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오후 12시 30분.
김서준은 증산역 3번 출구 앞에서 세 명의 예거 요원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원래는 김서준이 오후 1시까지 아카데미 앞의 몬스터서점으로 찾아가기로 했으나, 시간을 앞당겼고 만나는 장소도 이곳 증산역 바꾼 것이다.
그 이유는 박연중이 넘겨준 자료 속에서 발견한 ‘우나라 소나라’라는 음식점 때문이었다.
천간십이지의 거점으로 의심되는 27군데의 장소 중 ‘우나라 소나라’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김서준에게 깊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예거 캠프에 참여하기 얼마 전, 김서준은 우나라 소나라를 방문했었고 그곳에 7명이나 되는 각성자가 있다는 걸 알아냈었다.
당시엔 그 7명이 정부의 헌터 감찰조직인 유령의 요원이거나 각성했다는 사실을 정부에 숨기고 조용히 살아가는 누락자일 거라 생각했다.
김서준이 원래 살아가던 무림계 세상에서 친형처럼 가까운 사이였던 오창석이 일하는 음식점이어서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의 이름을 예거 자료에서 확인한 순간 자신의 생각이 너무 안일했음을 깨닫고 말았다.
무림계 세상에서 자신의 동료였고, 형이었다고 이쪽 헌터계 세상에서도 똑같이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박대만이나 김유라는 똑같이 악을 처단하는 정의의 편에 서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 있었고, 유호성은 어린 학생들이 신비를 각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학원 강사일을 하고 있었다.
한세아는 이제야 막 신비를 각성해 헌터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막내 최동현은 아카데미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중이었다.
김서준은 지금까지 만난 옛 동료들이 너무도 훌륭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오창석 또한 그들처럼 올바른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던 것.
최소 B급 이상의 마력을 지닌 각성자 7명이 정체를 숨긴채 음식점에서 평범한 모습으로 일을 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천간십이지의 조직원일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고도 남았다.
김서준은 우나라 소나라가 천간십이지의 거점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하지만 그 정보를 박연중 요원에게 알리진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김서준은 천간십이지라는 조직이 신교단처럼 악행만을 일삼는 범죄집단이 맞는지를 직접 확인하려는 것이다.
불과 1시간 전, 김서준은 집에서 천간십이지와 신교단의 정보를 살피며 여러가지를 비교해 봤다.
그리고 한가지 재밌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신교단에 대한 정보는 대체적으로 이러했다.
[2022년 6월 XX일. 신교단과 함께 균열 레이드에 투입된 헌터 16명 전원 실종.]
[2022년 8월 XX일. 신교단의 단원 XXX 헌터,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며 길가던 시민 살해.]
[2023년 2월 XX일. 헌터 형사국에서 국내 최대 마약 조직의 지부 일망타진. 조직원 중 일부, 신교단 단원으로 확인.]
[2026년. 7월 XX일. 헌터 경찰국과 신교단 단원 전면 충돌로 사상자 8명 발생.]
신교단의 정보 90% 이상이 악질적인 범죄와 연루되어 있었다.
하지만 천간십이지의 정보는 사뭇 달랐다.
[2027년. 3월 XX일. 균열 관리국 서버를 향한 치명적인 해킹 사태 발생. 범인은 천간십이지로 확인.]
[2028년. 10월 XX일. 균열 폐쇄를 주장하는 대규모 시위 사태 발생. 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천간십이지 조직원으로 확인.]
[2031년. 5월 XX일. 구로구 28번 균열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천간십이지가 침입. 이틀 만에 균열을 불법으로 폐쇄.]
[2032년. 7월 XX일. 블랙마켓에서 횡행하는 유물의 80%가 천간십이지에서 유포된 것으로 확인.]
이처럼 천간십이지의 범죄는 극악한 신교단의 범죄들과 그 틀 자체가 달랐다.
물론, 천간십이지 역시 국가가 정한 법을 어겼으니 범죄집단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지금껏 아무 의미없는 살생을 한 적은 없으며, 시민에게 불편을 줄 지언정 커다란 피해를 입힌 적은 무척이나 드물었다.
이런 점을 봤을 때, 천간십이지가 과연 신교단과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는 깊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김서준은 예거의 6호 지부 소속 요원들과 함께 우나라 소나라를 직접 방문하려는 것이다.
“여어, 하루만에 다시 보니 반갑구만!”
지하철 출구 쪽에 서 있던 김서준을 향해 승용차 한대가 멈춰섰다. 조수석에는 박연중이 타고 있었고, 그는 창문을 연 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운전을 하고 있는 사람은 20대 중후반의 사내였고, 뒷좌석에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타고 있었다.
김서준은 얼른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일단, 너무 죄송합니다. 제 임의대로 시간하고 장소를 변경해서요.”
“어머, 괜찮아요. 점심을 쏜다는데 이 정도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아, 맞다. 소개부터 해야겠네요. 전 주혜민이에요. 옆에 계신 인상 더러운 오빠는 이영호라고 하고요.”
여인 주혜민의 발랄한 자기 소개에 김서준은 피식 웃고 말았다.
“김서준입니다. 대 선배님들을 귀찮게 만들었으니 점심 거하게 쏘겠습니다.”
“역시 신세대라 그런지 말도 시원시원 하네요. 통도 크고. 그러니까…. 영호 오빠! 인상 좀 피면 안되요? 보는 내가 다 불편하네.”
주혜민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지만 이영호의 표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여기서 점심 먹고 첫번째 목표지점으로 옮기려면 시간 적인 손해가 얼마인지나 알아? 오늘 내로 상부의 명령을 완수해야 하는데, 이래서 언제 끝내겠냐고.”
이들이 상부에서 받은 명령은 어제 예거의 시스템에 해킹을 시도한 천간십이지 소속의 해커 헌터를 오늘 안으로 잡아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확인해야 할 거점이 너무 많아서 한시가 급한 상황.
그런데 한가롭게 이제 막 예거 요원이 된 까마득한 후배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최소 1시간 이상을 아깝게 날려버릴 판이라 이영호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절대 시간 낭비는 아닐 겁니다.”
김서준은 우나라 소나라에서 분명 해커의 정체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우나라 소나라에는 B급 각성자 6명에 A급 각성자 1명이 정체를 숨기고 있었고 그들의 무력 수준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면 평범한 길드에선 거의 메인으로 활동하는 대표급 레이드팀으로 봐도 무방했으니까.
“자자,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얼른 가서 배부터 채우자고. 배가 불러야 뭘 해도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이영호. 넌 그놈의 인상 좀 펴라. 김서준 학생은 우리 팀도 아니데, 뭘 벌써부터 선배 행세를 하려고 그래?’
“아니, 지부장님. 제가 무슨 선배 행세를 했다고….”
“가요, 가. 그놈의 성질은 언제 누그러지려나 몰라. 서준 학생, 얼른 안내해 봐요. 뭐라도 먹으면 영호 오빠 얼굴도 펴질테니까.”
주혜민이 이영호의 옆구리를 마구 꼬집으며 운전이나 하라고 눈짓을 해 보였다. 이에 김서준은 방향을 알려주며 요원들을 어딘가로 안내했다.
우나라 소나라는 증산역 지하철역에서 무척이나 가깝다.
도보로 10분 거리밖에 되지 않아 차 안에서 몇마디 주고받다보니 금방 음식점 앞이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일행들은 여전히 수다를 떨며 차에서 내렸다.
김서준은 그들의 말에 관심을 두는 척 하며 몰래 기프트의 마력측정 능력을 사용해 봤다.
‘박 요원님이 317이고, 이 요원님은 323, 주 요원님은 311이라…. 기프트를 찬 상태니까 기본적으로 마력커버로 30%가 깎인 상태겠지?’
마력커버를 30%로 셋팅해 놨다고 가정했을 때는 셋 모두 마력 450좌우의 A급 정상이라는 얘기고, 50%라고 치면 600이 넘는 S급이라는 소리다.
‘설마 셋 모두 S급이겠어?’
만약 S급이었다면 지금처럼 지원 요원이 아니라 넘버링 요원이 되었을 테니까.
물론 A급만 되도 상당한 실력자라 봐야했고, 이들이 다른 길드에 들어갔다면 엄청난 대우를 받으며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예거에 들어와 일개 지원 요원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공익을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는 걸 의미했다.
‘그럼 어디, 천간십이지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한번 지켜봐 볼까나?’
김서준은 다시 오창석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우나라 소나라의 정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
“어이, 신입. 지금 뭐하는 짓이야?”
이영호가 김서준을 향해 인상을 구겼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음식점에 따라들어왔다가 이 곳의 이름이 ‘우나라 소나라’인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런 반응은 박연중이나 주혜민도 비슷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들어온 건가?”
“지부장님이 준 자료 제대로 안 본거야?”
식탁에 앉자마자 요원 셋이 김서준에게 따지고 들었다.
“일단 주문부터 하시죠.”
“지금 우리가 여기서 한가로이 밥을 먹을 때가 아니….”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영호의 말을 끊으며 발랄한 여 종업원이 다가왔다.
“점심특선으로 제일 잘 나가는 거 4인분이요.”
김서준은 아무렇지 않게 주문을 해 버렸고, 여 종업원은 상냥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돌아갔다.
“김서준. 우린 네 장난에 놀아줄 생각이 없다.”
이영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하지만 진지한 건 김서준도 마찬가지.
“여긴 제가 오래 전부터 단골로 드나들던 곳이라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이곳이 천간십이지의 거점 같은 곳일 리가 없어요. 그래서 직접 확인시켜 드릴려고 모시고 왔습니다.”
물론 이건 거짓말이다.
김서준은 이곳이 천간십이지의 거점일 확률이 거의 99%에 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말도 안되는 변명을 했다.
마치 자신의 판단이 맞다는 걸 알리고 싶어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초짜 신입 요원인양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헛소리야!”
“서준 학생.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적어도 여길 오려는 이유 정도는 미리 말해 줬어야지.”
이영호와 주혜민이 모두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걸 알았는지 당황한 표정을 짓는 김서준.
“모두 진정해. 아직 확인된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괜히 이상한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식사만 하고 떠나는 걸로 하지. 주문까지 한 마당에 그냥 나가버리면 오히려 이상히 여길 거다.”
박연중이 중재안을 내 놓았고, 두 요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주문한 식사가 나왔고 요원들은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평범하게 대화하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많이 겪어봐서 그런지, 대처가 엄청 빠르네?’
김서준이 보기에 이들 세 요원의 행동 전환은 무척이나 빠르고 정확했다.
좀 전까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온함 속에 숨겨진 긴장감이 얼마나 큰지 김서준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행동을 집중해서 바라보니 더욱 확실해 지는 느낌.
그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김서준의 눈에 보여선 안되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 요원의 몸 주변으로 아주 미세하지만 아지랑이 같은 기운들이 피어올라 이곳 저곳으로 흘러들어가는 광경이 마치 적외선을 감지하듯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었다.
그 흐름은 다름아닌 요원들이 지닌 마력의 움직임이었다.
‘이건 또 뭐야?’
김서준도 깜짝 놀랐다.
이영호의 기운은 식탁 위에 올려놓은 자동차 키로 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 키에서 뿜어진 묘한 기운들이 일행이 앉은 식탁 주변을 돔 모양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김서준은 그 기운이 일종의 보호막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이상한 현상은 이영호에게서만 보이는게 아니었다.
주혜민의 몸에서도 아지랑이가 피어 올랐으며, 그녀의 기운은 꽤나 특이하게 생긴 왼손의 새끼 손톱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런데 주혜민이 물잔이며 그릇 등을 감싸 쥐면서 손톱으로 톡톡 두드릴 때마다 투명한 기운이 마치 동심원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게 보였다.
주혜민의 눈동자 또한 그 파동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김서준은 주혜민의 손톱이 음식이나 사물에 인체에 유해한 물질이 담겨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절로 깨달아 버렸다.
박연중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기운은 손목에 찬 기프트로 흘러들어갔고, 기프트에서는 푸른 물결이 뿜어져 나와 주변 사람들을 한명 한명씩 훑고 지나갔다.
이 현상은 분명 박연중이 마력을 써서 기프트의 마력측정 능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마력의 흐름이 보이는 건데?’
어제까지만 해도 마력의 흐름을 눈으로 보게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게 왜 보일까?
김서준이 그런 의문을 지니며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방금 전까지 보이던 마력의 움직임이 씻은듯이 사라져 버렸다.
‘계속 보이는 건 아닌가?’
김서준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마력의 흐름을 보고자 정신을 집중해봤다. 순간,
스으으으으
또 다시 시야 위로 마력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다.
‘역시 정신을 집중해야 보이는 거구나.’
이 신기한 능력의 사용법을 알게된 김서준은 이것도 스킬의 하나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네. 분명 저 사람들 마력을 지닌 각성자가 맞는데, 박 요원님은 왜 알아보질 못하고 있지?’
박연중 요원은 기프트의 마력측정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다른 각성자들은 전혀 발견해 내지 못한듯했다.
김서준은 이상하다는 생각에 자신의 기프트로 마력측정을 사용해 봤다.
지잉-
정신을 집중해서 보니 자신의 기프트에서 마력 파장이 뻗어나가는 것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김서준의 목표는 카운터에서 계산 중인 여자 점원이었다.
[1]
기프트에 표시된 점원의 마력은 고작 1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김서준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점원을 바라봤다.
그녀의 심장 잔뜩 뭉쳐져 있는 푸른 빛의 기운이 흐릿하게나마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B급 이상의 각성자라는 뜻인데, 기프트는 이걸 읽어내질 못하고 있었다.
김서준은 바로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들도 예거의 기프트처럼 마력을 숨기는 장치가 있거나, 그와 관련된 신비 능력을 지닌 자가 있다는 거겠지.’
김서준은 기프트에 담긴 기술을 오직 예거만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리기로 했다.
‘굳이 남들 시선 피한다고 화장실 가서 심안을 발동시킬 필요도 없겠네.’
김서준은 자연스러움을 가장하여 가게 안을 쭈욱 훑으며 마력을 지닌 각성자들이 몇이나 되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야? 각성자가 왜 이렇게 많아?’
이 가게 안에는 점원 3명과 10명이 넘는 손님이 있었는데, 어이가 없게도 단 두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심장에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푸른 빛을 띠는 B급 수준의 각성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