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10분이면 충분하겠지.’
김서준은 방을 나서며 이영호 등이 제대로 소란을 일으켜 주길 기대했다.
방금 결박에서 풀려났을 때, 김서준은 내공을 날카롭게 가공하여 이영호의 손을 묶고 있는 밧줄을 은밀하게 끊어 주었다.
이영호의 위치가 기둥 뒤쪽이었기에 아무도 모르게 밧줄을 끊기주기에 가장 적당했다.
그리고 무림계 지구에서 사용하던 전음성의 원리를 이용해 몇 미터 떨어진 이영호의 고막을 내공으로 진동시킴으로써 몇 마디 말을 전달했다.
‘절 믿고, 정확히 10분이 지났을 때 탈출을 시작하세요.’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이영호는 알아들었는지 기둥 뒤에서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거렸다.
김서준은 자신의 말을 이영호가 알아들었음을 확인하자 안심하고 양상익의 뒤를 따를 수 있었다.
철문 밖은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평범한 복도였다.
방금 전의 방만 음습하고 어두울 뿐, 다른 곳은 매우 깔끔해 보였다. 김서준은 눈동자만 움직여 이곳의 구조를 빠르게 파악했다.
슬쩍 마력을 움직여 본 결과, 방을 나선 직후부터는 마력 사용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굳이 내공을 쓰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이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서준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날 시험하려 들다니. 날 너무 우습게 봤는데?’
겉으로 보기엔 양상익과 두 명의 사내만 김서준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달랐다.
김서준이 이미 파악해 둔 정체불명의 각성자들이 복도 좌우에 있는 방 안에서 언제든 뛰쳐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약 김서준이 조금이라도 이상 행동을 보인다면 10명이 넘는 각성자들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시작하리라.
이들은 지금 김서준이 대화할 수 있는 상대인지, 그럴 필요가 없는 상대인지를 가늠하려는 것이다.
잠시 복도를 걷고 있던 양상익.
그는 어느 한 방 앞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 김서준을 바라봤다.
“부주께서 관심을 가지고 대화할 생각을 하실만 하군. 안에 들어가도 좋네.”
양상익이 방문을 열어 들어가라며 손을 내밀었다.
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선 김서준.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딱 두 개의 의자가 마주보며 놓여 있었고, 반대쪽 벽에 또 다른 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의자에 앉아 잠시만 기다리게.”
양상익은 그 말만 남기고는 방문을 닫아버렸다.
20평은 되어보이는 큼직한 방에 두 개의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으니 왠지모르게 서늘함이 느껴졌다.
김서준은 중앙으로 걸어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반대편 문을 바라봤다.
그 문을 통해서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인물이 등장할 거라는 건 불보듯 뻔했다.
그렇게 1분여가 흘렀을 때였다.
벌컥
예상대로 문이 열렸고 정장 차림의 한 사내가 느릿느릿 걸어들어왔다.
그는 키가 작았다.
대략 165정도의 키였으며, 얼굴엔 마스크와 썬글래스를 착용해 용모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김서준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창석이 형!’
김서준이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들에게 잡혀준 목적이 드디어 완수되는 순간이었다.
사내, 오창석은 김서준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점잖게 다리를 꼬으며 상체를 뒤로 살짝 젖혔다.
“반갑군, 김서준 학생.”
오창석은 김서준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묘한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걸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도 반갑네요, 오창석 씨.”
김서준이 자신의 이름을 단번에 알아내자 오창석은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걸 바로 드러낼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오창석은 누구지?”
“누구긴요. 앞에 계신 신사분이죠. 그런데 나만 콕 집어서 불러냈다는 건, 이미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뜻 아닌가요? 그럼 내가 왜 사람들을 데리고 여길 왔는지도 알고 있을텐데요. 굳이 모른척 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김서준의 말은 매우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들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리고 함께 온 사람들이 예거의 요원이라는 사실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역시, 예거의 생도들은 보통이 아닌 녀석들로만 선별되나 보군. 그러니 그 지랄맞은 신교단의 첩자들을 생도들이 처리할 수 있었겠지.”
오창석은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예거에 신교단의 첩자가 침투했다는 사실은 철저히 숨겨진 것으로 아는데, 천간십이지가 그걸 알고 있으니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오래 전부터 감시해 왔나 봅니다? 별걸 다 아네요.”
“더 많은 걸 알아내려고 공들여 해킹까지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했지. 다른 방법이 없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네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고.”
권윤성의 말대로 예거 시스템을 해킹한 건 천간십이지가 맞았다.
그런데 신교단 첩자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으면서 무얼 더 알아내려고 해킹을 시도한 걸까?
김서준은 그걸 알아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내가 여기로 올 걸 예상이라도 한 것 같은 말이네요.”
“그건 아니야. 너에 대한 건 조금 전에 알아냈다. 우린 그저 예거 지부의 요원들을 감시했을 뿐인데, 네가 얻어 걸린 거지.”
그 말은 처음부터 김서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건 아니라는 뜻.
김서준은 길지 않은 시간에 자신이 예거의 생도였다는 사실을 밝혀낸 천간십이지의 정보력에 살짝 감탄했다.
“저에 대한 정보도 그 해커 능력자가 찾아낸 모양이군요?”
이번엔 오창석의 눈썹이 꿈틀했다.
“우리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고 있군. 처음 가게에 온 것도 염탐이 목적이었겠어. 가족까지 임무에 이용하다니…. 나이는 어려도 할 건 한다 이건가?”
“저도 해커 능력자에 대한 건 방금 알아낸 겁니다. 그리고 처음 여기에 왔을 땐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그럼 왜 또 이곳에 와서 날 찾았지?”
오창석은 은연 중에 자신이 오창석이 맞다는 걸 인정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도 음식점 알바를 하고 있는게 좀 안타까워서요. 훌륭한 일타 강사 소개시켜 줘서 나라에 도움 되는 일을 하게 하려고 했죠.”
“재밌군. 내가 뛰어난 능력이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제 눈에는 다 보이니까요.”
김서준은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어 보였다.
그러자 오창석은 가벼운 웃음 소리를 흘리더니 썬글래스와 마스크를 모두 벗어버렸다.
“다 보인다고 하니 이런 거추장 스러운 건 필요가 없겠어.”
오창석이 못생긴 얼굴을 드러내자 김서준의 표정은 더욱 밝아졌다.
오랜만에 친형처럼 따르던 오창석의 얼굴을 코앞에서 보게되니 무척이나 반가웠던 것.
그런 사실을 모르는 오창석은 김서준의 반응이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혹시 우리가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던가?”
오창석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김서준의 표정엔 반가움이 너무 가득했으니까.
“글쎄요. 현생에 알던 사이가 아니라면, 전생에 인연이 있었겠죠.”
“하…. 내가 괜한 질문을 했군. 그건 됐고, 이제부턴 좀 더 진지하게 대화를 해보도록 하지.”
“전 처음부터 진지했습니다만?”
김서준은 오창석의 반응을 즐겁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상황으로 보건데, 오창석은 천간십이지에서 꽤나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천간십이지의 거점에서 가장 높은 인물로 생각되는 양상익이 오창석의 지시에 따르고 있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최소 한 거점의 우두머리이거나, 천간십이지의 십이신장 중 한명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창석은 이 자리에서 천간십이지를 대표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난 농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헛소린 그만두고 내 질문에 제대로된 대답이나 하도록.”
“저도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는 별로라서요. 그래도 뭐, 일단 질문이 뭔지나 들어보죠.”
“후…. 좋다. 그럼 잘듣고 판단해라. 네가 예거의 07기 생도라면 이번 기수에 신교단의 첩자가 숨어 있었다는 것도 잘 알겠지?”
오창석은 계속해서 신교단과 관련된 내용만 언급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천간십이지와 신교단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알죠. 한달 가까이 같이 훈련을 받았으니까요.”
“그럼 같은 생도로 함께 생활하던 동기 중에 신교단의 첩자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지? 그걸 알아낸 생도는 또 누구고?”
질문이 좀 이상했다.
천간십이지에서 왜 이런 걸 궁금해 하는 걸까?
보통은 첩자가 누구였냐고 묻던가, 그 첩자는 어떻게 됐냐고 묻기 마련.
그런데 첩자를 알아낸 방법과 그걸 해낸 생도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다.
“일단 대답부터 하자면, 한 생도가 그들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 채서 함정을 팠고 멍청한 놈들이 그 함정에 제 발로 빠진겁니다.”
“그 생도가 누구냐니까?”
“그건…. 그런데 제가 왜 그것까지 말해야 하죠?”
“왜냐고? 지부의 요원들이 무사히 돌아가길 원한다면 답을 줘야 하니까.”
오창석은 6호 지부의 요원들의 안전을 놓고 협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서준은 이게 허풍이라는 걸 잘 안다.
천간십이지는 처음부터 요원들을 해칠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걸 김서준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우리 이렇게 하죠. 서로 하나씩 주고 받는 걸로. 한쪽만 이득을 보는 건 협력관계라 볼 수 없지 않습니까?”
“협력관계? 예거와 천간십이지 사이에 그런 관계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나?”
“물론이죠. 전에는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없었지만, 이제는 있으니까요.”
“그게 누구지?”
오창석의 질문에 김서준은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뭐?”
오창석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김서준의 표정에서 진지함을 읽은 그는 곧 태도를 달리했다.
“네가 예거를 대표할 수 있다 이거냐?”
“적어도 제 말이 무시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네 녀석…. 넘버링이냐?”
“그건 아니지만, 그 정도 자격은 갖고 있죠.”
김서준은 일단 넘버링 요원이 아니라고 잡아뗐다. 이들이 설사 예거 시스템을 해킹한다고 해도 넘버 포에 대한 정보는 절대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지금 이곳엔 예거도 경계하는 해커 능력자가 있지. 그를 통해 정보를 파기 시작하면 새로운 넘버링 요원 명단을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게 아니다.”
“그럼 저에 대해 정보를 더 캐보시던가요.”
너무도 자신있게 대꾸하는 모습에 오창석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뭐, 좋아. 일단 믿어주기로 하지. 네가 제안한 일문일답,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럼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혹시 천간십이지에 신교단의 첩자가 숨어든 겁니까?”
난데없는 질문.
그런데 오창석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렇다는 건 김서준의 질문이 허를 찔렀다는 것.
“그걸 어떻게 알았지?”
오창석은 김서준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함과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예거 생도에 숨어든 첩자를 어떻게 밝혀냈는지, 그리고 그걸 밝힌 생도가 누군지 알아내려고 해킹을 시도한 거 맞죠?”
“….”
점점 가관이다.
오창석은 자신이 딱히 실수한게 없는데도 김서준이 사실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것에 솔직히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 생도가 누군지 알아내서 천간십이지에 숨어든 첩자도 찾아내 달라고 부탁하려는 거잖아요. 현재 천간십이지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고요. 아닌가요?”
“네가 두 번 연속 질문을 던졌으니 나도 두 번 질문을 하겠다. 예거에서 첩자를 찾아낸 생도가 너였나? 그리고 어제 있었던 해킹 사건으로 천간십이지가 위험에 처한 걸 파악하고 일부러 우리 앞에 나타난 거고?”
두 사람의 머리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둘 다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히 하고있지 않았지만, 서로가 알고 있었다.
역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것을.
“이제보니 이곳은 평범한 거점이 아니라 천간십이지의 임시본부와 다름 없는 곳이었군요?”
“넌 처음부터 기절한게 아니었어.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사로잡혀 준거지. 그렇지 않나?”
“어쩌면 당신은 십이신장 정도가 아니라…. 천간부주일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천간부주가 거의 확실한 것 같네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게다가 넌 이 방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으며, 그 누구도 우리 둘 사이의 대화를 엿들을 수 없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군. 그래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고. 맞지?”
질문으로만 가득한 대화.
답은 없어도 두 사람의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몇 차례의 질문이 더 오고 갔을 때, 김서준이 질문의 종지부를 찍는 말을 꺼냈다.
“천간십이지도 예거와 적대관계가 되는 건 바라지 않겠죠? 그럼 이젠 서로 진심을 가지고 협력하는 길을 택해야 할 때입니다. 적은 신교단 하나가 아니니까요.”
“적은 신교단 하나가 아니다? 놈들보다 더한 적이 있다 이거냐?”
김서준은 천간십이지에서도 아직 문라이트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다는 걸 간파했다.
천간십이지의 관심은 오직 신교단에만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있죠. 그보다 몇 배는 더 악독하고, 잔인한 놈들이.”
김서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시간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는 옷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하는 거냐?”
“이제 갈 시간이라서요. 그리고….”
김서준이 돌연 벽을 향해 손을 한 차례 확 뿌렸다. 그러자,
콰광!
벽에 구멍이 뻥 뚫리더니 바로 옆방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그곳엔 한 젊은 여자가 해드폰을 끼고 수많은 모니터들 앞에 앉아 있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며칠 후에 저 분을 통해 연락할 테니까 기다리세요. 그땐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윈윈할 수 있도록 합시다.”
김서준은 오창석을 향해 다시 환한 웃음을 그려보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꽝!
밖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리더니,
“놈들이 탈출했다!”
“놈들을 잡아!”
“뭐가 어떻게 된거야?”
각성자들의 외침이 터져나오며, 무척이나 소란스러워졌다.
이에 오창석은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 소란이 골방에 가둬놓은 세 명의 예거 요원이 탈출하면서 벌어진 것임을 금방 알았기 때문.
그런 오창석을 향해 김서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서로 안면을 튼 기념으로 한 가지만 알려드리죠. 가장 큰 적은 항상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는 거.”
그 말을 하고 있는 김서준의 눈은 어느샌가 짙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