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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이잉. 위이잉.
미궁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지학선은 기프트를 이용해 백호 팀의 위치를 수시로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팀인 이리나와 3번 팀의 박문호가 근처에 도달한 시점에 4번 팀의 신호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뭔가 잘못됐어.’
지학선은 가장 나이가 많은 넘버링 요원이면서, 가장 경험이 많은 베테랑 요원이기도 했다.
그의 동물적인 감각이 계속해서 경고음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지학선은 자신의 신비인 벙커존을 발동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벙커존.
이 신비는 공격용이 아니라 철저한 방어형 능력으로 자신을 포함한 동료 세 명의 몸 주변에 반경 1미터 크기의 돔 형태의 보호막을 설치할 수 있었다.
이 보호막은 지학선이 사용한 마력의 두 배를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는데, 아직까진 이 보호막을 힘으로 뚫은 인물은 윤현도 한 명 뿐이었다.
‘일단 내 마력의 50%로 보호막부터 설치를….”
지학선이 신비를 발동시키려는 그때였다.
갑자기 목덜미 쪽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희뿌연 연기가 온몸을 꽉 옥죄기 시작했다.
“뭐야!”
깜작 놀란 지학선은 곧바로 신비를 발동시켰다.
지이잉
그의 심장에서 뿜어진 기운은 반경 3미터 범위를 뒤덮으며 돔 형태의 방어막을 만들어 냈다.
더불어 배창훈과 장호, 신태양의 몸에도 똑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지학선의 신비는 하얀 연기를 밀어내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미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은 하얀 연기는 지학선의 어깨 위에서 사람의 머리를 만들어 냈다.
“선배님, 미안요!”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지학선의 몸통을 휘감고 있는 하얀 연기는 다름아닌 민소라.
그녀는 머리만 사람이 된 괴기스런 모습이었고, 지학선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그대로 박치기를 날렸다.
빠악!
무방비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민소라의 박치기에 머리를 얻어맞은 지학선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동굴 안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박해성이 ‘어?’하는 소리를 내며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귀신처럼 그의 뒤로 다가가 뒷목을 내려친 인물은 권윤성이었다.
“뒤쪽이야, 뒤쪽!”
동료들이 둘이나 당하고 나서야 누군가 접근해 왔다는 걸 깨달은 장호가 숨어 있던 장소를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배창훈과 신태양, 박대만도 모두 각개격파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 뛰쳐나와 한쪽으로 합류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은 그럴 수가 없었다.
몸을 날리는 도중에도 주변에 대해 철저한 경계를 하고 있던 박대만.
그의 측면 공간이 순간적으로 꿀렁거리더니 묵직한 뭔가가 공간을 가르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흠칫 놀란 박대만은 급히 자신의 신비인 풀셋아머를 발동시켰다.
후웅
아공간 속에서 은빛 갑주들이 튀어나와 박대만의 온몸을 휘감았다.
한치의 틈도 없는 은빛 갑주를 걸친 박대만은 보이지도 않는 공격을 막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모든 마력을 몸통에 집중시켰다.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주먹의 형상을 한 뭔가가 튀어나와 박대만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콰앙!
다행히 미리 준비한 덕분에 2미터 정도 튕겨지기만 했을 뿐, 박대만은 다치지 않았다.
“누구냐!”
박대만이 소리치며 오른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방금 주먹이 튀어나온 자리를 힘껏 베어냈다. 하지만,
후웅
아무 것도 걸리는게 없었다. 대신, 박대만의 오른팔이 뭔가에 맞아 확 들쳐졌고 오른쪽 옆구리가 훤히 드러나고 말았다. 그곳으로 보이지 않는 공격이 또 다시 작렬했다.
꽈앙!
주먹의 형상이 박대만의 옆구리에 쑤셔 박히는 순간,
콰직-
이번엔 튕겨지지 않고 주먹이 갑주를 우그러뜨려 버렸다.
“크윽!”
박대만이 투구 속에서 고통에 찬 신음을 터트렸을 때,
꽈앙. 꽝!
연속으로 두번 충격파가 터져나오며 박대만의 거구가 좌우로 크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세 번째 충격파는 박대만의 턱 아래에서 터져나왔다.
콰앙!
박대만의 머리가 위로 튕기듯 젖혀지며, 그의 거구까지 1미터 높이로 떠올랐다. 상대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휘웅
마치 사람의 다리처럼 생긴 형상이 허공에서 반월의 궤적을 그려내더니 그대로 박대만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꽈아앙!
빛이 번쩍할 정도의 충격파가 터졌다.
그리고 박대만은 실 끊어진 연처럼 튕겨져 나가 동굴 벽에 쳐박히고 말았다.
쉬우우우우우
박대만을 날려버린 다리의 형상이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며 서서히 움직여 바닥을 디디고 섰다. 그리고 다리부터 차츰 색을 갖춰나가 온전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회색 빛 정장을 차려입고 새하얀 여우가면을 쓴 그는 바로 백호였다.
지학선이 당하고 5초가 채 지나지 않은 사이에 박해성에 이어 박대만까지 당해버렸다.
배창훈은 쓰러진 동료들을 훑어보다가 백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이가 없군. 어떻게 우리 뒤에서 나타날 수가 있었지?”
하지만 백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파악
상체를 살짝 숙이는 듯 하더니 백호가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그의 목표는 신태양.
백호는 철저하게 약한 상대부터 공격하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었다.
내버려두면 후방에서 골치아픈 지원을 해줄 지학선을 가장 먼저 쓰러뜨렸고, 그와 비슷한 이유로 구현 특성을 지닌 박해성을 권윤성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했다.
그리고 지학선이 벙커존 신비를 적용하지 않은 박대만을 백호가 직접 나서서 처리했다.
이로서 최전방에서 탱커를 해 줄 박대만과 후방에서 지원해줄 서포터 둘이 쓰러졌으니 남은 건 근딜러에 해당하는 세 사람 뿐이었다.
배창훈과 장호, 그리고 신태양까지.
이 셋은 모두 포지션이 중복되는 근딜러.
오랜 기간 함께 합을 맞춰오지 않은 상태에선 결코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없는 최악의 조합이었다.
백호는 이런 점까지 감안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귀찮은 신비를 지닌 신태양을 첫번째 타깃으로 삼았다.
신태양의 신비는 진화.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신비로 반드시 초반에 쓰러뜨려야 뒷탈이 없었다.
신태양도 이를 알았지만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보호해주고 있는 방어막을 믿고 있었다.
지학선은 쓰러졌지만 그가 만들어 준 보호막은 아직 잘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신태양은 백호의 능력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어느새 박대만이 떨어뜨린 대검을 잡아 쥔 백호는 자세를 낮춘 채 빠르게 달려나가며 발도술의 자세를 취했다.
그 자세에서 뭔가 위기감을 장호는 급히 신태양을 지원하기 위해 바닥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그 사이 배창훈은 방금 백호가 한 것처럼 4번 팀에서 가장 약한 민소라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권윤성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백호도, 민소라도 지원하지 않았지만 대신 장호가 신태양을 돕지 못하게 방해했다.
꽝. 꽈광! 꽝꽝꽝!
또 다시 발동된 칠보격살.
권윤성이 무섭게 접근하자 장호도 그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일단 권 선배의 공격부터 막아내고 그 힘을 역이용하자!’
장호가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타깃을 권윤성으로 바꾼 그 순간이었다.
백호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지는가 싶더니,
퍼엉-
그의 허리춤을 떠난 대검이 허공에서 소닉붐을 일으키며 폭발적인 속도로 공간을 베고 지나갔다.
백호와 신태양과의 거리는 5미터.
아직은 검의 힘이 닿지 않아야 정상이건만,
콰직!
신태양의 몸을 보호하고 있던 방어막이 찢겨져 나갔고, 그 틈으로 백호가 파고들었다.
신태양은 방어막이 찢기는 장면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미리 준비하고 있던 마력을 있는 힘껏 끌어올리며 신비로 백호의 몸을 급하게 스캔했다.
신태양의 신비, 진화는 상대의 능력을 빠르게 스캔해 그 능력의 역상성에 해당되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그리고 그 역상성 능력을 사용해 전투를 벌이며 상대의 기술을 습득하고 점차 강력한 위력을 발휘해 결국은 쓰러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신태양의 신비가 백호를 스캔하여 선택한 역상성 능력은 어처구니 없게도 ‘비행능력’이었다.
보통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역상성 공격을 날림으로써 승기를 가져오기 마련인데, 이번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신태양은 복잡한 생각을 끊고, 급히 자리를 박차며 갑자기 생성된 비행능력을 이용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백호의 시선이 날아오른 신태양 쪽으로 향한 순간, 그가 검을 내던져 비행의 흐름을 탁 끊어 버렸다.
신태양이 풍차처럼 휘돌며 날아드는 검을 피하기 위해 허공에서 멈칫했을 때, 백호가 가볍게 뛰어올랐고.
푸화아악
발에서 강력한 화염을 뿜어내며 팽이처럼 핑그르르 회전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10여미터의 거리를 건너뛰더니,
뻐어어억!
아직 두 번째 스캔을 시도조차 하지 못한 신태양의 옆구리를 발로 후려차 버렸다.
“컥!”
신태양은 찰나의 실수로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대로 튕겨나간 신태양은 반대쪽 벽에 거칠게 부딪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배창훈도, 장호도 신태양의 상태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여기서 신경을 분산했다간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는 걸 잘 알았기에 애초의 목표를 마무리 짓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켰다.
배창훈은 유체화로 도망치려는 민소라의 꼬리를 잡아챘다.
그는 이미 이 유체화가 물리력이 통하는 유형의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
배창훈은 그 상태로 유체화 상태의 민소라를 바닥에 메쳐버렸다.
퍼억!
단 한번의 공격에 바닥에 곤두박질 친 민소라는 유체화가 풀리며 그대로 기절했다.
그와 거의 같은 시점.
장호는 자신의 신비인 ‘카피’로 권윤성의 칠보격살을 그대로 복사했고, 똑 같은 신비를 펼쳐냈다.
꽝! 꽈광, 꽝!
넓은 동굴 바닥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힐 때마다 땅이 퍽퍽 파이고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그러다 서로를 향해 일곱번 째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
꽈아아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5미터 크기의 거인이 확 튀어나왔다.
거인과 거인이 힘겨루기를 벌이는 동안 아래쪽의 두 사람은 각자의 격투술을 이용해 살벌한 전투를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승부는 금방 날 것 같지가 않았다.
마력은 장호가 높았지만, 전투경험이 많은 권윤성은 어렵지 않게 장호의 공격을 받아내며 역습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을 힐끔 돌아본 배창훈.
그는 혼자서 백호를 상대할 기회를 잡게된 것에 만족스런 웃음을 그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백호도 배창훈과의 1대 1 대결에 관심이 있는지 아까처럼 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생각 이상인데?”
배창훈은 예상보다 훨씬 강한 백호에게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과찬입니다.”
“나보다 어린 것 같으니 말을 편하게 해도 되겠지?”
“편하신대로.”
“세상은 참 재미있어. 한동안은 현도나 나 정도 되는 강자가 나타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무색하게 바로 내 앞에 나타나 버렸군.”
배창훈의 이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탈 인간급의 윤현도만큼은 아니어도, 배창훈 또한 상식을 뛰어넘는 강자였기에 이런 말을 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기프트로 읽혀지는 배창훈의 463이지만, 마력커버로 숨겨지는 마력을 감안한다면 최소 900이 넘는 엄청난 강자였다.
게다가 배창훈의 신비는 ‘먼치킨’.
얼핏 들으면 무슨 해괴한 신비냐고 비웃을 만한 명칭. 하지만, 실제로 발동된 상태를 목격하게 된다면 절대 그럴 수 없다.
신비 먼치킨.
이건 이름 그대로의 먼치킨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발동과 동시에 사용자의 육체적 능력치를 두 배로 뻥튀기 시켜주는데 어찌 먼치킨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여기서 말하는 육체적 능력치란 속도와 파워는 물론, 지구력과 체력, 방어력에 동체시력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신비는 너무도 강력한만큼 발동에 필요한 마력량이 무척이나 컸으며, 초 단위로 대량의 마력이 쑥쑥 빠져나가기 때문에 유지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하지만 배창훈의 마력은 이 신비를 최소 5분은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늘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적수를 만났으니 어찌 즐겁지 않을까.
“이제 당신과 나, 둘 뿐입니다.”
백호는 이곳까지 오는동안 아무도 자신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넌지시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드디어 나와 너, 둘 만 남게 된 거다.”
이에 배창훈은 일부러 단 둘이 남게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백호의 웃음기 섞인 대답이 흘러 나왔다.
“오래 기다리신것 같은데, 바로 시작해 보죠.”
“부디 내 기대에 부흥할 수 있길 바란다.”
“만족하실 겁니다.”
“대답한번 시원해서 좋군.”
대화는 이제 끝났다.
백호도 배창훈도 서로를 마주 선 상태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20여 미터나 떨어져 있던 거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19미터. 18미터. 17미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15미터까지 줄어들었을 때,
콰앙! 쾅!
두 사람 모두 바닥을 찍어차며 서로를 향해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두 사람의 주먹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