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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우웅
미니 차를 몰고 가는 이채윤.
그 옆의 김서준은 계속 이채윤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니? 뭘 그렇게 쳐다봐?”
“알고 있었죠?”
“뭘?”
“내가 이채하 씨를 이미 만났다는 거.”
김서준의 말에 이채윤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알고 있지. 채하가 그러던데? 제3 아카데미에 아주 걸출한 녀석이 등장했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절 의심했던 겁니까?”
“그거 아니? 채하가 한세아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저주의 펜던트라는 사실을 알게되는데 걸린 시간이 거의 3년이야. 그런데, 넌 단 하루만에, 아니지. 단 몇 시간만에 그걸 찾아냈잖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예상대로 이채윤은 김서준과 한세아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운이 좀 좋았을 뿐인데, 그걸 그렇게 생각합니까? 와, 그거 의심병 아니에요? 너무 심각하신데요?”
“의심병이든 뭐든 상관없어. 그 덕분에 내가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으니까.”
이채윤은 자신의 의심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럼 한씨 가문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아세요?”
김서준의 물음에 이채윤이 흠칫 놀랐다.
“너…. 벌써 거기까지 파악했니?”
“아까 말했잖아요. 제가 운이 좀 좋은 편이라고요. 저도 그 운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겁니다만.”
“하하…. 따라쟁이.”
김서준이 자신의 말을 흉내내자 이채윤이 소리내어 웃었다.
“아무튼요. 그쪽 사람들…. 그냥 내버려 둘 겁니까?”
“지금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게 없어. 너도 이젠 알거 아니야? 성령의 한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거.”
“알죠. 아는데….”
김서준은 말 끝을 얼버무렸다.
사실 김서준이 한씨 가문의 일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한세아 때문이었다.
그녀가 또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생명에 위협을 받는 일이 없도록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워낙 컸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은 예거가 끼어들 수 없어. 상황을 지켜보다가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그때 나서도 늦진 않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네 코드네임은 백호다. 넘버 포로 활동할 때에는 반드시 백호라는 이름을 써야 해.”
“백호….요? 뭔 이름이 그리 구려요?”
“구려? 지금 그말 장범수 국장님께 그대로 전해드려도 되는 거지?”
이채윤이 흘겨보며 한 말에 김서준이 앗 하며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이름, 국장님이 붙여준 겁니까?”
“예거를 상징하는 동물이 백호라면서 1초의 고민도 없이 그 이름을 붙여주던데?”
“하아…. 센스 정말 끝내주네요.”
“지금 이름 따질 때가 아니야. 오늘 훈련의 목적은 바로 코드네임 백호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거라고.”
“뭘 어떻게 테스트 하는데요?”
자신을 테스트한다는 말에 김서준도 큰 관심을 보였고, 이채윤은 권윤성이 했던 말과 거의 똑 같은 내용으로 설명해 주었다.
“….와. 너무들 하신다. 네 명이서 열 여섯 명을 상대하라는 말이잖아요?”
“넷이 아니라 둘이 될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같은 팀에 있는 권윤성 선배는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테고, 조미진도 절대 협조적이지 않을 거거든.”
이채윤의 말은 김서준도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갑자기 낙하산 처럼 등장한 넘버 포를 권윤성이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이후 넘버링 요원들을 통솔하기가 어려워질게 뻔했다.
그리고 조미진은 기존의 넘버 포인 윤현도를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인물이라 백호에게 절대 협조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네가 가장 다루기 쉬울만한 민소라를 팀원으로 넣어 준거라고.”
“민소라 한명 데리고 예거 특수 요원 16명의 집중적인 방해를 넘어서 레이드를 성공시켜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이 안되는 걸 해내는 최강의 존재. 넘버 포는 바로 그런 사내여야 하니까.”
말을 하는 이채윤의 표정에서는 기대감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그만큼 넘버 포라는 자리가 갖는 무게는 가볍지가 않았다.
잠시 이채윤의 말을 곱씹던 김서준.
그가 이채윤을 돌아보며 한마디 꺼냈다.
“까짓거, 한번 해 보죠 뭐.”
“실패하면 넘버 포로서의 권위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거야.”
“각오 하겠습니다.”
“그럼, 좋아. 행운을 빌겠다.”
차는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 있었다.
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김서준은 바로 이채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가세요. 선배님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저도 그곳에 도착해 있겠습니다.”
“알았다. 신분이 들어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거 잊지말고.”
“걱정 마시죠.”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김서준은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바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완전히 닫힌 순간, 김서준은 바로 염동장막을 사용해 엘리베이터 내에 설치된 CCTV의 회로를 절단해 버렸다.
아무 움직임도 없이 염동장막을 사용한 거라, 김서준이 회로를 망가뜨렸다는 흔적은 전혀 남지 않았다.
김서준은 CCTV를 먹통으로 만들자마자, 미리 준비해온 옷으로 빠르게 갈아입은 뒤 클로킹 마스크를 얼굴에 썼다.
스르르륵
엘리베이터 안에서 김서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바로 열림 버튼을 눌러 문을 연 김서준은 이미 저 멀리 차를 몰고 가는 이채윤을 확인했다.
‘이럴 땐, 비뢰신보가 딱이지.’
내공을 슬쩍 끌어올린 김서준은 신비로서의 비뢰신보가 아닌, 무공으로서 비뢰신보를 펼쳐내기 시작했다.
스으읏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그 바람은 순식간에 이채윤이 운전하는 미니 차를 따라붙었고, 곧 차의 지붕 위에 안착했다.
이채윤은 은은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손으로 곱게 정리하며 동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빠르게 차를 몰아갔다.
***
이채윤이 도착했을 때, 예거 요원들은 팀 배정까지 모두 끝낸 상태였다.
“준비 끝났으면 바로 시작해 볼까요?”
이채윤은 자신이 어느 팀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바로 2번 팀에 합류했다. 그때, 장훈이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한마디 했다.
“새로운 넘버 포께서는 아직 안왔는데요?”
“곧 도착할거야.”
이채윤이 대답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미 와 있습니다만.”
균열에 진입하기 위한 임시 엘리베이터 뒤쪽에서 낯선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한 사내가 느릿느릿 모습을 드러냈다.
190이 조금 안되는 훤칠한 키에 오랜기간 몸을 단련해 온듯 탄탄해 보이는 체격.
회색빛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는 사내는 얼굴에 특이하게 생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마스크는 빙그레 웃고 있는 여우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흰색 바탕에 붉은색으로 그려진 온갖 문양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백호라고 불러주면 됩니다.”
여우 가면의 사내가 자신을 백호라고 소개하며 요원들 쪽으로 다가섰다.
그걸 본 장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름이 백호라면서 웬 여우가면?”
장호의 말에 몇몇 신입 예거들이 킥 하고 웃음을 흘렸다.
여우 가면을 쓴 사내가 나타나자 배창훈과 차준혁의 눈빛이 변했다. 그때 조미진이 기프트를 만지작 거리더니 차준혁 쪽으로 슥 다가가며 조용히 말했다.
“마력수치는 528. 나쁘진 않은데?”
조미진과 차준혁은 26살의 동갑내기라 꽤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마력커버 비율을 30%로 적용한건가?”
“아무래도 그렇겠지? 50% 적용이면 본래 마력이 천을 넘는다는 건데, 그건 말이 안되잖아.”
“30%라 쳐도 750은 되니까 절대 약한 녀석은 아니야.”
“그래도 너나 창훈 오빠한테는 안되지. 내가 볼 땐 훈이 녀석한테도 마력으론 후달릴 것 같은데?”
넘버링 요원들끼리는 정확히는 아니어도 대략적인 실제 마력수치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조미진은 여우 가면의 사내가 잘 쳐줘야 장훈 정도라고 판단했다.
“글쎄…. 각성자들의 강함은 마력만으로 결정되는건 아니라서.”
“오, 우리 준혁이 새로운 넘버 포한테 쫄았어?”
“너도 눈이 있으면 좀 봐라. 저 사람은 딱 봐도 신비나 마력만 믿고 설치는 부류가 아니야. 풍기는 기운도 그렇고.”
차준혁이 한차례 훈계를 하자 조미진의 표정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그녀는 마치 이를 갈 듯 까드득 소리를 내며 주먹까지 불끈 쥐었다.
“기운이고 뭐고 다 필요없어. 우리 현도 오빠 자리를 탐하는 놈은 내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조미진의 격한 반응에 차준혁은 긴 한숨을 내쉬기만 했다.
두 사람이 그러는 사이 여우 가면의 사내는 요원들과 간단히 인사를 마쳤다.
백호의 등장에 새내기 요원들은 자기들끼리 수근거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젊은 것 같군.’
‘그러게. 많아봐야 20대 중반? 목소리만 들어보면 우리랑 몇 살 차이도 안날 거 같아.’
‘생도 훈련도 안 거치고 바로 넘버 포 자리를 차지했다라…. 얼마나 대단하길래?’
‘기프트로 528 나오는 거 보니 마력이 최소 750은 넘는다는 거잖아? 와, 엄청나구만.’
‘어디어디? 나도 좀 보여줘봐!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기프트에 마력측정 능력을 저장해 놓는 건데.’
그들의 대화는 고스란히 다른 요원들의 귀에도 들리고 있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권윤성이 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팀 편성은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숙지하시고 균열 레이드에 참여해 주면 됩니다.”
끄덕
백호는 별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권윤성 옆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럼 바로 실전 훈련에 돌입하겠습니다. 1번 팀부터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시죠.”
이어지는 권윤성의 말에 1번 팀에 속한 요원들이 임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번 팀에는 배창훈, 지학선, 이리나, 그리고 박해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이이잉
엘리베이터는 느릿 느릿 40여 미터 상공의 균열 앞까지 올라가 멈춰섰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1번 팀 전원이 균열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음은 2번 팀.”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오는 동안 2번 팀에 속한 이채윤이 서둘러 장비가 담긴 가방을 챙겨 아공간 속에 집어 넣었다.
이번 훈련은 3일로 일정이 잡힌만큼 필요한 도구와 장비가 꽤 많았다.
하지만 아공간 장비가 있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들 자신의 전용 무기에 생존장비까지 모두 가지고 나온 터라 한 사람이 챙겨온 장비의 총 무게는 거의 50킬로미터 이상이었다.
2번 팀에는 이채윤과 차준혁을 필두로 안지운, 최철민이 속해 있었다.
그들 또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균열 속으로 진입했다.
세 번째로 3번 팀이 움직였는데, 이 팀에는 박대만, 장호, 신태양과 인원수를 맞추기 위해 참석한 박문호 교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가면을 쓴 백호를 응시하다가 균열에 진입했다.
이어서 백호가 소속된 4번 팀이 움직였다.
권윤성은 팀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균열 높이까지 올라가는 동안 짧게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다.
“우리 팀의 목적은 3일 안에 다른 팀보다 빠르게 레이드를 성공시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팀이 어떤 방해를 해 오더라도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윤성 오빠. 이번 훈련에선 전투에 돌입했을 때 어느 정도 수준까지 허용된다고 했더라?”
“죽지 않을 정도면 뭐든지 가능하지.”
권윤성이 대수롭지 않게 한 대답에 같은 4팀에 속한 민소라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 선배님들. 방금 그거 농담이죠? 죽지만 않으면 되는 전투 훈련이라니요?”
“어머, 우리 후배님 겁먹었구나? 이제 어엿한 예거 요원인데 이 정도에 겁먹으면 안되지. 그리고 걱정마렴. 우리 팀에는 넘버 포가 있잖니. 넘버 포가 되려면 같은 예거 요원 서 너명은 가볍게 상대하고도 남아야 하거든. 그러니까 아~무 걱정할 거 없단다. 안그래요, 백호 씨?”
조미진의 마지막 질문은 백호를 향한 것이었다.
도발하듯 당돌한 눈빛으로 백호를 빤히 바라보는 조미진.
그녀의 얼굴엔 능력이 부족하면 절대 넘버 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려 있었다.
“팀원 모두가 내 지시에 따라준다면 원하는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모두? 지금 모두라고 했어요?”
조미진은 백호를 올려다보며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요, 백호 씨. 여기에 이렇게 넘버 원이 계신데, 모두라는 말이 어떻게 나오죠? 내가 넘버 포니까 알아서 기어라, 뭐 이런 건가요?”
“그럼 넘버 원께서 팀을 캐어해 주면 되는 겁니다.”
“지금 장난해요?”
“….”
백호는 말을 아꼈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왜 대답이 없어요? 저랑 장난하시냐고 묻잖아요?”
재차 질문을 던졌지만 백호는 아예 시선까지 돌려버렸다.
발끈한 조미진이 뭐라 한다미 더 하려고 할 때,
띵
엘리베이터가 균열 앞에 도착했다.
“쓸데없는데 힘 쓰지 말고, 네 역할에 충실해라, 조미진.”
“윤성 오빠는 화도 안나요? 근본도 모를 녀석이 넘버 포 자리를 차지한 것도 모자라 넘버 원인 오빠까지 무시하는데?”
“백호 요원은 날 무시한적 없다. 그러니 이제 그만 균열에 들어가자.”
“윤성 오빠!”
조미진이 답답해 하며 언성을 높인 순간, 권윤성이 조미진의 팔을 잡고 균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저 언니 성격이 좀 칼칼하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민소라는 어색한 웃음을 그리며 뒤따라 균열에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백호.
그는 한숨을 푹 내쉬다가 천천히 균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넘버링 요원들의 마음 속에 넘버 포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렇게나 크구나.’
백호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김서준은 조미진의 과격한 반응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더불어 과거의 넘버 포 윤현도가 얼마나 강한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그를 향한 동경의 마음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이름뿐인 넘버 포가 되고 말겠어.’
그렇다고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김서준의 머릿속에는 넘버링 요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수만가지 방법이 존재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