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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반갑다. 난 김서준.”
김서준은 최다미와 인사를 한 뒤, 바로 그녀의 딸 남이솔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남이솔은 15살로 중학교 2학년이었다.
짧은 단발머리에 굉장히 귀여운 얼굴을 한 여자아이였는데, 사람 낯을 가리는지 바로 최다미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나, 남이솔….이에요.”
가까스로 자기 소개를 마친 남이솔은 최다미의 등에 아예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휴…. 이솔아. 이젠 이 집에서 이분들하고 함게 살게 될건데, 시작부터 이러면 어쩌니? 엄마가 말했지? 정말 좋은 분들이라고.”
“으응…. 아, 알아.”
“그럼 우리 딸, 노력을 좀 해 보는게 어떨까?”
최다미는 자신의 딸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라 걱정이 많아 보였다.
“어머머. 다미씨, 너무 그러지 마. 며칠 지나면 금방 자기 집이라 생각하고 잘 뛰어놀텐데 뭐. 이삿짐 싸느라 힘들었을텐데 얼른 쉬어. 짐은 천천히 풀어도 되니까.”
백연지는 사람좋은 미소를 그리며 두 모녀를 거실로 데리고 갔다.
“저흰 힘든거 하나도 없어요. 요즘은 이사 시스템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우린 손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이삿짐 센터가 모두 알아서 해 주거든요.”
“에이, 그래도 그렇지. 나도 이사 자주 해봐서 아는데, 아무리 짐이 적고,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도 이사 자체가 스트레스더라니까? 그러니 일단 쉬고 있어. 내가 마실 것 좀 내올게.”
“아니에요, 언니. 이젠 그런 잡일은 저한테 맡겨요. 그러려고 이 집 들어온건데요, 뭐.”
최다미는 자신이 헌감국의 유령 요원이라는 사실을 그다지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여인이었다.
아무리 임무라고는 해도 유령의 국장으로부터 이 가족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고, 가사도우미 역할을 수행하라고 했으니 그 일에 진심을 다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딸까지 함께 이 집에 들어오게 된 이상, 집안 일을 하는 것은 곧 자신의 딸을 돌보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잡일 아니고, 집안 일! 난 집안 일을 절대 가볍게 보는 사람이 아니니까 다미씨도 꼭 기억해 주길 바랄게. 알았지?”
백연지가 생긋 웃으며 하는 말에 최다미가 움찔했다.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본 것 같았다.
백연지에겐 나름의 카리스마가 있었고, 그녀를 거스르게 되면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았다.
“다… 당연하죠. 꼭 기억할게요. 그럼 오늘은 언니한테 부탁할게요.”
최다미는 바로 한발 물러섰다.
그러자 백연지는 활짝 웃는 얼굴로 기분좋게 주방으로 향했다.
김서준은 이 짧은 상황을 지켜본 것만으로, 최다미가 백연지 여사의 외유내강인 성격을 최대한 맞춰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남이솔 뿐.
이 어린 여학생은 다 좋은데 너무 숫기가 없고 낯을 가린다.
엄마인 최다미는 괄괄한 여장부 스타일인데 딸은 정 반대라니.
‘아버지 성격을 닮았나?’
아니면, 남이솔의 아버지인 남진호가 1년 전 임무 중 사망하면서 그 충격으로 저런 성격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김서준은 자신의 집에서 계속 봐야할 사람이라면 가급적 밝고 활기차게 지내주길 바랐다.
“여기 1층엔 방이 많으니까 두 분이 쓰고 싶은 용도로 마음껏 써도 됩니다.”
“나랑 이솔이가 쓸 방 두 개면 충분해. 보증금도 안받고 월세만으로 이 큰 집에 살 수 있게 해줘서 얼마나 고마운데.”
김서준은 최다미 모녀가 1층을 자유롭게 쓰는 대신 약간의 월세만 받기로 했다. 하지만 그 월세도 시세의 30%밖에 되지 않아 전혀 부담이 없는 금액이었다.
“고맙긴요. 저야말로 이모님 가족하고 함께 살 수 있게 되서 얼마나 마음이 편한데요. 그리고, 이솔아. 앞으로는 그냥 오빠처럼 여겨. 이 집도 네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지내고.”
“네? 네…. 그럴게요.”
남이솔은 여전히 김서준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이솔이가 아직은 많이 서먹한가봐. 원래는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최다미의 말에서 남이솔이 이런 성격이 된 이유를 대충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아버지 사고가 원인이겠구나.’
이유를 알게되니 남이솔이 왠지 가엽게 느껴졌다.
김서준 자신도 어린 나이에 부모님 모두를 잃어본 경험이 있기에 남이솔의 상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솔아. 오빠랑 같이 집 구경 할래?”
김서준의 말에 남이솔은 다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김서준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따라오라고 손짓하자 최다미를 힐끔 바라봤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제 여기서 살 건데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야지. 얼른 다녀오렴.”
“으응….”
남이솔도 이렇게 커다란 집은 처음이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고 부담스러웠지만 김서준의 친절함에 두껍게 쳐져있던 마음의 벽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김서준은 남이솔을 데리고 집 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1층에 있는 방들과 가족실, 미니 영화관을 비롯해 2층의 부모님 공간과 김서준이 단독으로 쓰는 3층까지 모두 보여주었다.
남이솔은 처음엔 저택의 엄청난 규모에 놀라워 하다가 너무도 보기좋게 꾸며진 집안을 둘러보며 차츰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3층까지 다 돌고 지하의 수련실까지 왔을 때에는 김서준 혼자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남이솔도 간간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여긴 오빠가 이런 저런 수련을 하는 곳이야. 가끔 이상한 굉음이 울리더라도 너무 놀라지는 말고.”
김서준의 설명에 남이솔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오빠가 수련할 때 구경하러 와도 될까요?”
“구경? 당연히 되지. 대신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꼭 미리 말하고 와야 한다?”
“네! 그럴게요!”
남이솔은 수련실에 대한 관심보다 김서준이 각성자로서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훨씬 큰 듯했다.
‘각성자가 되고 싶은 건가?’
김서준은 남이솔이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바로 파악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각성자에 대한 관심이 큰데 최다미는 남이솔을 헌터 학원에 보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최다미는 자신의 딸마저 각성자가 되었다가 남편처럼 잘못될까봐 아예 그렇게 될 가능성을 없애려는 것 같았다.
‘그런다고 자연각성까지 막을 수는 없을텐데.’
헌터 학원은 학생들로 하여금 좀 더 빠르고, 쉽게 각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각성 후에 어떻게 해야할 지를 자세하게 가르쳐 주는 곳이다.
때문에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고 각성할 사람이 각성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학원에서 각성에 대한 기본 교육을 받지 않은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나중에 다미 이모님하고 따로 이야길 해 봐야겠구나.’
괜히 각성자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가 최다미한테 남이솔이 크게 혼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집 구경을 시켜준 덕분에 남이솔이 김서준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말 수는 여전히 적었지만, 적어도 어디로 숨거나 하진 않게 되었으니까.
***
“다녀오겠습니다!”
김서준은 백연지 여사와 최다미에게 인사를 한 뒤, 남이솔에게도 손을 흔들어 주고는 집을 나섰다.
김포의 아라마리나 수상 계류장을 네비에 찍어 두고 차량 A.I에 자율주행을 맡긴 김서준.
차가 주행을 시작하자 김서준은 운전석에 편안하게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니온 코어를 오토마톤이나 강림체에도 심을 수 있지 않을까?’
어제부터 내내 김서준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는 생각이었다.
유니온 코어는 사물에 심어 각성시킨다고 되어 있으니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아공간에 들어가지지 않으면 사물로 인식이 안되려나?’
김서준이 알기로 아공간에는 생명체가 아닌 사물은 무조건 넣을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우기와 치호는 이미 아공간에 넣을 수 없다는게 판명된 상태라 사물이 아닌 생명체로 인식될 가능성이 컸다.
‘말이 인공체지 녀석들은 생명체로 인식되기에 충분하긴 해.’
그렇다면 강림체인 부우는 어떨까?
소환체인 스컬은?
당연히 사물에 속하는 예거의 기프트도 유니온 코어를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당장이라도 지금 떠오른 의문점을 해결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유니온 코어의 마력 잔량이 11% 밖에 안되는 이상 적어도 내일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김서준은 내일 저녁에 코어의 잔량이 100%가 된 것만 확인되면 모든 걸 확인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김서준의 집에서부터 목적지인 김포 아라마리나 수상 계류장까지는 약 1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토요일 오후라 유동 차량이 많았고, 김포 근처에서 특히나 정체가 심해 다소 긴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여유있게 출발해서인지 김서준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땐, 2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었다.
수상 계류장 근처의 아울넷 건물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1층의 커피숍으로 들어가자 왠지 모를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재빨리 기프트를 사용해 보니 커피숍 내의 12명이나 되는 인원에게서 마력 수치가 확인되고 있었다.
‘커피숍 전세냈나? 죄다 예거 요원이잖아?’
커피숍 곳곳에 흩어져서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인원만 8명이고, 커피숍 안에 단독으로 마련된 미팅룸에도 4명이 더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종업원으로 위장한 사내가 다가오더니 김서준을 미팅룸 쪽으로 안내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네.”
김서준은 안내에 따라 미팅룸으로 향했다.
블라인드가 쳐진 미팅룸 안으로 들어서니 먼저 와 있던 네 사람이 김서준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번 신입은 시간 관념이 제대로 박혀있어서 마음에 든다니까? 아무튼 늦지 않게 잘 왔어, 김서준 요원.”
가장 먼저 반겨준 사람은 이채윤이었다.
그녀 오른쪽에는 권윤성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가볍게 눈인사를 해 보였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권윤성은 감정이 없는 로봇 같아서 몇 년이 지나도 자신과 친해질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이채윤 왼쪽엔 이리나가 있었는데, 아카데미에서 친한척을 하지 못한 게 아쉬웠는지 김서준을 보자마자 방긋 웃으며 손을 마구 흔들어 댔다.
그 모습이 꼭 주인을 알아본 댕댕이 같아 보여 김서준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나머지 한명은 당연히 정아름이었다.
정아름은 자신의 신비가 지닌 패널티 때문에, 혹시라도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까봐 알아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하지만 김서준이 나타나자 바로 자신 옆자리 의자를 빼내며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다들 빨리 오셨네요.”
“오늘 작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지. 일단 앉아. 뭐 마실…. 아, 김서준 요원은 늘 블랙이라고 했지?”
“네. 그렇긴 한데…. 혹시 더 올 사람이 있습니까?”
김서준은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이 총 다섯 개라는 걸 알아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튼 작은 거 하나를 놓치는 법이 없다니까? 네 말이 맞아. 오늘 작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 특별히 넘버링 한명을 더 불렀어. 잠시 화장실 갔으니까 금방 올거야.”
“넘버링이요?”
“그래, 넘버링.”
이채윤의 대답과 함게 닫혔던 미팅룸 문이 다시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섰다.
“신태양?”
미팅룸에 들어선 젊은 청년은 다름아닌 07기수 동기생인 신태양이었다.
“뭘 그렇게 멀뚱히 서 있어? 내가 뭐 오지 말아야 할 곳이라도 왔냐?”
“아니. 그런건 아니고….”
김서준은 말을 대충 얼버무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 사이 마력의 양이 엄청 늘었는데?’
김서준이 신태양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 잠시 멍하니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신태양은 생도 시절부터 마력량이 높기로 유명했는데, 지금 보니 심장 주변에서 맴도는 마력의 양이 전보다도 훨씬 많아진 것 같았다.
김서준은 자리에 앉자마자 기프트의 마력스캔 기능을 작동시켰다.
[314]
기프트로 확인된 마력량이 314면, 신태양의 진짜 마력은 628이라는 말이다.
신태양은 예거 캠프 수료식 때부터 마력커버 비율을 50%로 지정해 왔으니 손쉽게 예측이 가능했다.
‘며칠 사이에 마력이 100이나 뛰어 올랐어?’
마석을 몇 개나 쳐먹은 거냐, 신태양?
김서준은 당장이라도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심안을 써서 진짜 마력이 얼마인지, 신태양의 신비가 무엇으로 나타나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이렇게나 많으니, 원.’
다들 김서준 쪽으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어서 딴 짓은 할라야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김서준 몫의 블랙 커피가 도착했고, 약 20여분간 간단한 작전 미팅이 이루어졌다.
이번 작전은 총 2단계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1단계는 수상 계류장에 정박해 있는 요트 안에서 천간십이지의 주요 간부들을 만나는 것이다.
요트에 진입할 인원은 총 셋.
권윤성과 이채윤, 그리고 이리나였다.
김서준과 정아름은 계류장 바깥에서 몸을 감춘 채 대기하고 있다가 문제없이 만남이 이루어지면 한발 먼저 물류창고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신태양은 모두가 수상 계류장으로 향할 때, 단독으로 물류창고에 가서 신교단의 움직임을 살피는 임무를 맡았다.
원래 이 임무에는 일반 예거 요원 세 명만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넘버 포틴 신태양까지 추가되었다.
여기까지가 1단계였고, 2단계부터가 본격적인 신교단 퇴치 작전에 해당했다.
이리나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이번 물류창고 습격에 신교단의 중심 인물들이 다수 참여할 예정이었으며, 그들만 제대로 체포해도 신교단의 세력 절반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즉, 예거는 이번 작전을 발판으로 삼아 신교단 전체를 단숨에 무너뜨릴 계획이었다.
오늘 이 작전에서 김서준과 정아름이 맡은 일은 신교단이 도망칠 수 없게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주변 지리에 밝아야 했고, 적을 추적하는 일에 능해야 했다.
이채윤이 보기엔 그 역할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김서준과 정아름이었다.
“다들 본인 임무가 무언지 충분히 숙지했으리라 믿겠다.”
작전 시작이 코앞에 닥치자 이채윤이 빠지고 대신 권윤성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요원들끼리 연락은 기프트로만 한다. 적을 생포하는게 가장 좋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하다면 본인의 판단에 따라 즉결 처분을 해도 좋다. 이해했겠지?”
권윤성의 표정은 비장했다.
그도 오늘의 작전이 결코 쉽게 마무리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자 권윤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지금 바로 작전에 돌입한다.”
권윤성이 앞장섰고 그 뒤를 이채윤과 이리나가 따랐다.
신태양은 가는 방향이 달랐기에 커피숍 뒷문으로 벌써 사라져 버렸다.
“우리도 가볼까?”
김서준과 정아름은 다른 사람들보다 2분쯤 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