 가능했다.
‘이게 예거에서도 아직 두 개밖에 만들어 내지 못한 물건이란 말이지?’
장범수 국장은 그런 엄청난 물건을 최초의 익스퍼트 요원이자 예거 역사상 두 번째로 넘버 포가 된 김서준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라고 했다.
김서준은 이런 귀한 물건을 덥석 받는건 좀 아닌듯 하여 예의상 딱 한번만 거절하기로 했다.
하지만 장범수는 절대 거절하지 말라면서 오히려 안타까운 눈을 하고는 2차 각성에 실패한 것에 낙심하지 말라며 김서준을 위로해 주었다.
이 기프트-R0는 2차 각성에 실패한 것에 대한 위로의 선물이었던 셈.
사실 김서준 입장에선 2차 각성에 실패했어도 전혀 아쉬운게 없었다.
오히려 마력과 내공이 크게 증가했기에 크게 이득을 본 상황.
하지만 그런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누군가 김서준의 마력을 측정한다고 해도, 지금 김서준의 마력은 이중으로 숨겨져 있어서 정확한 수치를 알 수가 없을 테니 걱정할 것도 없었다.
김서준이 지닌 실제 마력 수치는 641.
하지만 사슬낫의 봉인 능력으로 인해 30%가 깎여 449로 표시된다.
방금 전, 심안을 이용해 더욱 자세히 정보를 확인해 본 결과, 다행스럽게도 사슬낫의 봉인 능력은 주인에겐 진짜로 적용되는게 아니었다.
수치상으로만 30%가 깎여서 보일뿐, 마력이나 내공을 운용하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게다가 기프트의 마력커버 능력으로 능력치를 30%, 50%, 80% 중 하나를 선택하여 수치를 깎아내리는 것도 가능했다.
김서준이 선택한 마력커버율은 50%였다.
그 결과 김서준의 능력치 정보는 현재 이렇게 표시되고 있었다.
[김서준]
-마력: 225[641] / 내공: 350[500] / 제어: 340[340]
사슬낫의 봉인 능력때문에 449로 보이는 상태에서 기프트의 마력커버 비율 50%를 적용한 결과로 225가 된 것이다.
이제 그 누구도 김서준의 마력이 641이나 된다는 걸 절대 알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엔 사슬낫의 봉인 능력이 크게 한몫 했다.
‘애물단지라고 생각했는데, 쓸데가 있긴 하네.’
왼팔을 칭칭 감고 있는 사슬낫을 쓸어보는 김서준의 눈빛엔 어느새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디보자…. 그럼 이 새로운 기프트에 저장할 능력을 뭐로 한다?’
장범수 국장은 내일 캠프를 떠나기 전까지는 반드시 기프트에 저장시킬 능력을 확정 지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기프트가 락에 걸려있어서 13개의 능력 모두를 번갈아 가며 사용할 수 있지만, 실제로 발휘되는 위력은 본래의 20%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위력을 100%로 사용하기 위해선 기프트에 걸린 락을 풀어야 했고, 그 전에 사용할 능력을 확정지어야 락을 풀었을 때 과부하가 걸려 기프트가 폭발하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프트-R0에는 다섯 가지 능력을 저장할 수 있으니까….’
가만히 생각하던 김서준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다섯 가지 능력을 정해 버렸다.
마력커버는 의무적으로 저장해야 했고, MPSP 능력도 쓸모가 많았으니 저장하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세 번째 능력으로 마력보조를 선택해야 했지만, 뜻하지 않은 기연으로 마력이 확 올랐으니 굳이 선택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럼…. 비행하고 마력측정, 거기다 새로 추가된 위기감지로 하는게 좋겠다.’
마력측정은 심안의 신비와 중복되는 면이 있어서 제외하려고 했지만, 심안을 사용하면 눈이 황금빛으로 변한다는 문제가 있어서 편하게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단일 대상이긴 해도 손쉽게 마력을 측정할 수 있는 마력측정 능력이 필요해졌다.
위기감지는 반경 20미터 내에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경우, 기프트가 이를 사전에 발견해 착용자에게 알려주는 능력이었다.
감지 반경이 좀 아쉽긴 해도, 신비를 이용해 은밀하게 접근해 오는 적을 빠르게 발견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에 이 또한 선택하기로 했다.
‘기프트 능력도 다 정했고…. 이제 남은 건 먹는 것 뿐이구나!’
김서준이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왔구나!’
음식이 도착했음을 직감한 김서준은 신나는 얼굴이 되어 빠른 걸음으로 문쪽으로 날듯이 달려나갔다.
***
다음날 아침.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김서준은 B6층에 위치한 포탈실에서 세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그곳엔 장범수 국장과 권윤성, 이채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자네 같이 훌륭한 요원과 함께 일하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군. 앞으로 잘 해보세나.”
장범수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김서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나와는 자주 보게 될 거다. 불편한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고.”
권윤성은 별다른 표정없이 김서준과 악수를 나눴다.
하지만 김서준은 안다.
담백한 표정과는 달리, 권윤성의 눈빛에 뭔가를 향한 강한 기대감이 가득 담겨있다는 것을.
“권 팀장님이 자주 연락하면 그게 더 불편해 질 것 같은데요?”
“하하하! 김서준 요원의 말이 맞구만. 시커먼 사내한테 자주 연락이 오면 나라도 불편하겠어.”
김서준의 대답에 장범수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러자 권윤성은 떨떠름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이채윤이 김서준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 정말 R-MPSP슈트는 필요 없어? 기프트 능력으로 MPSP를 선택했으면서 R-MPSP를 챙겨가지 않으면 네가 손해일텐데?”
이채윤은 좀 전에 김서준의 기프트-R0에 다섯 개의 능력을 저장하면서 락을 풀어주었다.
이제는 기프트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두번 다시 기프트에 담긴 능력을 변경할 수가 없게 된 것.
그런데, 김서준은 MPSP 능력을 선택해 놓고 그와 세트나 다름없는 R-MPSP슈트를 절대 받아가지 않겠다며 격렬하게 거부했다.
선택은 김서준의 몫이긴 했지만 R-MPSP슈트가 없으면 MPSP는 반쪽짜리 능력이었기에 이채윤은 깊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채윤은 물론, 이곳의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김서준에겐 MPSP로 마력이 잠기더라도 내공이 있어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김서준이 R-MPSP를 챙겨가지 않으려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갓난아이 우주복같이 생긴 쫄쫄이 슈트를 어떻게 입고 다니냐고!’
김서준은 이미 신태양이 그 슈트를 입은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고,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한지 눈으로 직접 확인까지 했다.
때문에 그걸 입은 자신의 모습은 정말 상상도 하기 싫었다.
“제가 성격상 슈트랑 잘 안맞아서요. 게다가 보시다시피 사슬낫이 팔을 칭칭 감고 있어서 슈트를 입으면 이걸 사용할 수가 없게 되잖아요.”
슈트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방법이 있는 핑계였지만, 이채윤은 더 이상 권하지 않기로 했다.
여자로서의 감이 이채윤에게 뭔가를 경고하고 있었다.
슈트를 강제로 입히려 했다간 김서준이 폭주하고 말 것이라는.
“그럼 이거라도 챙겨 가. 넘버 포에겐 매월 한 차례씩 이게 주어진다는 건 알고 있지?”
이채윤이 내민 건 푸른 빛의 마석이었다.
“그거야 당연히 받아가야죠. 다른 넘버링 요원들에 비해서 마력이 많이 부족하니 얼른 따라잡으려면 마석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김서준은 날름 마석을 챙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4일 뒤, 모든 넘버링 요원들이 이곳에 모인다는 건 알고 있지?”
“네. 그날은 단 한명도 빠짐없이 모여야 한다면서요? 신구 넘버링 요원이 서로 인사도 하고, 팀웍도 다질 겸 간단히 균열 탐사에 들어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맞아. 그때는 넘버 쓰리와 넘버 파이브도 다 참석하게 될 테니까 기대해도 좋을 거야.”
넘버 쓰리 배창훈.
그는 윤현도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마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다.
“제가 넘버 쓰리 요원하고 한판 붙어서 된통 깨지기를 바라는 표정이네요.”
“에이, 설마. 그럴리가. 아무튼 그날 늦지 않게 와. 넘버링 요원이 된 이상 본부를 오갈 때는 굳이 차량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 곳곳에 지부가 있으니까 가장 가까운 지부를 찾아가서 기프트만 보여주면 포탈을 이용할 수 있거든. 그럼 몇 초만에 이곳에 올 수 있을 거야.”
이채윤은 며칠 전 김서준과의 기싸움에서 한번 크게 당한 이후로는 가식 없이 대하려고 다분히 노력하고 있었다.
김서준도 그걸 알기에 편하게 대하는 중이었고.
“그날 저는 가면을 쓰고 올 겁니다. 최대한 모르는 척 해 주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걱정 마. 새로운 넘버 포 요원의 정체는 오직 장범수 국장님만 아시는 걸로 할 테니까.”
“그거 좋네요. 그런데, 그날 익스퍼트 요원은 함께 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만약 익스퍼트 요원도 같이 모여야 한다면 김서준 혼자 1인 2역을 해야하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 된다.
“원래는 함께 해야하지만, 이번엔 제외하기로 했어. 네 몸은 하난데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그 두 인물이 한자리에 서는 일은 가급적 발생하지 않게끔 잘 조치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할 거지만, 불가피하게 넘버 포와 익스퍼트 요원이 한 자리에 서야 할 일이 생길 수 있어. 그땐, 미리 네 양해를 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테니 걱정 마.”
“알겠습니다. 그럼 나흘 뒤에 뵙죠.”
“조심히 들어가.”
“잘 가게, 김서준 요원.”
“또 보자.”
김서준은 세 사람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바로 뒤를 돌아 허리 높이로 설치되어 있는 패널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패널 너머엔 반경 3미터 정도 크기의 금속 원판이 놓여 있었다.
‘저 원판 위로 포탈이 형성된다니…. 예거의 기술은 생각보다 훨씬 발전해 있구나.’
김서준은 며칠 전, 홈커밍 데이 때 넘버링 요원들이 공간을 찢고 등장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그날 공간이 찢기며 균열이 등장한 장소에도 이곳의 원판과 똑 같은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저 원판만 있으면 어디로든 포탈을 열고 이동할 수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김서준은 패널 위에 떠오른 문구를 보고 살짝 놀랐다.
>>이동을 원하는 장소를 선택하세요.
[국내] / [국외]
패널 화면엔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선택하라는 문구가 써 있었고, 그 아래로 두 가지 선택 버튼이 떠올라 있었다.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로도 이동이 가능하다고? 와…. 대박.’
김서준은 과연 이 포탈 기술이 예거에서만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인지가 궁금해 졌다.
하지만 굳이 다시 뒤를 돌아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채윤에게 또 말을 걸게되면 왠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으니까.
삥-
김서준은 국내 버튼을 눌렀고, 곧바로 화면이 바뀌더니 텍스트 입력창이 나타났다.
>>아래 창에 이동할 지역의 명칭을 입력해 주세요.
▶?
그 창에 서울을 입력한 순간, 세 곳의 위치가 떠올랐다.
[국립중앙박물관]/[코엑스]/[몬스터서점]
‘몬스터서점? 설마 내가 알고 있는 그 서점?’
몬스터서점은 제3 헌터 아카데미의 코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는 매우 작지만 쉽게 구하기 어려운 몬스터 관련 서적들을 다량 보유하고 있는 인기 만점의 특별한 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