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북부의 야만인 (1)
덜커덩- 덜커덩-
작은 돌부리에라도 걸린 건지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마부석에서 지루한 듯 육포를 꼬나문 중년 마부가 슬쩍 고개를 돌려 객실을 훑었다.
상단의 일꾼들이 나름 꼼꼼히 쌓아둔 덕분에 내다 팔 물건들은 무사했다. 한소리 듣나 했는데, 다행이구먼.
물건이 무사한 건 확인했으니, 다음은 객실에 탄 손님들 차례였다.
제법 행색이 깔끔한 미부가 제 품에 껴안은 아이를 다독이고 있었다. 아마 마차가 들썩여서 조금 놀란 모양인데, 마부는 미간을 슬쩍 좁혔다.
“괜찮으쇼? 이쪽 길이 좀 험해서 실수가 좀 있었수다.”
미안함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사죄였으나, 미부는 고개만 살짝 끄덕여 답하고는 다시 아이를 다독이는 데 집중했다.
사람 민망하게… 대답이라도 좀 해주던가. 마부는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이며 다른 손님에게 시선을 옮겼다.
수염이 희끗한 노인이었는데, 종전의 흔들림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간간이 가슴팍이 상승하는 걸 보지 못했으면 죽었다고 생각했으리라.
“저기. 체르노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으응…? 그거야 아직 한참이지. 열 밤은 더 가야 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마부는 나름 친절하게 답했다. 질문한 자가 몹시 아름다운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귀족이라 착각할 만큼 희고 고운 피부에 윤기 나는 갈색 머리카락, 로브 위로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굴곡까지….
“커흠. 순조로우면 일곱 밤이면 충분할 수도 있고.”
마부는 노골적으로 여인의 얼굴과 몸을 훑다가 헛기침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상단주가 저 여인을 두고 귀히 모시라 당부했던 게 떠올랐다.
잘은 몰라도 괜히 불쾌하게 만들었다간 불에 타죽을 수도 있다고 엄포까지 놨었지.
‘그게 뭐야, 마녀도 아니고…?’
“뭐. 그거야 하늘에 달린 일이니, 맘 편히 있으쇼.”
“네. 고마워요.”
여인이 싱긋 웃자 헤벌쭉해진 마부가 다시 고삐를 잡으려다, 갑자기 구석탱이에 웅크리고 있는 손님에게 말을 건넸다.
“그쪽도 별일 없소?! 꼽추 형씨. 맨날 우중충하게 그러고 있으니까 뒈진 줄 알고 놀란다니까.”
걱정인지, 비꼼인지, 잘은 몰라도 결코 좋은 뜻은 아닌 듯했다.
꼽추라 불린 남자는 큼지막한 로브로 얼굴과 몸을 완전히 가린 데다가, 허리가 앞으로 보통 굽은 게 아니라 꼭 마녀의 실험으로 생겨난 생명체 같았으니까.
“괜찮소.”
“이잉…. 그러셔.”
뜻밖에도 꼽추는 몹시 중후한 목소리로 대답했는데, 마부는 콧방귀를 끼며 고삐를 잡았다.
‘병신이 무슨 여행을 다니겠다고. 세상 좋아졌구먼.’
그렇게 마차는 어미와 아이, 젊은 여인과 노인, 허리가 굽은 병자를 태우고서 나아갔다.
아르곤 왕국의 동쪽에서 출발해, 광활한 과수원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체르노 자작령까지.
“저기요.”
그러다 지루한 여정에 질리기라도 한 걸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젊은 여인이 구석에서 책을 읽는 꼽추에게 흥미를 내비쳤다.
“뭐 읽어요?”
“…….”
“태초에 존재했던 것들…. 와. 신화시대에 관심이 있으신가 봐요?”
꼽추에게서 대답이 없자 알아서 책의 표지를 살펴본 여인이 감탄했다.
“신화시대는 재밌는 속설이 많죠. 만신전 교회에선 부정하지만, 그들의 신격보다 더 오래된 옛 존재들이 마구잡이로 날뛰었던 시대라나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진짜라 생각해요?”
“…그걸 알아보려고 공부하는 거 아니겠소.”
“하하! 그러네요? 그럼 체르노 자작령에는 신화시대에 대한 연구 때문에 가는 건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으으음. 애매한 대답이네.”
학문은커녕, 글조차 모르는 이가 압도적으로 많은 시대였다. 학구열을 불태울 법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 여인은 제법 신이 났다.
설령 그 상대가 꼽추라 하더라도. 아니, 그래서 더 흥미가 가는 걸지도.
“확실히 아르곤 왕국 서쪽은 미개척지가 많긴 하죠. 그쪽에 신화시대와 관련된 유적이 있을 수도 있고. 나쁘지 않은 선택……. 꺅!”
덜컹──! 덜컹─!
여인이 신나서 얘기하다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다행히 꼽추 사내가 팔을 뻗어 여인을 붙들어 다치진 않았지만, 마차에 실은 물건들이 어지럽게 날라다녔다.
“고, 고마워요.”
“별말씀을.”
몸이 불편한 꼽추에게 도움을 받은 여인이 멋쩍게 웃었다.
균형을 잡고 일어난 그녀는 얼굴이 붉었는데, 꼽추 사내의 몸이 뜻밖에도 무척 단단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바위에게 안기기라도 한 줄 알았다.
“으흠. 뭔 사고라도 난 걸까요? 보통 흔들린 게 아닌데….”
“습격이오! 저쪽에서 활을 쏴대서 말이 놀라 크게 흔들린 거니까, 그냥 나오지 말고 얌전히 박혀계시오!”
대답은 마부석 쪽에서 돌아왔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무래도 직접 나서서 싸우려는 듯했다.
도적의 습격이야 너무 흔한 일인지라 객실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 침착함을 유지했다.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들도 있으니, 평소처럼 적당히 힘을 겨뤄보다가 적당히 돈을 치르고 통과할 거라 여겼다.
“다가오게 두지 말고 활을 쏴! 방패도 없는 것들이라고!”
“오늘 굶기 싫으면 밀어붙여─!”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제법 본격적으로 맞붙기 시작했는지, 고함소리와 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한참이나 오갔다.
‘이거 좋지 않은데.’
꼽추 사내는 창밖으로 슬쩍 시선을 던졌다. 보통이라면 진작 손 맞잡고 화해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인데, 여전히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꽤 격렬하게.
“평범한 도적이 아닌 것 같은데요…?”
“밀리고 있군.”
“장비는 너덜한데, 싸움에 굉장히 능숙해요.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걸요.”
“탈영병이거나, 강도로 둔갑한 용병 아니겠소.”
“흔한 부류네요.”
“흔한 부류지.”
여인과 꼽추 사내는 아주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여인이야 마법사라 스스로 지킬 힘이 있어 그렇다 치더라도, 제 몸 건사하기 힘든 꼽추가 그런 모습을 보이니 퍽 이질적이었다.
“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이를 껴안고 있던 중년 미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제 의견에 동조하길 원하는 듯 애절한 눈빛을 이리저리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반응은 차가웠다.
도망은 무슨. 대체 어디로 도망을 친단 말인가. 차라리 상단의 호위들이 이기길 기도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혼자 도적들 뚫고 도망칠 자신 있으면 얼마든지 그러세요. 아, 혼자는 아닌가? 아이가 있으니까.”
“그, 그런….”
여인이 비꼬듯 냉소했고, 미부는 울상이 되어선 제 아이를 부적처럼 품에 세게 끌어안았다.
“음. 여기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인 거 같은데. 그쪽은 어때요? 허리는 굽었어도 몸은 좀 튼튼하시던데.”
“글쎄.”
영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지만, 여인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는지 어깨를 으쓱이곤 객실을 나섰다.
황당하게도, 그녀의 등장으로 전투가 갑자기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도적들의 입장에선 눈이 번뜩일 만한 미인이 나타나서 관심이 쏠린 것이고, 호위들 입장에선 마법사가 몸소 나선 것에 전투를 멈춘 것이었다.
“으흠. 어디 귀족 아가씨라도 되남. 겁나 이쁘장하게 생겼네.”
“귀족? 귀족 건드리면 탈 나는 거 아니야?”
“병신아. 다 죽이면 귀족이고 뭐고 없지. 애송이처럼 왜 그래?”
도적들은 여인의 미모에 당황한 듯했으나, 아무렴 마물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인 이들인지라 오래가진 않았다.
오히려 제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곤 음흉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하하…. 힘이 넘치시는 분들이네요.”
“아가씨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우리가 사람 쪽수가 좀 많거든!”
“크하하하!”
도적들이 질 낮은 농담에 동조하듯 웃음을 터뜨렸고, 여인은 그저 방긋방긋 입꼬리를 올렸다.
이에 도적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놓고 저질스런 희롱을 당해놓고도 웃다니, 머리가 아픈 여자인가 싶었다.
아니면 머리가 꽃밭이라 이해를 못 했다거나.
그들에겐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둘 다 아니었다. 여인은 어차피 죽을 놈들에게 뭣 하러 화를 내? 정도 되는 감상밖에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인의 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작은 횃불 크기의 불덩이는 이내 사람 머리통만 한 구체가 되었고, 순식간에 쏘아져 제 바지춤을 주물럭대던 도적의 얼굴을 휘감았다.
“끄으───!”
산 채로 얼굴이 타오르는 고통에 도적이 비명을 질렀다가, 불꽃이 목구멍을 타고 폐부로 침투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되었다.
“…….”
싸늘한 정적. 이후 주춤 물러나는 도적들에게선 전의랄 게 감쪽같이 사라진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게 무려 마법사 아닌가.
서로의 전력이 엇비슷한 상황에 마법사는 비대칭전력일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주문을 쏘아대는 것만으로 확실하게 사람 수를 줄이니까.
“이런 씨-.”
“지금 공격해! 도망치게 두지 마!”
저울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상단 측 호위들은 눈치 좋게 앞으로 달려들어 벽을 만들었다. 마법사가 안전하게 주문을 쏘아댈 수 있도록 말이다.
이에 도적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혹여나 마법의 표적이 될까 무기마저 버려두고 뛰쳐나가는 이도 있었다.
그때 상황이 다시 한번 급변했다.
“이런 머저리들이.”
가장 먼저 등을 보인 도적의 머리가 갑자기 휘둘러진 대검에 의해 통째로 뜯겨져 나갔다.
대단한 용력이었다. 어지간히 정교한 솜씨가 아니면 대번에 목을 절단하기란 쉽지 않았기에.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대검을 휘두른 자의 생김새였다.
“계속 밀어붙이면 쉽게 끝날 일을…. 도망치는 녀석은 목을 뽑아주마.”
낮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연상케 했다. 무엇보다 체격이 건장한 도적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오크의 핏줄이라도 타고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갑옷 대신에 짐승의 가죽을 걸쳤는데, 훤히 드러난 복부에는 얼굴까지 이어진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야, 야만인……?!”
상단의 누군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북부 서릿골을 건넌 야만인이란 그런 존재였다. 오로지 살육과 승리를 위해 살아가는 투사들. 단 한 사람만으로 수십의 병사를 갈아 마시는 괴물….
무엇보다 야만인이 두려운 것은 그 상대가 아이건 노인이건 가리지 않고 학살을 자행한다는 점이었다.
전투의 끝에는 패배자들의 시체를 승리의 증거처럼 씹어 삼킨단 소문도 있었다.
물론 그게 진실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전부 거짓일 수도 있고, 전부 진실일 수도 있으리라.
“흐. 젊은 여자 마법사라. 가끔은 부드러운 것도 괜찮지.”
다만 야만인의 반응으로 유추하건대, 아무래도 소문이 사실인 듯했다.
야만인이 여인을 위아래로 훑으며 군침을 삼켰다.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게 성욕이 아닌, 식욕이란 것에 사람들이 치를 떨었다.
‘야만인들은 식인을 즐긴다더니, 소문이 진짜구나!’
상단 측은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리여리한 마법사보단, 오크 아들쯤 돼 보이는 야만인 쪽이 훨씬 위협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마법사가 주문을 완성해 적을 소탕하는 동안, 저 무시무시한 야만인을 위시한 도적들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얌전히 계집과 재화를 넘기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런 상황에서 살길이 열리자, 반응이 여러모로 묘해졌다.
여자라 해봐야 마차에 태운 손님밖에 없고, 돈보다는 목숨이 중하니 거래에 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리 고민하는 낯빛들이다.
“흐음…….”
한순간에 내다 팔릴 위기에 처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말 한마디로 형세를 바꿔버린 야만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퍽 의미심장했다.
한편, 여인이 나간 뒤로 조용히 바깥을 살피던 꼽추 사내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어, 어쩌려고요? 설마 나갈 생각이에요?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미부는 머뭇거리면서도 꼽추 사내를 만류했다. 그를 걱정해서는 아니었다. 병신이라도 근처에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꼽추는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천천히 일어나선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선 주변을 한번 살펴봤는데, 아무래도 상단 쪽에선 야만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듯싶었다.
호위들이 천천히 뒤쪽으로 몸을 빼내고 있었다. 그러는 도중에 꼽추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 것.
당연히, 단번에 그에게로 모든 이목이 쏠렸다.
“뭐야, 저 병신은.”
“재수 없게 시리. 저런 것도 손님으로 태우나?”
로브로 전신을 가린 꼽추를 본 도적들이 침을 뱉으며 욕을 지껄였다. 마치 역병을 품은 벌레라도 보는 눈길이었다.
“쯧. 저거는 그냥 죽여라. 기분 나쁘게 생겼군.”
야만인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손을 휘휘 저으며 죽이라 명령했고, 기세등등한 도적 하나가 거리를 좁혀왔다. 마차 앞에 멀쩡히 선 마법사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느긋한 걸음으로 꼽추의 앞에 선 도적이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설마 거동도 불편한 꼽추가 반격할 거라곤 생각조차 안 했는지 굉장히 무방비했다.
“흐흐. 왜 그렇게 낳았냐고 엄마한테 가서 따져라. 지옥에서 말이야.”
“가정교육을 못 받았나 보군. 패드립은 금지인 거 모르나?”
“뭐?”
의문을 토하던 순간-.
꼽추의 로브 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코앞에 있던 도적에겐 오우거의 팔다리처럼 거대한 근육 덩어리가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게 사람의 팔이라는 걸. 그 팔이 자신이 그토록 무시한 꼽추의 것이라는 걸.
“살……!”
그는 죽는 순간에야 깨달았다.
우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선명했다.
‘무슨 소리야 이게.’
머지않아 벌어질 살육을 잔뜩 기대하던 도적들, 매정하게 손님들을 버리고 도망치던 상단의 사람들, 무정한 눈으로 상황을 관망하던 야만인과 팔짱을 끼고 웃고 있던 마법사까지….
모두가 입도 뻥긋 않고 꼽추 사내를 바라보았다. 뭐지? 한 손으로 목을 부러뜨렸다고? 정말 마녀의 실험체라도 되는 건가? 그런 의문들이 이어졌다.
“시, 시벌…….”
“마녀. 마녀가 만든 괴물이다!”
우드득. 우드득.
이번엔 꼽추 사내의 몸에서 섬뜩한 뼈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다만 그 결이 아까와는 달랐다.
부러지는 게 아니라, 깊은 잠에 들었던 용이 기지개를 켜는 것만 같았다.
우드득. 우드득.
노파의 그것처럼 휘었던 허리가 곧게 펴지고, 안쪽으로 잔뜩 웅크린 탓에 왜소하게 보였던 덩치가 빵 부풀듯 불어났다.
이내 완전히 몸을 편 꼽추…. 아니, 거한이 로브를 거칠게 뜯어버렸다.
“웬만하면 가만히 있으려 했는데 말이야….”
그는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 거대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다란 도적들의 우두머리가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였다.
떡 벌어진 양어깨는 사람 서넛은 넉넉히 태울 만큼 넓었고, 두꺼운 팔다리는 오크나 트롤 같은 그린스킨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고 도적들의 우두머리와 마찬가지로 헐벗은 상체에 짐승의 모피를 걸쳤는데, 그 위용에서 커다란 차이가 났다.
고작 시체 주제에 당장이라도 이 자리의 모든 인간들을 물어 죽일 것만 같은 위압감을 풍기는 데다가, 거한의 몸집에도 넉넉하게 느껴질 만큼 커다랬으니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설산의 풍경을 연상케 하는 거한의 잿빛 피부와 회색의 눈동자였다.
“그, 그 모습은…!”
“짝퉁이 설치는 걸 내버려 둘 수가 있어야지.”
혹한의 대지라 불리는 북부의 서릿골을 건넌 회백의 투사. 진짜 야만전사가 자신을 흉내 내는 가짜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